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보선창과 동국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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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2   |  발행일 2018-02-02 제34면   |  수정 2018-02-02
Y자 물길로 언청이처럼 보여 ‘째보선창’
옛적엔 성처럼 대나무 가득해 ‘죽성포’
인근 고은이 출가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
절 뒤 성채 같은 일본산 맹종죽 숲 장관
째보선창과 동국사
고은 시인이 18세 때 출가를 했던 동국사 대웅전 뒤편의 대숲.

소설 ‘탁류’의 주인공 정주사. 충남 서천에서 배를 타고 내린 포구가 바로 째보선창이다. 선창의 중심부엔 ‘째보천’이 흐른다. 그 물줄기는 Y자 금강의 지류. 그 하천 때문에 이 부두가 언청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째보’란 이름이 붙게 된다. 80년전 그 선창은 흥청망청. 선창 언저리는 일본인거리였다. 1919년의 군산인구를 보면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았다. 요지는 모두 일인이 차지해버렸다. 한국인에게 그 선창은 하나의 ‘멍’이었다.

지금은 군산이지만 이 선창은 오래 전북 옥구군 죽성리에 속해 있었다. 대나무가 포구에 성처럼 가득해 일명 ‘죽성포’로 불렸다. 지금 선창에는 대나무가 없다. 하지만 근처 금광동 월명산 ‘동국사’로 가면 성채 같이 푸짐한 대나무숲을 볼 수 있다. 일본 삼나무를 주목재로 사용했지만 대들보만 백두산 금강송을 사용했다. 지붕 각도가 75도, 무척 가파르다. 대웅전 앞엔 낙락장송이 있고 절 뒤는 대숲이다. 1909년 조동종 승려 우치다가 포교당 ‘금강사’로 개창한다. 광복 직후 정부에 이관되고, 55년 <재>불교전북교당이 인수한다. 당시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개명한다. 70년 이 절은 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된다.

사진작가에게 동국사는 꽤 매력적인 포토존이다. 지붕과 대숲을 적당한 비율로 매치하면 수묵화 한 점이 완성된다. 여기 대나무는 한국 왕대나무보다 몇 배 굵고 구불거린다. 일본산인 맹종죽이기 때문이다. 동국사에는 ‘고은의 방’이 있다. 6·25전쟁 때 선유도로 피란간 고은 시인은 극도의 허무주의에 시달렸다. 자살하려고 매일 째보선창을 서성거렸다. 그는 33년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마을(현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동국사로 출가해 주지 혜초의 상좌가 된다. 그의 법명은 혜민(慧敏).

개항 당시 째보선창 주위에 나즈막한 돌산이 있었다. 민가라고 해봐야 고작 5채였다. 한때는 군산진, 그 다음엔 일본영사관이 들어서고 나중에 군산의 대표 선창이 된다. 선창 앞에 33년부터 가동된 민야암 등대가 보인다. 서부·동부어시장였던 선창 앞 갯벌은 이내 매립된다. 일제는 쌀을 수탈하기 좋게 희한한 다리를 가설한다. 6m 이상의 조수간만의 차에도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뜬다리(부잔교)’다. 지금도 6개가 원형 그대로 있다.

78년 째보천이 복개된다. 나는 서해로 떨어지는 째보천의 끄트머리를 보고 싶었다. 어렵사리 거무튀튀한 복개천의 입구를 발견하게 됐다. 맞은편에 정박해 있는 대형 준설·견인선 에벤에셀호만 종일 그 입구를 본다. 선창의 핵심 공간이었던 어시장은 2003년 동백대교 근처로 이전한다. 이로써 선창의 수명도 다하게 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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