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영화의 역사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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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1   |  발행일 2019-06-21 제34면   |  수정 2019-06-21
■ 韓영화 100주년과 대구 영화 역사
20190621
① 1930년대 대구경북지역에서 제작됐던 영화들. 나운규 주연 및 원작의 ‘종로’. ② 나운규가 감독한 ‘칠번통소사건’. ③ 토키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영화란 평가를 받은 이규환 감독의 ‘나그네’. ④ 6·25전쟁이 터졌던 1950년대는 대구가 한국영화의 중심이 되었다. 1952년 제작된 민경식 감독의 ‘태양의 거리’. ⑤ 대구 명덕초등 5학년인 이윤복 어린이의 수기를 토대로 제작된 1965년작 ‘저 하늘에도 슬픔이’.

한때 대구의 영화사가 한국의 영화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1950년대 6·25전쟁 동안 전쟁의 포화를 피했던 대구가 한국영화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 저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봉준호 감독이 대구 출신인 것을 비롯해 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대구 출신이다. 하지만 이렇듯 보여지는 게 전부는 아니다. 대구의 영화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들이 태어나게 된 또다른 힘을 찾을 수 있다.

33년 대구영화촬영소 ‘종로’ 제작
민족 혼 깨운 이규환 ‘임자없는…’
6·25 포화 피한 대구, 영화 중심지
73년 영화법 개정, 점차 설자리 잃어


1930년대에 이미 대구지역의 영화제작사가 영화를 만들었다. 대구 녹성키네마는 1930년 첫 작품으로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제작했는데 포항 등 동해안 일대에서 2개월여 촬영했다. 그해 11월8일 종로2가에 있던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1933년에는 대구영화촬영소가 ‘종로’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양철이 감독을 맡고 그 당시 대스타였던 나운규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원작도 썼다. 대구영화촬영소는 그 이듬해 ‘칠번통소사건’도 제작했다. 나운규가 역시 감독을 맡았다.

대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이규환이 있다.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과 중국에서 연출 수업을 받은 그는 1932년 사문진나루터에서 촬영한 나운규, 문예봉 주연의 ‘임자없는 나룻배’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당시 동아일보에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준 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 일본 호치신문으로부터도 “사실주의적 기법이 두드러진 가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규환은 이밖에도 임화라는 시인이자 평론가로부터 ‘토키(유성영화)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조선영화’라는 평가를 받은 ‘나그네’(1937)를 비롯해 ‘밝아가는 인생’(1933), ‘바다여 말하라’(1935), ‘그후의 도령’(1936) 등을 대구지역 여러 영화사들과 함께 제작했다.

이런 영화들은 어디에서 상영됐을까. 대구 최초의 극장은 1910년대 중반에 있던 ‘대구좌’로 대구 최초의 옥내 극장이다. 이어 전당포 영업자들의 모임인 일심회와 대구좌 주인인 나카무라, 조선인 배모씨 등이 조선인을 위한 영화상설관인 ‘조선관’을 1920년 설립했다. 1922년 조선관 터에 ‘대구극장’이 건축됐다. 그 이듬해에는 ‘만경관’이 개관했다. 1925년 전국에 총 27개관이 있었는데 서울 12개, 대구 4개, 부산 3개, 평양 3개 등으로 서울 다음으로 대구에 많은 극장이 있었다.

1950년대는 대구가 한국영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6·25전쟁 기간에 대구가 영화 제작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는 ‘아름다웠던 서울’ ‘서부전선’ 등 전쟁기록영화를 비롯해 ‘여인애사’ ‘흥부와 놀부’ ‘화랑도’ 등 5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1951년에는 ‘화랑도’ ‘내가 넘은 38선’ ‘삼천만의 꽃다발’ 등 5편, 1953년에도 ‘공포의 밤’ ‘악야’ ‘태양의 거리’ ‘성불사’ ‘낙동강’ 등 6편이 만들어졌다. 특히 ‘악야’는 피란지 대구에서 촬영된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당시 대구지역의 영화제작 열기는 언론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1954년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환도를 했으나 대구에 있던 공군정훈감실 소속 공군촬영대가 서울로 환도하지 않고 ‘출격명령’이란 작품을 제작했다. 이 촬영대에는 신상옥, 홍성기 감독이 소속돼 있었다. 이후 1956년에는 전국의 제작영화 30편 중 1편(청구영화사의 ‘논개’), 1957년은 37편 중 3편(영남영화사의 ‘황진이’, 금성영화사의 ‘산적의 딸’, 청구영화사의 ‘노들강변’) 등으로 영화제작편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0년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지역의 영화사는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 한국영화를 보호 육성한다는 취지 아래 연간 15편 이상의 제작실적 등이 없으면 등록이 취소돼 71개 영화사가 자진 통합으로 16개로 1차 정비되었다. 이후 1973년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등록요건이 더 까다로워져 지역영화사는 더욱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1960년대 이후 대구영화의 제작시대는 막을 내리고 소비도시로 전락했다. 그나마 영화 촬영지로 한국영화사에서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1965년 김수용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대구 명덕초등 5학년인 이윤복 어린이의 수기를 토대로 제작됐다. 신영균, 조미령, 황정순 등이 출연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 도움말= 사회적협동조합 대구경북영화영상, 대구경북영화인협회, 독립영화감독 장우석 ▨ 사진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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