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서 치오른 봄기운에 깨어나는 108개 층층계단 다랑이논 씨앗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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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0   |  발행일 2017-02-10 제34면   |  수정 2017-02-10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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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번뇌를 연상시키는 108계단의 다랑이논을 가진 가천마을. 일손이 부족해 현재 이곳 모내기는 마을 주민 전체가 품앗이로 진행한다. 푸릇하게 보이는 건 마늘밭.

파독 광부·간호사들 정착촌 ‘독일마을’
다양한 맛 수제맥주·소시지로 입호강


21개 나라 이국적 정원의 원예예술촌
해안 낭떠러지 다랭이마을 풍경 이색


◆독일마을의 봄

삼동면 물건리 독일마을 전망대. 독일식 가옥 40여 채가 해안 언덕에 ‘능소화’처럼 피어 있다. 기대하지 않고 갔다가 만난 국내 최고급 이국적 전망이었다. 스무 그루 정도의 키다리 소나무가 전망대 앞에서 격자창 구실을 한다. 덕분에 저 가옥들은 천연기념물 제150호 물건리 어부림(魚付林)이 있는 몽돌 해안을 배경으로 멋진 포토존을 형성할 수 있었다.

남해군은 2000년 김두관 군수 시절부터 관광상품처럼 외국마을을 스토리마케팅 해서 크게 성공시켰다. 대표적인 게 독일·미국마을과 원예예술촌.

독일마을엔 물론 독일인이 없다. 1960년대 한강의 기적을 위해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그들이 은퇴 후 귀국하여 정착해 살 수 있게 2000년부터 6년여 동안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 가옥의 색은 주황과 하양으로 통일시켰다. 더없이 화사했다. 그래서 여긴 사철 봄날이다. 하지만 부속 파독전시관 타임터널에 들어가면 항상 ‘겨울’이다. 파독 광부들이 ‘글릭아우프(살아서 돌아오라)’를 외치며 들어갔던 탄광 모습을 절감할 수 있다.

독일 하면 가장 유명한 것 두 가지. 맥주와 소시지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마을 주민인 박안나·정민수씨는 독일광장(도이처 플라츠) 한편에 있는 독일식 포장마차 ‘도이처 임비스’를 운영한다. 임비스는 독일어로 ‘간이음식점’. 웬만한 건 한 캔에 1만원 선이다. 하지만 한국형인 라거맥주가 아니고 다양한 향이 감도는 수제맥주 스타일이다. 에스프레소가 첨가된 흑맥주인 ‘슈바츠비어’, 바나나 향이 첨가된 밀맥주인 ‘바이젠헬’, 붉은 흑맥주인 ‘바이젠둔켈’ 등을 판다. 괴테에 의해 널리 알려진 흑맥주 ‘쾨스트리처’는 독일 내에서 흑맥주 부문 판매 1위를 기록할 정도다. 독일 전통 맥주 중에 가장 유명한 맥주는 ‘뢰벤브로이’. 독일어로 ‘사자의 양조장’이라는 뜻으로 1886년부터 사자를 상표로 사용하고 있다. 생맥주인 ‘비트버거’는 독일축구 국가대표 공식 맥주다. 수제 소시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육가공대회 금메달을 수상한 기술진이 만든다. 오는 10월 초 독일의 유명한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를 테마로 한 맥주축제(8회)가 벌어지니 참고하시길.

독일마을 골목을 돌아보면 각기 개성 있는 집 이름과 정원을 볼 수 있다. 대다수가 펜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11월에 가면 독일마을은 샛노랗게 물든 2천여 그루의 방풍림이 2㎞가량 도열한 물건리 어부림과 환상적 앙상블을 이룬다. 이동면 용소리 일원에 위치한 ‘미국마을’. 이 마을도 독일마을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에서 생활하는 교포들에게 건강한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입구에 자유의 여신상이 설치돼 있다. 주택 21동과 복지회관 및 체육시설들을 조성하였으며 전부 목조주택으로 통일했다.

아무튼 나그네는 그날 밤 물건리 대표 복어 전문점 ‘햇살복집’에서 허기를 채웠다. 경남에선 주방에서 미리 끓인 복어탕을 1인용 뚝배기에 담아 낸다. 대구식은 냄비에서 끓여 손님이 알아서 떠먹도록 해준다. 이 집의 복어탕은 정작 빛나는 반찬에 비해 조금 내공이 달렸다. 무김치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대구에서는 복어탕 옆에 꼭 고춧가루가 들어간 콩나물무침이 있지만 여기선 그게 없다. 대신 비빔밥처럼 먹을 수 있는 ‘복어껍질무침회’가 나왔다. 이건 통영권의 멍게비빔밥과 남해군의 멸치쌈밥의 절충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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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맥주 안주에 제격인 독일 본토 수제소시지.
◆원예예술촌에서 만난 첫 매화

이튿날 ‘원예예술촌’부터 찾았다. 여긴 다른 식물·원예원과 내공이 다르다. 보여주기 위한 시설이 아니다. 그 공간에 원예인이 실제 상주하고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원래 남해군은 이곳에 전통예술인촌을 조성하려 했다. 하지만 입주작가가 없어 계획이 급수정된다. 그 자리를 파고든 사람이 있다. 70년대 한국형 정원문화 리더 단체인 ‘손바닥정원’을 이끌었던 김보옥·홍민경·이용주씨 등 원예 예술가 21명이 2007년 남해군민이 된다. 국내 첫 ‘원예이민’이었다. 현재 18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은 물론 프랑스, 핀란드, 일본, 미국, 뉴질랜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등 국가별 정원 21개를 꾸몄다. ‘자연산 정원’ 같다고 할까.

정문을 지나자 장승처럼 입구를 지키는 두 꽃길. 매화와 벚꽃길이다. 올해 첫 매화가 드문드문 수포처럼 떠오른다. 월동한 팬지는 이미 만개한 상태다.

예술촌 전망대인 팔각정. 거기에 올라 지족해협을 바라본다. 너무 넓지 않고 손거울만 해 더욱 고혹하다. 이탈리아풍의 자스민하우스에서는 2008년 이주해 온 정명실씨가 커피를 끓인다. 팔각정 발치에 지중해풍 가옥 3채가 옹기종기 앉아 있다. 자스민·린궁·까사K. 린궁은 탤런트 박원숙씨가 운영하는 앤티크 커피숍. 그녀는 지금 남해에 푹 빠져있다. 2008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모친과 함께 여기에 눌러앉았다. 워낙 많은 방문객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랑방 같은 커피숍을 만들었다. 이젠 ‘박원숙의 커피 앤 스토리’란 이름으로 가맹점도 낸다. 찾아간 날 그녀는 카페 앞 돌담을 리모델링 중이었다.

1시간 남짓한 탐방로. 집마다 사연을 안고 있다. 핀란드풍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는 김보옥씨의 남편은 배우인 맹호림씨. 부부는 핀란디아와 프렌치가든을 관리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족욕장이 반긴다. 그 옆에 서 있는 편백나무를 감고 올라간 푸미라와 아이비, 그리고 피라칸타와 수인사를 나눴다.

가장 핫한 포토존은 이색 지붕으로 네티즌 사이에 꽤 유명해진 ‘풀꽃지붕’과 모형 양 20마리가 세팅된 ‘목장의 아침’. 풀꽃지붕은 지붕을 야생화로 수놓았다. 남해에서 가장 봄스러운 지붕이랄까. 영국풍의 와일드가든은 각종 허브가 푸짐하다. 미국풍의 산소하우스는 실내로 큰 나무 한 그루를 끌고 들어온 게 인상적이다. 훔쳐 오고 싶은 건축인테리어 아이템이 곳곳에 숨어 있다.

◆가천 다랭이마을

삼동면에서 남면으로 넘어왔다. 홍현리 가천 다랭이마을의 봄을 만나기 위해서다. 혹한기, 남해군은 섬초(월동 시금치)와 섬마늘로 유명하다. 해안 언덕은 양파로 유명한 무안처럼 적황색 토질이다. 섬초는 상당수 육지로 팔려나갔다. 현재 푸른 기운이 감도는 밭에는 어김없이 마늘이 심겨 있다. 멀리서 보면 초원 같다. 황토와 마늘밭이 조각보처럼 ‘황록(黃綠) 버전’으로 묶여있다. 미학적이다.

남해군 일주 총거리는 800여 리(320㎞). 생각보다 꽤 길다. 월포, 숙호, 홍현을 지나 가천마을에 도착했다. 남해군 서남쪽 해안 낭떠러지에 간신히 얹혀 있는 ‘다랭이마을’.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를 비롯해 세존도, 호도, 조도 등이 아련하게 보인다. 정중앙은 바로 태평양으로 직행이다.

이날은 바람 한 점 없다. 가끔 불어오는 해초 같은 미끈한 미풍. 하지만 이 해안은 남해군에서 가장 바람이 많고 파도도 높다. 태풍 매미 급습 때는 셋째 다랑논까지 파도가 치고 올라왔다. 대다수 슬레이트 지붕은 그때 다 뒤집어졌다. 이젠 어망용 줄로 지붕을 단단히 묶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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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식 비빔밥’으로 분류되는 복어껍질무침회.
◆보존회가 농사를 짓는다

암릉이 공룡 등처럼 형성된 응봉산(해발 472m)과 설흘산(481m) 사이에 놓인 다랭이마을. 평지는 없다. 45도의 가파른 해안 낭떠러지에 마을이 형성됐다. 과일이 떨어지면 해안에 가서 주워와야 된다. 400여 년 전 정착민은 밭에서 나온 산돌을 쌓아 논밭을 만들어나갔다. 설흘산 턱밑까지 무려 108계단의 천수답 농지에 전답 683개를 심어놓은 걸 보면 섬사람들의 힘겨운 삶이 오롯이 느껴진다. 주민들은 그 계단을 ‘꿈을 주는 백팔번뇌’로 부른다. 영락없이 중국 윈난성의 시솽반나와 필리핀의 세계 최대 계단식 논인 바나웨이를 닮았다.

2002년 경남도 지정 1호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된다. 이때부터 사람이 몰려든다. 2005년엔 국가지정 명승지 제15호로 지정돼 논은 매매 대상이 안 된다. 미국CNN은 ‘한국여행 중 꼭 가봐야 할 곳’ 3위에 올린다.

설흘산 중턱에 간선도로가 있다. 하지만 주차장은 없다. 봄철 주말엔 대구 등지에서 관광버스 80~100여 대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예전엔 그 도로 위에서도 농사를 지었는데 이젠 일손이 부족해 도로 아래에서만 농사를 짓는다. 섬초 농사가 끝나면 곧 모판을 만들고 망종 무렵 모내기를 한다. 10일 정도 걸린다. 이때 ‘다랭이논축제’가 벌어진다. 현재 혼자 사는 어르신이 많아서 이젠 비영리법인 ‘다랭이보존회’를 만들었다. 벼가 심기지 않는 다랭이마을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판단 아래 53가구 주민들이 똘똘 뭉친 것이다. 품앗이 농사를 짓고 생산량은 반반씩 주인과 나눠 가진다. 지난해는 소출이 좋아 가구당 5㎏씩 쌀을 나눠주었다.

느티나무 민박집에서 잠을 잤다. 오전 7시30분쯤 해가 떴다. 문을 여니 바로 바다가 보였다. 일출을 머금은 붉은 바다가 꼭 외딴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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