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민족, 민주의 가치 최우선” 복간사에 4·19계승 의지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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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9 07:24  |  수정 2019-04-19 11:35  |  발행일 2019-04-19 제5면
강제폐간부터 복간까지 ‘영남일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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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는 1989년 4월19일 복간을 앞두고 인력과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고속윤전기는 물론 신문제작 전산작업에 필요한 CTS기자와 제판시설을 마련했다. 특히 인력확보를 위해 치러진 경력 및 신입사원 공채시험에는 3천여명이 응시해 사상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위로부터 복간 소식지를 인쇄하고 있는 고속윤전기, 소식지를 받아보는 시민들, 1988년 신입사원 입사식 모습. <영남일보 DB>

1945년 ‘최초의 순수 민간지’로 창간한 영남일보의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창간 이래 영남일보는 광복의 희열과 전쟁의 참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촛불혁명까지, 환희와 질곡의 역사를 담담히 기록하며 독자와 함께했다. 특히 1980년 11월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른 강제폐간과 1989년 4월19일 다시 독자와 재회한 복간까지의 역사는, 격동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생생한 증언이다. 무엇보다 영남일보가 복간일을 ‘4월19일’로 정한 이유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드높인 ‘4·19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창간 이래 지역과 민족, 그리고 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영남일보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의미이면서 영남일보의 ‘복간 정신’이기도 하다. 4·19혁명 59주년·영남일보 복간 30주년인 2019년 4월19일 오늘, 강제폐간부터 복간까지 질곡의 현대사를 견뎌낸 영남일보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1980년 11월25일 강제폐간

1979년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본격적으로 언론의 입과 눈을 막기 시작한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방점을 찍었다. 비판적 성향의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하고, 지역일간지는 ‘1도 1지(一道一紙)’ 정책에 따라 시·도별로 하나의 신문사만 남기고 모두 폐간시켰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 1천명 이상이 해직되기도 했다.

당시 영남일보는 권력에 눈치를 보지 않는 정론지로 정평이 나있었다. 창간 이후부터 정론직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부패한 권력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야권 성향의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 이승만정권 독재시절에는 이에 항거하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구상 시인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19혁명 때는 1면에 고대생들의 집회를 톱 기사로 보도하고 사설을 통해 ‘민중의 울분을 강압적으로 막으려는 정부의 처사는 자멸의 길’임을 경고하기도 했다.

신군부에 낙인 찍힌 영남일보
80년 격동의 시기 비판적인 논조
금기시한 ‘김대중’ 기사화 하기도
폐간때 전국 유일 편집국장 해직
8면 폐간호마저 군데군데 ‘칼질’

민주화 열망 속 독자와 재회
복간 직전까지 소식지 5번 찍어
매회 30만∼40만부 전역에 배포
복간 1기공채 전국서 3천명 몰려
대구경북 사상 최고 경쟁률 기록

영남일보는 신군부가 들어선 ‘80년 격동의 시기’에도 비판적인 논조를 이어갔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고 금기시되었던 ‘김대중’을 과감히 기사화하기도 했다. 신군부에 ‘눈엣가시’였던 영남일보는 언론통폐합에 따른 강제폐간의 칼날을 비껴갈 수 없었다. 폐간 과정에서 이종명 편집국장을 비롯한 김도현 정만교 이준노 이기룡 최영일 조학송 김송태 정동우 서원자 장수영 정경렬 최명환 이택기 서수호 김준영 박홍렬 안성백 이경훈 등 19명의 기자가 해직되기도 했다. 편집국장 해직은 전국 언론사 중 영남일보가 유일했다. 해직된 이종명 국장은 신군부에 비판적인 ‘A급 인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당시 이재필 영남일보 사장이 ‘편집국장을 해직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구명운동에 나선 것도 신군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결국 영남일보는 1980년 11월25일 지령 11499호를 끝으로 강제폐간되고 매일신문과 통합되고 만다. 절필의 순간에도 영남일보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8면으로 제작된 폐간호는 군데군데 검열관의 칼질 흔적이 뚜렷했지만 복간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복간의 희망, 그리고 뜻밖의 암초

영남일보 강제폐간 후 7년이 지난 1987년. 한국정치는 다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군부 세력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시국 수습방안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6·29선언은 정치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는 동시에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언론의 족쇄를 채워왔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됐다. 강제폐간된 신문이 다시 복간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6·29선언 이후 이재필 사장은 빠르게 움직였다. 충분한 자금이 없었던 그는 영남일보 복간을 위해서는 외부자금을 수혈해야만 했다. 고심 끝에 선친과 각별한 인연이 있고 자신과 경기고·연세대 동문이었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에게 동참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다. 김 회장도 영남일보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영남일보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이재필 사장의 요청에 대우 측은 흔쾌히 수락했다. 대우 측에서는 복간자금 3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이 사장은 서문로 옛 사옥과 제호를 제공하기로 했다.

재원이 확보되자 복간 작업은 활기를 띠었다. 1988년 3월15일 영남일보 복간추진준비위원회 서울 사무실이 신아빌딩(서울 중구 서소문동 39-1)에 문을 열었다. 대우 측에서는 조동구 상무를 보내 실무에 참여하게 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재필 사장은 해직 후 미국으로 떠난 이종명 국장에게 복간 소식을 전했다. 당시 이 국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동아일보 지사장으로 있었다. 그는 복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힘을 보탰다.

이후 복간작업은 더욱 속도를 냈다. 4월1일 복간추진준비위원회 대구 사무실이 중구 서문로 옛 사옥 옆 두루미식당 2층에 문을 열고 1989년 1월 초순, 16면으로 복간할 예정으로 본격적인 실무작업에 들어갔다. 4월11일 고속윤전기 4대를 구입해 옛 사옥에 설치하고 다음날에는 문공부에 정기간행물 등록을 신청했다. 신문 제작의 전산작업에 필요한 CTS 기자재와 제판시설도 갖추었다. 대우 측의 조동구 상무는 대우그룹에서 퇴직 후 6월1일 영남일보 부사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6월30일에는 대구 상공회의소 옆에 신축사옥 부지(동구 신천동 111)를 마련, 매머드급 빌딩을 건립하는 계획도 세웠다. 7월14일에는 강제폐간 당시 매일신문으로 흡수되었던 편집국 출신 중 19명이 옛 사옥으로 다시 출근했다. 무려 8년여 만이었다. 8년여 만에 마주한 옛 사옥은 지난한 세월을 홀로 버티고 있었다. ‘영남일보’가 새겨진 입간판은 강제폐간 이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건물 입구 벽에 그대로 걸린 채 옛 사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력확보를 위한 복간 공채 1기 필기시험은 88년 7월17일 계성고에서 치러졌다. 경력 및 신입사원 공채시험에 3천여명이 응시해 대구경북지역 사상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 시험에서 69명의 수습기자가 선발됐다. 문공부에서 발행인·편집인·인쇄인을 이재필로 한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7월29일 교부받아 법적인 준비작업도 완료됐다. 사장 이재필, 부사장 조동구·이재혁, 편집국장 이종명 체제의 복간호가 닻을 올리고 빠른 속도로 독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11월28일에는 복간을 알리는 첫 소식지를 발행했다. 소식지는 ‘영남일보 특보’라는 제호를 달고 복간 직전까지 모두 다섯 차례 발행됐고, 매회 30만~40만부를 찍어 지역 전역에 배포됐다.

하지만 뜻밖의 암초가 복간작업에 제동을 걸었다. 자금고갈 문제와 경영권 분규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재필 사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고비를 넘겼다. 대우 측은 곧바로 향토기업인 ‘갑을’을 새 경영 파트너로 영입해 잠시 주춤하던 복간작업의 속도를 냈다. 경영권 분규로 당초 1989년 1월 초순 예정됐던 복간 일자도 4월19일로 새롭게 정했다. 복간일을 ‘4월19일’로 정한 이유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드높인 ‘4·19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창간 이래 지역과 민족, 그리고 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영남일보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다. 동시에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권력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회초리를 들겠다는 영남일보의 선언이었다.

◆1989년 4월19일 마침내 복간

복간을 앞두고 영남일보는 16국 1실 23부 총 인원 300여명의 정예진용을 갖추었다. 동시에 계명대 지방언론연구소에 의뢰한 조사 결과와 영남일보 자체 조사를 바탕으로 석간으로 발행할 것을 최종 확정했다. 영남일보의 복간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사와 지국 계약 희망자들도 쇄도했다. 또 복간을 알리는 대형 애드벌룬과 광고탑, 현수막, 아치 등이 대구와 구미·포항 등 주요 지역에 설치되었고, TV와 라디오를 통한 홍보도 이어졌다.

마침내 4월19일, 영남일보는 9년여 만에 복간호를 발행하고 독자와 재회했다. 복간 특집호인 지령 11500호는 32면으로 50만부가 발행되어 전국에 배포됐다. 1면에는 ‘민주·통일·바른 향토지’라는 제목의 복간사를 실었다. 복간사에서 ‘순수하고 올바른 향토신문으로서 향토공동체와 민주·통일·지방화를 위한 공기로서 당당하고 친근하며, 그래서 위대하고 순정한 영남일보를 만들어 갈 것’을 독자들에게 엄숙하게 밝혔다. 민주의 가치를 더 높인 4·19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복간사에 담긴 것이다. ‘4·19정신’이 곧 ‘영남일보 복간 정신’이나 다름없었다. 복간호에는 4·19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대구2·28학생의거 주역인 이대우 부산대 교수(2·28학생의거 당시 경북고 학생회 부회장)와 4·19 미체험 세대인 경북대총학생회장의 대담을 통해 ‘4·19 정신’을 되새기는 특별기획도 실었다.

이밖에 복간호는 고정란으로 ‘영남시평’과 ‘한소리’, 시사만화 ‘우야꼬 선생’을 마련했다. ‘우야꼬 선생’은 ‘고바우’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이 맡았다. 또 한국영화계의 원로 이창동 감독의 연재소설 ‘지상의 사랑’ 첫회가 실렸다. 당시 영화감독 데뷔전이었던 이창동 감독은 신인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의 작품 ‘지상의 사랑’은 총 343회에 걸쳐 영남일보에 연재됐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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