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뚤배뚤 초록 봄 담은 밭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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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3-11   |  발행일 2016-03-11 제33면   |  수정 2016-03-11
[이춘호기자의 봄여름가을겨울] 1부 봄이야기-제주도 四色 봄
20160311
우람한 현무암 바위 발치에 보랏빛 꽃망울을 병아리떼처럼 물고 있는 야생화. 그 꽃을 극채색으로 강조시켜주는 녹색의 밭작물, 그걸 더 강렬하게 만드는 제주도에만 있는 밭담, 그 담을 기하학적으로 애워싸는 해안 집과 제주바다가 환상적으로 매치를 이루고 있는 제주시 구좌읍 해안도로변 어느 농가의 봄풍경.

◆봄날의 가장 큰 울림, 밭담

봄바람은 ‘바늘’. 겨울엔 허공을 마구 찔러댄다. 봄이 되면 급강하해서 지구의 살갗(대지)을 마구 문질러댄다. 피가 송글송글 맺힌다. 그것도 ‘봄꽃’.

봄철이라면 제주공항 착륙하기 1분 전부터는 기내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봐야 된다. 제주 상공에서만 제대로 조감할 수 있는 제주산 봄컬러가 있기 때문. 그 색은 바로 ‘녹색’이다. ‘풀빛’이란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광대역 녹색’이다.

제주도 봄의 바탕색? 그걸 캐보기 위해 지난 주말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녔다.

봄날 제주는 ‘대한민국 녹색 1번지’. 여름날 뻔뻔한 그 획일적 녹색은 아니다. 이 섬만큼 다양한 녹색의 스펙트럼을 가진 곳도 드물다. 파랑 같은 녹색, 노랑 같은 녹색, 검정 같은 녹색, 천차만별의 녹색이 연차적으로 깔려 있다.

1월이면 당근, 양배추, 감자, 양파, 콜라비 등이 수확기를 맞는다. 밭작물 때문에 겨울의 무채색은 그런대로 견딜 만해진다. 노랑 계열 꽃 사진에 질린 사진작가는 뒤늦게 제주도의 녹색으로부터 큰 위안을 받는단다.

이 무렵 제주도를 한라산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가 뚫린 거대한 원형 녹색 보자기 같을 것이다.

꼭 콤포지션(Composition·‘구성·배치·구도·배합’ 등의 뜻으로 디자인할 때 색·모양·크기·방향 등의 요소를 가장 좋은 관계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현대미술의 한 장르) 테크닉의 유화 같다고 할까. 저 녹색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주인공은? 바로 비뚤배뚤 자리 잡은 ‘밭담’이다. 관광객은 저 밭담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가지만 여행가에겐 더욱 절실한 풍경.

제주 밭담은 봄날에 가장 울림이 크다. 이놈은 동네로 이어지는 좁은 길인 ‘올레’를 지켜주는 ‘집담’과 항시 밀고 당기며 밀어를 나눈다. 육중하고 폐쇄적인 육지의 돌담과는 질감이 크게 다르다. 돌과 돌 사이가 치밀하게 붙어 있지 않다. 큼지막한 구멍이 숭숭 노출돼 있다. 그 구멍도 멋진 포토존. 1980년대 차를 몰며 웨딩사진을 찍어줬던 영업용 택시기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구멍을 통해 신혼부부 키스 장면을 연출했다. 밭담이 사라지면 제주도 봄 풍경의 한 축도 쉬 무너질 것 같다.

비가 오락가락한다. 바람은 가히 태풍급. 밭작물이 자지러진다. 하지만 비 맞은 녹색은 더욱 선명하다. 돌담 구멍에 눈을 살짝 갖다 대 본다. 풍력발전용 바람개비, 밭작물과 유채꽃과 동백꽃, 오종종 앉아 있는 어촌, 이국적 모습의 리조트,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이 봄바다와 감각적으로 매치된다.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는 바다도 좋지만 환상적인 ‘밭담길’이 압권. 호젓하면서도 아주 원시적이다. 여럿보다는 혼자가 딱이다. 전남 완도 끝자락에 자리한 청산도 보리밭담 못지않은 사색이 스며있다.

◆녹색 보자기의 미학을 제대로 음미하는 몇 가지 방법

북쪽은 구좌읍 북촌리~김녕리~행원리~월정리~평대리~세화리 구간 섬일주도로를 노려보라. 멋진 밭담이 보인다 싶으면 적당한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샛길을 둘러보면 관광지도에도 소개되지 않은 귀한 이미지를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 사진만 수십만 장 찍다가 루게릭병으로 2005년 타계한 사진작가 김영갑이 가장 좋아했던 오름인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용눈이오름, 이 봄날 거기는 반드시 올라보라. 몽골 평원 못지않은 광활한 대초원의 ‘녹색향연’을 볼 것이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광활한 녹색이 있었나’ 하는 그런 탄성 말이다.

남서쪽으로 내려가 대정향교 뒷산인 ‘단산 오름’에 올라갔다. 녹색으로 흐드러진 제주도의 봄을 조각보 버전으로 볼 수 있었다.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 송악산과 산방산, 나머지는 모두 초록이다. 기분 같아선 컵라면과 커피 믹스 한 봉지 사 들고 거기서 노숙하며 일출을 맞이하고 싶었다. 여기선 녹색을 감지하는 인간의 모든 근육이 풀버전으로 용틀임한다. 아무리 강조하면 뭣하겠나? 백문이 불여일견!

봄의 길손은 밭담을 뒤로하고 추사 김정희가 그렇게 사랑한 이른 봄의 전령사 대정읍의 제주 수선화, 카멜리아 힐에 있는 동백수목원,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해녀촌의 봄을 찾아 또 길을 나섰다.

글·사진=제주에서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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