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스승 삼년상 치른 윤은보·서즐 이야기
'삼강행실도' 수록 조선 최초 사제 지정 정려각
스승에게 정성을 다한 윤은보와 서즐의 선행을 기리는 정려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조선시대 세종의 지시에 의해 편찬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당시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백성들에게 보급한 '조선시대판 국민도덕 교과서'였습니다. 그 안에는 스승을 어버이처럼 섬기는 덕목이 담겨 있었습니다."
경북 김천시 지례면의 '윤은보(尹殷保) 서즐(徐騭) 정려각(김천시향토문화재)' 취재차 현장에서 만난 문재원(78) 김천향토사연구회 고문은 비뚤어진 자녀 교육관으로 많은 이의 분노를 자아내는 작금의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 행태를 개탄했다. 아울러 교권 추락과 교육현장의 혼란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윤은보와 서즐정려각(旌閭閣)을 가리키며 "스승과 제자의 지극한 정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내린 정려각"이라며 "윤은보와 서즐의 선행을 담은 삼강행실도 은보감오(恩保感烏·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편은 이 책에서 스승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유일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그는 "'은보감오'는 조선 초기 경상도 지례현(경북 지례면)에서 있었던 스승에 대한 효행이자, 그 시대에 사제 간의 의리가 실천된 대표적 사례"라며 자신의 삶의 터전인 지례를 거듭 자랑했다.
지례면 주민들이 삼선생(장지도, 윤은보, 서즐)을 기리는 정려각은 지난해 정비사업을 통해 말끔히 단장됐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물론 현대교육의 가치와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의 교화정책을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고, 당시의 덕목 가운데 일부는 극단적이거나 성별·신분적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깊은 탄식은 공교육을 서비스업쯤으로 보고 컴플레인을 일삼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보편적 상식마저 내팽개친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공교육 시스템에 대한 우려라는 점에서 무겁게 다가왔다. 문 고문은 "유교적 기준에서는 가정에서의 '수신(修身·내 몸을 바르게 함)'과 '제가(齊家·가정을 바르게 이끎)'가 모든 교육의 출발이었다"며 "조선시대 어린이 교재인 '소학(小學)'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은 지식보다 예절, 효도, 타인에 대한 배려를 먼저 가르쳤다"고 했다.
1428년(세종 10년)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단순한 형벌만으론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고 판단, 백성들이 충(충신)·효(효자)·열(열녀)의 기본 도리를 알 수 있게 가르치기 위해 삼강행실도 편찬을 지시했다. 이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군위신강(君爲臣綱·신하의 근본은 임금을 섬기는 것), 부위자강(父爲子綱·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 부위부강(夫爲婦綱·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 등 삼강(三綱)의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부문별로 35명씩 뽑아 이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한편 글(한문)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유명 화가인 안견(安堅) 등이 핵심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이해를 도왔다. 이후 성종·중종조에서는 한글 언해본을 발간해 더 많은 백성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스승에게 효를 다한 윤은보의 정려문. 세종은 임자년(1432)에 윤은보에게 정려를 내렸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세종은 서즐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삼강행실도에 소개된 효행 35편 가운데 31편은 중국의 사례이다. 윤은보와 서즐의 스승에 대한 의리를 기록한 은보감오 편은 이 책에 수록된 4편의 우리나라 효행 사례 가운데 한 편으로, 문 고문에 따르면 당시 지례향교에서 조정에 올린 사연이 채택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지례현 거물리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장지도(張志道)가 후학을 기르고 있었다. 문하생인 윤은보와 서즐은 평소 "사람으로 태어나 임금과 어버이, 스승에 대해서는 섬기기를 하나같이 해야 한다. 하물며 우리 스승은 아들도 없으니 돌봐드려야 한다"며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평소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가져다주고, 명절 때마다 술과 반찬을 차려 올리는 등 스승을 아버지 섬기듯 했다. 이러한 가운데 스승이 타계하자, 각자의 어버이에게 여묘(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하기를 청해 허락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검은 모자를 쓰고, 요질(상복의 허리에 두르는 띠)을 두르고 스승의 묘 곁에서 살며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이러던 가운데 윤은보는 아버지의 몸이 아프자, 집으로 돌아가 약 시중을 하면서도 허리에 두른 띠는 한 번도 풀지 않았고, 아버지의 병이 낫자 다시 여막으로 돌아가는 등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밤 윤은보는 이상한 꿈을 꾸고는 불길한 마음에 급히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의 부친은 몸져누워 있었다. 이로부터 열흘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침저녁으로 울부짖으며 궤연(영위를 모셔놓은 자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장례 후에는 부친 산소 곁 여막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에 책상 위의 향합(향을 담는 함)이 날아갔고, 이로부터 몇 달 후에 까마귀 한 마리가 그 향합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고 갔다. 윤은보의 효행이 까마귀를 감동시킨 결과로 해석되며, 삼강행실도 '은보감오'의 유래다. 이러한 가운데도 윤은보는 삭망(상중에 있는 집에서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이면 스승의 무덤에 제수를 올렸고, 서즐은 삼년상을 마쳤다. 세종조 임자년(1432년)에 이 일이 알려지자, 윤은보와 서즐에게는 정려가 내려지고 벼슬이 주어졌다. 김천 최초의 정려각이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당시 공교육(지례향교)과 사교육(장지도 서당)을 두루 받았던 이들의 얘기는 1530년(중종 25)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29권에도 수록돼 있다.
'삼선생 정려각 주변 정비사업 기실비(記實碑)'에 새겨진 '은보감오' 이야기, 그림은 당대의 화가 안견의 작품이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두 사람의 행적은 '예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지례(知禮)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오랫동안 '윤은보 서즐정려각'에는 경향 각지 선비들의 답사 행렬이 이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윤은보와 서즐이 스승 장지도의 삼년상을 치른 것은 누군가 시킨 게 아니라, 스승이 보여준 진정한 사랑과 가르침에 대한 감화의 결과"라고 해석했다.
한편 지례면 주민들로 구성된 삼선생(장지도, 윤은보, 서즐) 정려각 주변 정비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김현구)는 3년간의 준비 끝에 지난해 주변부지 1천273㎡를 매입해 정려각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홍살문을 세우고, '삼선생 정려각 주변 정비사업 記實碑(기실비)'를 세워 정려각 내력을 설명하는 등 길이 전승될 문화유산으로 가꿔가고 있다.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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