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도청시대 .1] 도청소재지 이전 역사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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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2-11   |  발행일 2016-02-11 제2면   |  수정 2016-02-11
경상감영, 경주→상주→팔거현→달성군→안동→대구 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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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선화당. 선화당은 관찰사가 근무했던 곳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1601년 대구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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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강제합병이 이뤄진 1910년부터 56년간 경상북도청사는 포정동 경상감영 자리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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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경의 경북도청. 경상감영 내 선화당이 왼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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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경상감영의 현재 모습. <영남일보 DB·경북도 제공>


조선시대 지방행정 8도 체제로
관찰사엔 행정·사법권 등 부여
땅 넓고 인구 많은 경상도 지역
툭하면 분도되는 곡절 겪기도

왜란 이후 안동서 대구로 옮겨
관찰사의 업무 공간인 선화당
두 차례 화재후 1807년에 재건

국권 빼앗은 日, 도청으로 바꿔
감영 앞 등 허물고 새 청사 지어


현재의 도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감영(監營)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다. 경상도 지역을 관할하는 경상감영은 조선초에 경주에 있었으나 이후 상주, 팔거현, 달성군, 안동 등지를 전전하다가 1601년에 대구 중구 포정동, 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정착했다.

근대 들어 갑오개혁으로 8도 체제가 23부제로 바뀌고 이후 곧바로 광무개혁이 단행되어 1896년에는 13도 체제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폐지됐던 감영제를 대신해 각 도(道)를 관할하는 ‘도청(道廳)’이라는 개념이 비로소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910년 대구 중구 포정동 현재 대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지어진 경북도 청사는 1966년 4월 지금의 북구 산격동으로 옮긴다. 이후 1981년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북도에서 분리돼 행정담당구역과 도청 소재지가 다른 상황이 이어오다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과 함께 도청 이전 문제가 공론화됐고, 대구직할시 분리 27년 만인 2008년 도청이전예정지를 안동·예천지역으로 결정했다. 이제 경북도청은 120년의 ‘대구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안동 시대’를 열어간다.

◆도청의 첫 둥지를 틀다, 경상감영

경북도청의 첫 둥지는 기존 경상감영이 위치해 있던 대구 중구 포정동이었다. 경상감영은 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서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이다. 감영은 현재의 도청과 같은 역할을 했다.

경상도 지역을 관할하는 감영은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고, 경주를 다스리는 부윤(府尹)이 경상도관찰사, 즉 경상감사를 겸했다. 그러던 것이 1407년(태종 7)에 경상도가 다른 도에 비해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이유로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을 우도(右道), 동쪽을 좌도(左道)로 나누어 좌도는 경주부윤이 맡고 우도는 상주목사가 맡아 해당 도의 관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우·좌 분도(分道)가 당시 조세 체계의 혼란 등 부작용을 일으키자 이듬해 원래대로 환원하고 대신 경주에 있던 감영을 상주로 옮겨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를 겸하게 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감사가 맡은 업무가 과중하다는 지적이 들어오면서 종전대로 다시 우·좌도를 나누어 상주목사와 경주부윤에게 각각 관찰사를 맡겼다가 12월에 다시 분도로 인한 폐해가 크다는 호소에 따라 원래대로 되돌렸다. 당시 기묘사화의 여파로 인해 그 동향이 심상치 않았던 영남 지역 사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그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이후로도 상황에 따라 경상도는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했고 경상감영도 성주(星州)의 속현이었던 팔거현을 거쳐 대구부의 달성, 안동부 등을 전전하게 된다.

경상도의 분도가 되풀이됨에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던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선조 29), 처음으로 대구부에 세워졌다. 좌·우로 나뉜 경상도를 다시 합치는 과정에서 경상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당시 경상도를 점령하다시피 한 왜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대구가 주목받은 것.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대구는 왜군의 손에 파괴되고 달성에 있던 감영도 불타버린 뒤 감영은 다시 대도호부(大都護府)가 설치되어 있던 안동으로 옮겼다.

전쟁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던 감영은 1601년에야 대구에 정착하게 된다. 왜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한 내륙에 있어 위치상 감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대구로 옮기자는 이덕형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감영은 대구부로 옮겨졌다. 이때 대구에 새롭게 지어진 경상감영의 부지가 바로 대구 중구 포정동에 소재한 현재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된 선화당(宣化堂)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선화당은 그 후 두차례 화재를 입었고 지금의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있는 건물은 1807년(순조 7)에 재건됐다.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 포정동 시대

1895년의 행정개편으로 대구도호부는 대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어 일어난 갑오경장 개혁으로 감영제는 폐지되고 전국 8도는 23부로 나뉘었다. 경상도는 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의 4부로 분할되었다. 1896년에는 전국 23부를 폐지하고 13도로 개편하였다. 조선왕조가 서서히 몰락하던 1896년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뒤 고종이 신변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 시절이다.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는 8도 중 5도를 남북도로 구분, 13도제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제정 러시아는 점령지를 잘게 쪼개어 통치하려는 습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대구부는 경상북도로 개칭되고 대구군은 경상북도에 소속되었으 며 경상북도청은 경상감영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 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대구군을 대구부로 개칭했으나 경상북도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하였고 도청 건물로 감영 중영의 자리에 있던 건물을 모두 헐고 2층 새 청사를 건립했다. 선화당은 산림과로 사용했다. 이들 건물은 별다른 변화없이 1965년까지 경북도청사로 사용되었다. 선화당 건물은 경북도청이 1966년 현재 위치로 옮겨가고 공원으로 조성될 때까지 경북공무원 교육원으로 사용되었다. 경북도청은 1965년 2월2일 중앙공원으로 지정 고시되면서 선화당과 징청각만 남기고 다른 모든 건물은 철거했다.

감영 객사와 부속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선화당에 일제 통감부 이사청이 들어선 뒤 대구경찰서와 대구우편국 등이 자리를 잡으며 일대는 근대 정치의 중심지로 변모한다. 경상감영 앞쪽에 대구농공은행이 들어서고 인근에 조선은행까지 들어서 서문로와 이어져 금융 활동의 거점으로도 기능을 한다.

선조 34년 이후 줄곧 경상감영 공원에 자리 잡고 있던 경북도청은 365년이 지난 1966년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했다. 경상감영 부지는 경북도 청사가 산격동으로 이전한 후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97년 경상감영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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