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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베개와 십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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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미디어부기자
  • 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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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밤’‘스위트 드림’ 꽃수에 취해 잠든 가을밤

근대 십자수 베갯모.
가을날의 오후는 햇살에 갈색의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빛이 살갗에 닿는 것이 밉지 않다. 그 햇살의 따사로움을 듬뿍 안고 노랗게 피어 있는 소국들을 살짝 쪄서 잘 말린 뒤에 하얀 모시 주머니에 넣고 베개의 속통을 조금 뜯어 베갯모에 살며시 넣어두면 국화침(菊花枕)이 된다.

맑은 국화침의 향기 속에 잠들면 꿈속에서 신선처럼 온갖 아름다운 명승지를 주유하는 꿈을 꾸게 하는 선유침(仙遊枕)이 된다. 만들 수 있다면 이 가을에 선유침 하나 곁에 두어도 좋겠다. 그 외에도 나쁜 꿈을 막아내는 호랑이 머리로 만든 호두침(虎頭枕)이 있다. 이 호두침을 실제 만들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베갯모에 호랑이 수를 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 호랑이도 제대로 놓기 쉽지 않아 지혜로운 옛 여인들은 호랑이에게서 가장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이빨 모양을 베갯모의 가장자리 장식으로 수놓았다. 이 삼각형 형태의 지그재그 문양을 거치문(鋸齒文)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별한 것은 이 지그재그 문양을 삼각형으로 오린 한지를 이용해 붙여 놓은 것이다.

꽃향기 속에 황홀한 꿈꾸는 국화침
호랑이 수 놓아 나쁜 꿈 쫓는 호두침
선비가 학문 게을리 못하게 하는 경침
부부 함께 베고 자식 기원 일통베개
방안 가득 풀먹인 냄새·가슬한 촉감
순수한 아름다움과 삶의 이야기 녹아

십자수를 놓은 방석. 파도문 십자수 베갯잇. 희자문 십자수 베갯잇.(위에서 부터)
일상으로 사용하는 베개에 한지를 붙여 놓았다는 것은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제의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였다. 벽사의 기능을 담당한 이 부적과 같은 호랑이 이빨 문양의 종이는 ‘삿된 기운을 막아내는 것은 선(善)을 베푸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종이를 붙여 놓지 않더라도 삼각형의 거치문은 예로부터 보호와 수호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호랑이의 용맹스러움에 기대어 나쁜 기운을 막아내고자 하는 풍습 때문에 호랑이 이빨을 목걸이로 만들거나 복주머니의 장신구로 달기도 하고 신부의 가마를 호피로 덮기도 했지만 이 모든 벽사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선(善)에 대한 실천이 먼저임을 알려준다.

한편으로 선비들이 사랑한 베개는 경침(警沈)이다. 이 경침은 숙면에 들어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을 경계해 나무를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 그래서 깊이 잠이 들면 베개가 굴러 머리를 찧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베개들이 있지만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베개는 아빠의 팔베개이거나 엄마의 무릎베개가 아닐까? 그 무릎베개를 베고 싶어서 있지도 않은 귀지를 파달라고 조르던 동심이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엄마 냄새를 맡으며 귀를 맡기고 있다가 어느덧 스르르 잠이 들던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면 잠시 미소가 번진다.

설레고 낭만적인 베개는 부부가 처음으로 함께하는 일통베개일 것이다. 부부가 되어 함께 베고 자기 위해 만든 일통베개는 양쪽 모서리에 다정한 한 쌍의 원앙을 수놓아 자식을 많이 낳기를 기원했기 때문에 원앙침(鴛鴦枕)이라고도 한다. 이 일통베개 때문에 한 통속이라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 일통베개의 운명은 부부가 서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반으로 줄여 혼자 베고 자는 베개가 된다. 가끔 마을에서 이 순간을 기억하는 어머니들을 만나면 강물처럼 긴 이야기가 베개모서리를 따라 풀려 나오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어머니들의 이야기 결 따라 웃기도 하고 함께 울컥하기도 한다. 긴 베개를 줄이게 되는 날들을 기억하는 주름진 이마는 하얀 베갯잇을 촉촉이 적시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아픔이었던 기억조차 지금은 단비처럼 가슴을 적셔 주어 치유의 약이 되는 모순을 마주한다. 낡고 해어져 이제 가만히 바라보게만 되는 십자수 꽃방석처럼 그 위로 스쳐간 어떤 시간이든 지금은 희디 흰 천 위의 간간이 떠있는 꽃수처럼 추억을 더듬는 어머니의 맑은 얼굴은 곱기만 하다.

이처럼 흰 면천에 수놓은 십자수는 어두운 방안을 형형색색의 비단수로 환하게 밝혀주던 베갯모의 화려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면을 삶고 빨아서 빳빳하게 풀을 먹인 가슬가슬한 촉감과 풀을 먹인 냄새가 좋았던 베갯잇의 순수한 아름다움은 베갯모수와 함께 또 하나의 그리움이다.

베갯잇에 주로 수놓아진 십자수는 우리나라 근대 시기에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민간자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록 전통자수는 아니지만 여성 고유의 미의식과 실용성을 갖춘 자수로 생활 속에서 깊이 애용됐다. 이 십자수의 소재들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 동물, 건축물, 기하문 등으로 다양할 뿐 아니라 그 문양에는 그 시대인의 삶의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어린 시절 좁은 방안에 작은 농이 있다 하더라도 방 한편에는 어김없이 횃댓보가 걸려 있어서 자주 입는 옷들을 보관했다. 방의 한쪽에 긴 막대나 대나무를 횡으로 걸어두고, 그 횡봉에 두루마기나 저고리 등을 걸쳐 두었는데 이 긴 횡봉을 횃대라고 하는 것에서 유래해 걸쳐둔 두루마기나 저고리를 덮는 면천을 횃댓보라 했다.

잠결에 눈을 떠보면 횃댓보의 봉황이나 소나무·대나무의 시원스러운 위용이 어두운 새벽녘의 방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곁에 멋진 해서체의 ‘희망’이라는 한자어와 ‘일모석양송학일체(日暮夕陽松鶴一體)’라는 글귀는 저물어가는 석양에 소나무와 학이 한 빛깔이 된다는 글귀처럼 노후까지 부부가 송학처럼 일심동체로 해로하기를 기원한 마음들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베갯잇은 면실로 십자수를 놓은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원 행복에, 부귀영화로’라는 글귀나 수·복·희(壽·福·囍) 등의 문자와 함께 다양한 연속문들을 수놓았다. ‘즐거운 밤’ ‘스위트 드림’이라는 글귀에서는 그 수를 놓으며 정성스럽게 기원했던 마음의 편린들이 느껴진다. 가장자리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형의 문양은 장식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장수와 영원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내재돼 있다.

어린 시절 늦잠 자다 학교로 뛰어가면 상기된 붉은 뺨에 베갯잇 십자수의 도드라기에 짓눌려 선연한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살며시 상기된 볼을 매만지면 손 끝에 도드라져 전해 오던 문양이 지난 밤 꿈을 떠올리게 해서 혼자 꾸다만 꿈속을 더듬던 시간들이 있었다. 찻잔 위에 활짝 핀 국화 한 송이와 그 위에 스며든 가을빛이 어린 시절 방안마다 가득했던 흰 빛의 십자수 세간들의 풍경이 가슴 위에 돋아오는 가을날이다. 깨끗하고 희디 흰 면천들을 다림질하던 어머니의 손끝이 잠시 내 가슴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박물관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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