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공원 10만여 수선화…새해 첫날 ‘톡, 톡’ 하양·노랑 봄마중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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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3-11   |  발행일 2016-03-11 제34면   |  수정 2016-03-11
■ 1부 봄 이야기-제주도 四色 봄
20160311
제주의 봄은 1월1일에 이미 도착해 있다. 바로 수선화가 그때 만개하기 때문이다. 섬사람들에게는 한갓 말먹잇감밖에 안되는 잡초였지만 유배온 추사에겐 영혼을 주고받는 도반이 수선화였다. 사진은 산방산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토종 수선화.


11월부터 펴 1월 만개…3월엔 끝물
토종 ‘몰마농꽃’-외래종 ‘금잔옥대’
‘몰마농’은 말이 먹는 마늘이란 의미

中 연경서 수선화 청순함에 반한 추사
평생 곁에 두고 완상…茶山에 선물도
말먹잇감 등 푸대접 모습 혀만 끌끌

대정읍 대로변·담장은 온통 수선화
추사관·두모악갤러리도 향기 가득
제주도 봄꽃에도 계보가 있다.

절정을 장식한 건 한동안 유채꽃이었다. ‘제주도의 봄=유채꽃’이란 등식이 성립됐던 그 시절. 유수 일간지 제주도의 봄 특집면 메인 사진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라산 복수초이거나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를 원경으로 한 유채꽃이었다.

제주로 온 신혼부부는 유채꽃과 함께 1980~90년대 제주의 대표적 ‘봄꽃’ 중 하나였다. 유채꽃은 신혼부부과 ‘찰떡궁합’. 비디오 촬영을 위해 그들은 유채밭을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유채꽃은 전국구로 굳어지기 시작한다. 창녕 낙동강변엔 무려 21만㎡(6만5천평) 정도의 한반도 모양의 전국 최대 유채꽃 단지가 있다. 이 밖에 경남 사천 삼천포대교, 포항 호미곶, 부여 백마강변, 전남 청산도, 심지어 경주까지 ‘유채꽃 마케팅’을 할 정도니. 제주의 봄은 더 이상 신혼여행의 섬이 아니다. 대타로 나온 제주수선화·동백·매화가 유채를 ‘뒷방늙은이’로 밀어내고 있다. 감귤·천리향·레드향·한라봉의 오렌지빛도 봄꽃 구실을 했는데, 너무 지천이라 이젠 명함을 내밀 수 없다.

제주도는 지금 투어·워킹·힐링·올레의 섬으로 발돋움 중이다. 유채가 밀려난 자리에 게스트하우스, 펜션, 카페, 미술관, 리조트 등 육지발 패셔너블한 건축물이 밀려왔다.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급유명해진 남원읍 위미해안로 86에 있는 카페 ‘서연의집’ 옥상도 바다를 씹으면서 제주 봄을 흡입하기에 딱인 공간이다. 특히 남태평양 버전의 바다색을 볼 수 있는 세화리 해안도로. 그 한 방파제 위에 놓인 포토존용 자그마한 나무의자 역시 입소문 만발. 단순히 그 의자에 앉아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감성파도 적잖다. 이 계절엔 그 해변의 벤치 하나도 여행자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꽃’이다. 록그룹 들국화 베이스 주자로 ‘제주도 푸른밤’을 작사작곡한 최성원, 이효리·이상순 부부, 포크싱어 장필순, 2014년 제11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윤영배, 동화와 감귤이 담긴 앨범 ‘누군가를 위한’을 펴낸 루시드폴 등 인기가수를 비롯해 패션디자이너, 화가 등도 제주도로 ‘망명’을 했다. 제주 봄꽃은 이들 때문에 더욱 모던하고 쿨해졌다.

◆제주수선화 시대 노랗게 개막

그렇게 유채꽃 시대는 가고 제주수선화 세상이 도래했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도 섬사람들은 유채꽃에 미련이 많다. 제주수선화가 한국 수선화의 결정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 없다. 제주수선화 이야기를 풀려면 조선 최고의 명필을 불러야 한다. 바로 추사 김정희(1786~1856)다.

퇴계 이황은 매화를 가장 좋아했지만 추사는 수선화를 편애했다. 조선 때는 수선화가 귀했다. 북경에 다녀오는 이들에게 부탁하여 구근을 얻어다가 수선화를 키우는 게 당시 선비들의 큰 즐거움이자 호사였다. 추사는 24세가 되던 해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본다. 추사는 수선화의 청순함에 감동하여 이때부터 평생 곁에 두고 완상하면서 사랑했다. 43세 때 평안감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연경에서 오는 사신이 그의 아버지한테 선물한 것을 받아서 그 수선화를 경기도 남양주의 여유당에 기거하는 다산 정약용에게 보낸다. 뜻밖의 선물에 정약용은 ‘수선화’라는 시로 화답한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와 8년3개월간 섬생활을 할 동안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고적한 맘을 추사체로 위무해준 꽃도 바로 수선화다. 추사는 제주도에 와서 매화보다 수선화가 더 혹한에 맞선다는 걸 알게 된다. 그 감흥을 이런 시로 남겼다.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한 점의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 梅高猶未離庭(매고유미리정체·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맑은 물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



추사체의 원천도 제주도에서 얻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수선화와 함께 거세기 이를 데 없는 대정 앞바다의 파도, 유배지 바로 옆에 있던 단산(제주사람들은 모습이 박쥐 같아 ‘바굼지 오름’이라고 불렀다. 바굼지는 ‘박쥐’의 제주 방언) 등이 추사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모양이다.

‘육지에선 그렇게 귀한 수선화가 대정읍에는 지천으로 피어 있다니….’ 추사는 수선화가 제주도에선 말 먹잇감이 되는 등 푸대접 받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 혀만 끌끌 찼다. 추사는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수선화)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한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한다’며 한탄했다. 제주수선화는 추사가 죽은 이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 잊혔다. 그러다가 부활한다. 2010년 5월 김정희 유배지 내 제주추사관이 세워진다. 제주수선화의 신지평이 열린다. 대정읍은 졸지에 ‘제주수선화의 1번지’가 된다. 1월에 만개하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일찍 봄을 알리는 꽃으로 대접받는다. 제주올레객들이 수선화를 육지에 알린 덕도 있다.

◆토종수선화는 몰마농꽃

대정읍의 가로수는 특이하게 수선화다.

대로변이나 민가 담장 밑에는 어김없이 토종 수선화가 피어있다. 추사관 담장 밑에는 외래종인 금잔옥대가 심겨 있다. 그게 좀 아쉬웠다. 추사관 추사 흉상 발치 화병에는 수선화 조화가 사철 꽂혀 있다. 지금은 꽃이 많이 져버렸지만 올해 12월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줄 것이다.

추사관에서 대정향교로 이어지는 2.5㎞ 유배길을 걸으면 수선화가 왜 제주의 봄을 이토록 일찍 밝히는가를 절감할 수 있다. 추사 정신을 닮은 사진작가로 알려진 김영갑을 추모하기 위한 두모악 갤러리(성산읍 삼달리 437-5)의 담장에 가보라. 대정읍에 이어 피는 수선화를 볼 수 있다. 매년 1월1일쯤 한림공원에 가면 수선화 10만여 포기가 노란 전등을 켜기 시작한다.

제주수선화는 빠르면 11월부터 피어 1월에 만개한다. 3월이면 끝물이다.

제주 수선화는 두 종류가 있다. 토종과 외래종이다. 제주 토속어로 ‘몰마농꽃’으로 불리는 게 토종이다. ‘말이 먹는 마농(마늘)’이란 의미란다. 거문도 등지에서 많이 자라는 외래종은 ‘금잔옥대(金盞玉臺)’다. 대정읍 시가지를 벗어나서 서귀포시 방향으로 추사교차로를 거쳐 안성교차로까지의 1132번 도로(일주서로)가 일명 ‘토종수선화길’이다.

제주의 봄은 대정읍으로부터 동쪽 성산포 쪽으로 옮겨간다. 제주도 봄나그네들도 대정읍 추사관 수선화꽃을 남도 봄꽃의 원전으로 본다. 국보 180호 세한도에도 설한풍을 이기고 꽃을 피워낸 제주수선화의 기품이 묻어 있다. 추사는 수선화의 자존심을 끝까지 존수하기 위해 수선화를 목판화로까지 남긴다.

1~2월 중순 제주도 풍경 사진작가라면 어김없이 추사관 근처로 몰려간다.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 등을 원경으로 잡아 수선화를 클로즈업한다. 어떤 작가는 장갑차처럼 단단하게 생긴 팽나무 주변에 핀 수선화에 셔터를 누른다. 유채꽃 사진보다 훨씬 유장하면서도 그윽한 정치가 느껴진다.

수선화는 언뜻 난초 같다. 꽃은 피지만 씨앗을 맺지 못해 알뿌리로 번식한다. 잎이 지고 난 다음 양파처럼 생긴 비늘줄기를 가을에 캐서 보관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심으면 된다. ‘거제도수선화’로도 불리는 금잔옥대꽃은 노란색 또는 흰색, 꽃잎은 모두 6장이다. 5장은 둥글게 배열되고 그중 하나는 진한 노란색의 황금색 술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꽃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금잔옥대의 첫인상은 너무 또렷하게 생겨 도자기에 비교하자면 중국 도자기 같고 토종은 질그릇 같았다. 토종은 꽃이 무질서하게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정성들여 심어놓은 제주 수선화는 대부분 금잔옥대다.

글·사진=제주에서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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