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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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1   |  발행일 2019-06-21 제34면   |  수정 2019-06-21
60년 ‘대구영화 제작시대’ 막 내린 후 소비도시로 … 99년 부활의 서막 ‘쉬리
■ 韓영화 100주년과 대구 영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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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포스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비디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삼성, 대우 등의 가전사들이 비디오 제조로 눈을 돌린 데 이어 영화산업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충무로 영화계는 오랜만에 활력을 얻게 된다. 대기업의 영화 산업 진출은 한국 영화의 편당 제작비 증가 등을 통해 ‘기획영화’라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는 영화산업에 스타시스템, 마케팅과 홍보의 강화 등 할리우드식 전략을 도입해 합리적인 투자 결정을 통해 제작한 상업영화다.

영화 제작비 증가로 인해 제작편수는 감소했지만 강제규의 ‘쉬리’(1999) 등 한국영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을 잇따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관객 620만명을 동원하면서 한국영화의 부활에 청신호를 켜게 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기획영화로 영화 산업 구조가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물론 1998년에는 처음으로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영화관람문화에도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산업은 급속한 성장을 보였다. 양적, 질적 성장이 이어졌는데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연이어 탄생했고 천만관객의 시대도 열었다.

할리우드식 전략 도입 상업영화 제작
멀티플렉스 등장…천만 관객 새바람
칸 등 세계적 권위 영화상 잇단 쾌거
점유율 50%, 한해 총관객수 2억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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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포스터.

‘쉬리’의 대박 열기는 2000년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 2001년 곽경택의 ‘친구’로 이어졌다. 이어 1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천만영화의 시작을 2004년 강우석의 ‘실미도’가 알렸다. 그해 개봉한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천만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외에 ‘왕의 남자’(이준익, 2005), ‘괴물’(봉준호, 2006), ‘디워’(심형래, 2007), ‘해운대’(윤제균, 2009) 등에도 천만관객이 몰렸다.

세계의 권위 있는 영화상 수상도 이어졌다. 특히 임권택 감독이 2002년 ‘취화선’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데 이어 박찬욱 감독이 2004년 ‘올드 보이’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올해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영화계에서 의미있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이후 한국영화 점유율이 꾸준히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천만영화의 출현이 잦아지면서 2013년에는 총 관객수가 처음으로 2억명을 넘어섰다. 이 같은 한국영화의 획기적 발전은 결국 봉준호 감독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 도움말= 사회적협동조합 대구경북영화영상

▨ 참고문헌= ‘한국영화 역사’(김미현 저),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저) ‘한국 영화작가 연구’(김수남 저)

▨ 사진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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