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3) 안어대동에 펄럭이는 황금깃발
#4. 왕이 오시네 복주성 성루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늙은이와 아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손에는 저마다 몽둥이며 농기구,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라도 불끈 쥔 채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서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청장년의 사내, 건강한 아녀자는 모두 왕을 맞으러 송야천으로 나가고, 성을 지키기 위해 꼬박 밤을 새운 그들이었다. 새벽녘, 멀리 횃불 빛이 희미해지면서부터는 간간이 들려오던 함성마저 그쳤지만, 아직은 승전보도 패전의 기미도 없었다. 모두들 피가 마르는 듯했다. 머리를 삼베 끈으로 질끈 묶은 온후한 얼굴의 노인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손홍량. 올해로 일흔다섯 해를 산 그는 스물셋이 되던 충선왕 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1품 판삼사사(判三司事)에까지 오른 뒤 복천부원군에 봉해져 지금은 낙향한 나라의 원로였다. 그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왕실의 일원인 홍언박이 분명 복주로 옥체를 모셔 오리라 생각하고 대비한 터였다. 아직 승전보는 없지만, 결코 안어대동의 민군(民軍)이 쉽사리 패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그래도 입안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이 저 멀리에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것이 구름인가 싶어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여보게들! 어서 손에 든 몽둥이와 돌멩이는 내려놓고,왕을 맞을 준비를 하게!왕후를 모실 준비를 하게!성문은 활짝 열고, 길을 쓸고, 밥을 짓고, 따뜻한 국을 끓이게.빚어둔 고삼주도 청자 주병에 담아내고, 말린 나물이나마 정성껏 삶고 무쳐서 왕과 왕후의 상을 차리게. 맛나고 정갈하게.왕을 맞이하자!왕후를 모시자!"“소주라면 원나라의 그 증류주를 이르는 것입니까?"“예, 그러하옵니다.충렬왕께서 왜국 정벌에 나선 아국 고려군과 원군을 위무하기 위해 이곳 땅에 다녀가신 바 있습니다.그때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해져 지금도 빚고 있으니, 안동소주라 하옵니다."“허허, 참으로 왕실과 인연이 각별한 땅이오. 아니, 우리 고려의 반석이고, 왕들의 땅이오."“왕이 오신다! 어가 행렬이다!" “와……!" 사람들의 함성은 그것이 잘못된 소리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럼, 그렇지!’ 노인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보게들! 어서 손에 든 몽둥이와 돌멩이는 내려놓고, 왕을 맞을 준비를 하게! 왕후를 모실 준비를 하게! 성문은 활짝 열고, 길을 쓸고, 밥을 짓고, 따뜻한 국을 끓이게. 빚어둔 고삼주도 청자 주병에 담아내고, 말린 나물이나마 정성껏 삶고 무쳐서 왕과 왕후의 상을 차리게. 맛나고 정갈하게. 몽고족 원으로부터 나라의 자존을 되찾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땅과 세금의 제도를 개혁한 왕이시네. 나라의 왕이시네, 백성의 왕이시네! 부모의 땅에서 멀리 떠나와 그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치기도 하련만, 오직 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려의 사람이 된 왕후시라네. 백성의 어머니시라네, 나라의 국모시라네!" “왕을 맞이하자! 왕후를 모시자!" 온 성민은 하나가 되어 손홍량을 따라 노래 부르며 잰걸음으로 달리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난 밤, 송야천을 건넌 왕은 어가 행렬을 멈추고 강 건너 전투가 어떻게 될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홍언박도 처음에는 어서 복주성으로 향하기를 재촉했지만 이미 밤이 깊어진 터라 혹여 모를 매복군을 염려하여 왕의 뜻을 따랐다. 물론 그것에는 무빈과 여량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과연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자 마지막 함성과 함께 칼과 낫으로 무장했던 안어대동의 민군이 무빈과 여량을 따라 정연하게 강을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백성이, 나라를 지키고 왕을 맞으려는 마음 하나로 정예의 홍건군을 물리치고 승전한 것이었다. 왕과 왕후의 용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지켜보며 홍언박은 가슴 벅찬 감동에 저절로 '고려 만세!’를 외쳤다. 복주성의 민군과 신하, 비빈들은 찬란한 아침햇살 아래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어가 행렬의 정비를 서둘렀다. 기다리고 있을 복주성 성민들에게 비록 파천한 지경이나마 왕과 어가의 초라한 행색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왕은 희망이 되고 기둥이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오색 휘장과 문장을 휘감고, 황금빛 왕의 깃발을 펄럭이는 어가 행렬이 복주성 턱 앞에 이르렀다. 벌써부터 활짝 열려있던 성문 안쪽에서 하얗고 누런 삼베 옷차림의 늙고 어린 백성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길 양 옆으로 나뉘어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왕은 차마 그 백성을 두고 말 위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땅에 내려섰다. “왕이시여! 말 위에 오르소서!" 느린 걸음으로 성문을 나온, 삼베 끈으로 머리를 동여맨 노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왕은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오, 복천부원군 아니시오? 여기에 어쩐 일로?" “왕이시여. 이곳 복주는 저의 향리이옵니다. 비록 몸이 늙어 낙향은 하였으나, 어느 한 날 한 시도 왕과 왕후마마를 잊은 날이 없사옵니다. 마침내 황망하게도 어가의 몽진 소식을 듣고, 왕께서 필히 이곳 안어대동의 땅으로 오시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럼 나를 구한 안어대동의 군사들도 부원군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본디 안어대동은 고려의 반석이 되었던 땅이기에 백성들은 언제나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아니라, 그저 안어대동의 백성들이 그리한 것입니다. 왕의 홍복이며, 나라의 홍복입니다." “오! 안어대동! 참으로 고려의 반석이오!" 왕을 맞은 백성들의 기쁜 마음의 노래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왕과 왕후는 화려한 성장을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연회상을 받았다. 왕의 좌우에는 어느새 무빈과 여량이 시립해 호위했고, 손홍량의 곁에 나란히 앉은 홍언박은 연신 여량에게 눈길을 향하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왕이시여, 소신의 잔을 받아주시옵소서. 건국주 고삼주이옵니다." “건국주 고삼주라? 처음 듣는 이름의 술입니다." “일찍이 태조께서 병산 전투를 앞뒀을 때, 안중이라는 주모가 이 고삼주로 견훤의 군사들을 취하게 해 대승에 일조했다 하옵니다. 그로부터 고삼주를 나라를 건국한 건국주라 부르기도 하옵니다." “그렇소? 참으로 건국주라는 이름이 맞춤합니다. 하물며 태조께서도 그러하시고, 명종조에도 나라에 크게 공을 세운바 있다 들었는데, 어제는 나와 왕후까지 인교의 덕을 입었으니 그 보답을 어이해야 좋겠습니까?" “보답이라니요, 지나친 말씀입니다. 오시는 행로에 용체가 고단하실 터이니 잔을 비우신 뒤 이곳 소주도 한 잔 받으시고, 오늘은 편히 쉬시옵소서. 용체가 회복되시면 소신이 용렬하나마 오늘의 수습책을 간할까 하옵니다." “소주라면 원나라의 그 증류주를 이르는 것입니까?" “예, 그러하옵니다. 충렬왕께서 왜국 정벌에 나선 아국 고려군과 원군을 위무하기 위해 이곳 땅에 다녀가신 바 있습니다. 그때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해져 지금도 빚고 있으니, 안동소주라 하옵니다." “허허, 참으로 왕실과 인연이 각별한 땅이오. 아니, 우리 고려의 반석이고, 왕들의 땅이오. 그런데 소주보다도 부원군의 그 수습책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아니옵니다, 먼저 용체를 평안케 하시옵소서. 만백성이 사랑하는 왕후마마의 옥체도 많이 상하신 듯하여 백성 모두의 마음이 아프옵니다." “고맙습니다. 부원군의 자애로움에 왕후도 힘을 낼 것입니다." 해쓱해진 얼굴의 노국공주를 돌아보던 왕이 문득 시립한 무빈과 여량에게 눈길을 가져갔다. “오, 저들은 누구요? 내 저들의 용맹에 매우 감탄하고서도 미처 보답하지 못했구려." “왼쪽은 무빈이라 하오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의는 변치 않은 저의 지기이옵니다. 언제라도 나라를 위해 쓰일 때를 기다리며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여랑이라 하오며, 어릴 적 제 아버님 친구 분의 딸로 제게는 여제(女弟) 뻘이 되옵니다. 무빈의 수하에서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홍언박이 답하자, 무빈과 여랑은 왕의 앞에 부복했다. “참으로 가상하구나. 기왕 나라를 위해 나섰고 나와 왕후를 구했으니, 무빈은 장수의 자리에서 홍건적의 퇴멸과 개경 수복에 앞장서고, 여랑은 나와 왕후를 호위하는 게 어떻겠느냐?" “황송합니다. 왕의 뜻을 받들어 고려를 수호하고, 왕과 왕후마마를 지킬 것입니다!" 무빈과 여랑이 당당한 음성으로 고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계속> 글 =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