놋푼주 그득 ‘지실밥’에 우럭콩조림·보리쉰다리…“이게 제주 맛!”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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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0   |  발행일 2017-11-10 제35면   |  수정 2017-11-10
■ 푸드로드 제주도
제주 맛의 원형을 지키는 母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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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콩조림, 작빼국 등 철저하게 제주의 맛으로 구성된 낭푼밥상. 중심은 항상 감자밥으로 불리는 ‘지실밥’이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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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푼밥상을 통해 제주음식 인문학의 신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김지순·양용진 모자.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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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밥상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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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유통되는 민속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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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푼밥상의 제주 토속음식인 깅이범벅(왼쪽)과 구쟁기구이.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제공>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많은 자료와 정보를 건네준 사람이 있다. 바로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장이다. 연구원은 2000년에 설립됐다. 그동안 제주유배문화음식 시식회를 열고 제주전통음식 330선 도록과 제주특산물 요리법 개발 및 레시피 책자를 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황혜성’으로 불리는 김지순 제주향토음식 명인 1호(2011년 지정). 김 명인은 제주음식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교량이다. 양 원장은 어머니가 품은 제주밥상의 대명사인 낭푼밥상에 인문학을 누룩처럼 첨가하고 있다.

모자 덕분에 제주에 번듯한 두 개의 밥상이 기운생동할 수 있었다. 오래된 건 ‘낭푼밥상’, 뉴버전은 ‘해녀밥상’. ‘낭푼’이란 말에는 제주스러움이 묻어 있다. 표준어로는 ‘양푼’. 낭푼은 둥근 놋그릇이나 나무로 만든 푼주를 말한다. 양은푼주의 준말이 양푼이다. 해녀인 엄마가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느긋하게 앉아서 여봐란 듯이 밥먹을 겨를이 없었다. 빨리 상을 치우려면 낭푼 같은 큰 밥그릇 하나여야만 했다. 성산읍 지역 한 해녀의 푸념에 그 한스러운 흔적이 묻어 있다. “낭푼에 떠놓은 밥에 마농(마늘)지와 반치지(파초지) 하나 있어도 좋았다.”

‘제주향토음식 名人 1호’ 어머니 김지순
아들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존硏 원장
텃밭 푸성귀·해산물로 차린 낭푼밥상
제주 식재료·전통조리법으로 되살려

작년 제주음식 전문한식레스토랑 오픈
10여가지 단품으로 제주 전통 맛 선사
발효음료 보리쉰다리·돼지갈비국 작빼국
가장 제주스러운 음식만으로 차린 한상



물질 나갔던 해녀는 점심을 차리러 잠시 집에 들른다. 이것저것 차릴 시간도 없이 텃밭의 푸성귀를 따서 된장 한 수저 푹 떠서 옆에 놓았을 것이다. 여름철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차롱’에 보리밥을 담아냈다. 조밥을 지어먹었던 겨울에는 차롱보다는 나무나 놋낭푼을 이용했다. 낭푼밥상도 계절을 탈 수밖에 없었다.

김 명인은 특히 해산물을 축으로 한 ‘해녀밥상’을 처음 공론화한 주인공이다. 10년 전 한 잡지 인터뷰에서 제주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때 해녀들과 함께했던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해녀밥상이라는 말을 처음 언급하게 된 것. 그 이후 제주 해녀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다각적 활동이 펼쳐지면서 해녀밥상은 더욱 대중화됐다. 물론 해녀들의 음식도 낭푼밥상에 기본을 두고 있다. 농업과 어업을 함께해야 하는 해녀였기에 바다에서 나오는 음식뿐만 아니라 밭에서 난 음식까지 함께 들어있어야 그게 진정한 해녀밥상이다.

그런 김 명인이기에 요즘 각종 방송에 의해 너무 부풀리고 드라마틱하게 변주되는 해녀문화에 대한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불턱(임시 작업장)에서는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잘해야 미역귀나 소라를 구워먹었던 것이 전부였는데 최근에는 불턱에서 솥을 올려 밥해먹는 모습을 버젓이 연출하는 방송을 볼 때 참 아쉽다”고 말했다.

양 원장도 한 마디 건넨다.

“성게는 먹기 위해 잡은 것이 아니라 해녀들이 바다를 보호하기 위해 잡아야 했던 것이지만 지금은 귀한 식재료가 됐습니다. 해녀들의 음식 ‘깅이죽’은 해녀할망들이 찬바람 불 때 끓여먹던 보신 음식입니다. 3월에 잡은 ‘폭깅이’는 콩과 볶아서 반찬이 되었고 6월에 잡은 건 돌절구에 갈아서 죽을 쑤기도 했죠.”

원형이 먼저고 그 다음에 응용해야 되는데 다들 응용부터 먼저 하려고 한다. 육지의 욕망에 해녀가 놀아나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모자는 지금도 제주음식의 원형을 제대로 정리하고 찾기에 최선을 다한다. 육지에서 유입된 식재료와 제주도만의 식재료, 그게 어떻게 이합집산되는가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양 원장은 제주 이주민들의 가내 수공업 장터인 ‘지꺼진 장’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제주 특산물 공동 브랜드인 ‘헤올렛’ 확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헤올렛은 제주시에서 나는 수산물, 축산물, 가공식품 등을 총칭하는 브랜드.

◆제주음식 전문 한식당 낭푼밥상

모자는 다짐했다. 제주도 식당음식이 너무 육지것을 닮아가니 제주도만의 식당을 차리자고 결심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애월에 있는 제주음식 전문한식레스토랑인 ‘낭푼밥상’(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965)이다. 지난해 차렸다. 2005년 서울 운현궁에서 제주음식 전시회를 진행하던 중 관람객의 반응을 접하면서 이 식당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현재 부지는 15년 전 언젠가 제주향토음식박물관을 세워보자고 생각해 어머니가 매입해 둔 것이다. 형식은 가장 모던하지만 음식 내용과 정신은 가장 제주적이다. 그래서 요즘 외지인들한테 주목받고 있다.

여기서 선보이는 음식들은 제주 식재료의 본질과 변형을 10여가지 단품 음식을 통해 한눈에 보여준다. 어머니가 평생 수집한 제주의 맛이다. 양 원장은 시간만 나면 시장으로 나간다. 토박이들이 갖고 온 온갖 식재료를 사갖고 오기 위해서다. 그리고 직접 모친과 주방에서 요리한다. 육지에서 봤던 음식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안 받기 위해서다. 그로선 자존심이 걸린 식당이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제주음식을 먹게 하자는 취지로 교육도 많이 했고 주장도 많이 했지만 변화를 선택하는 업주들이 없었고 오직 가격으로만 경쟁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면서 하나의 본보기를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82세인데도 일할 수 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싶었다. 제주음식을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토박이들이 아니라 외지인과 특히 외국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제주음식을 재해석해 보려 한 게 바로 낭푼밥상이다.

제주의 정신은 살리되 너무 신파조로 가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그는 건축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 그걸 적극 활용했다. 음식 플레이팅, 건물인테리어 등은 세계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을 만큼 고급스럽게 조율했다.

박람회를 보고 난 뒤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 전 1층과 2층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봤다. 노출콘크리트, 높은 층고, 그리고 평생 모아놓은 식기와 낡은 부엌문과 도마 등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2층은 커피잔 박물관 같았다.

건축도 색다르게 접근했다. 내부를 박물관처럼 꾸미려 노력했고 그 분위기에 걸맞게 음식을 담아내려 했다. 메뉴 개발은 어머니가 적립해 놓은 옛 방식의 조리방법을 최대한 활용하고 약간의 현대적인 조리법을 콜라보했다. 복고가 가장 첨단스럽게 구축된 것 같았다.

◆너무 비싸다는 비판도

특히 토박이한테 눈총을 많이 받았다.

“토박이들은 낭푼밥상이라는 상호를 듣고 시골밥상 같은 소박한 음식들로 생각하다가 5만원대의 가격을 들으면 많이 놀라고 심지어 욕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는 후줄근한 낭푼밥상이 아니라 퓨전 낭푼밥상의 신지평을 열고 싶었다. 그래서 토박이를 주고객층으로 잡지 않았다. 요즘 제주도를 찾는 VIP 및 육지 미식가들이 제주만의 식당으로 낭푼밥상을 첫손에 꼽는다. 실제 식사한 고객의 반응도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80% 이상이 외지인들이고 그중 외국 손님의 비중도 10% 가까이 된다.

양 원장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향토적인 느낌을 잃지 않으면서 투박해 보이지 않는 담음새와 자극적이지 않게 간을 맞추는 일이 가장 힘들었죠. 향후 과제는 매출을 안정화시키고 좀더 많은 제주의 토종 식재료를 찾아내서 로컬 비율을 더 높이는 겁니다. 좀더 많은 제주의 전통음식들을 기록하는 것도 제 일이죠. 아울러 제주산 식재료를 이용한 가공식품 개발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낭푼밥상 명인 A코스(10가지 메뉴·5만5천원)를 맛봤다. 양식용 기물에 담긴 앙증맞은 크기의 전채류는 품격 높은 다이닝레스토랑의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정란에 제주 토종 참기름을 곁들인 독세기(달걀) 반숙부터 나왔다. 한술 뜨니 심심했다. 별미는 빙떡이다. 무미(無味)라서 더 그렇다. 얇게 빚은 메밀에 재래식으로 짜낸 참기름, 깨 양념한 무나물을 넣고 빙빙 말아놓으니 메밀전병을 닮았다. 벌겋게 무치거나 기름에 달달 볶지 않으니 참 순박하다 싶다. 삼색전에는 간장젤리로 간을 맞춘다. 젤라틴이 아닌 제주 한천으로 만들었다.

고춧가루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된장·간장으로만 심심하게 간을 한다. 우영팟(텃밭) 채소도 수북하게 담긴다. 메밀크림이 무스처럼 가미된 돼지갈비수육은 정말 퓨전스러웠다.

후식으로 낭푼밥상이 차려졌다. 놋푼주에 담긴 ‘지실밥(감자밥)’이 강력한 포스로 다가왔다. 보리, 산듸쌀(밀쌀), 거기에 지실(감자)로 지은 고슬한 밥이다. 국은 두 종류, 미역국과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돼지갈비국인 작빼국이다. 그리고 양 원장이 가장 아끼는 메뉴 중 하나인 우럭콩조림도 낭푼밥상을 더욱 제주스럽게 어루만져준다. 안동식혜보다 더 상큼함을 준 건 ‘보리쉰다리’. 이 발효음료는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다. 첨가제가 없어 육지유통은 불가하다고 한다. 이 밖에 음식에 어울리는 오메기술, 녹고의눈물, 황칠주, 고소리술, 니모메 등 6가지 제주 전통주도 맛봤다.

양 원장이 제주도 식당에 가면 어김없이 놓여있는 식초병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준다. 중국집 때문이라고 한다. 제주 토속 식초인 ‘쉰다리식초’(일종의 막걸리식초)는 구하기도 힘든데 중국집들이 빙초산을 편리하게 쓰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단다. 이 식초는 하절기 자리물회 간 맞출 때 사용한다. 토박이는 거의 식초에 길들여져 있다. 마치 목포 토박이가 홍어의 지린맛을 좋아하는 것처럼.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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