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기획] 스크린에서 걸어나온 문경새재, 관광객이 몰리는 까닭은?

  • 강남진
  • |
  • 입력 2026-04-07 19:49  |  발행일 2026-04-07
지난해 방문객 900만 명 기록, 올해 영화·드라마 촬영지 투어 결합 시너지
왕과 사는 남자·킹덤 등 흥행작 무대로 각광받으며 지역 경제 활성화 견인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전경을 담은 항공사진. 사극 촬영지로 조성된 대규모 세트장이 관광객들에게 역사와 영상콘텐츠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경시 제공>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전경을 담은 항공사진. 사극 촬영지로 조성된 대규모 세트장이 관광객들에게 역사와 영상콘텐츠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경시 제공>

경북 문경의 길 위에는 두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른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시간이 현재에도 'K영화-드라마'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영남대로의 중심에 있는 '문경새재'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다. 유교문화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문경이 'K-콘텐츠'라는 화려한 상상력을 만나 독특한 시공간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광천골 일대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지를 찾은 관광객들이 전통한옥 담장 사이 흙길을 따라 걸으며 봄날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강남진 기자>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광천골 일대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지를 찾은 관광객들이 전통한옥 담장 사이 흙길을 따라 걸으며 봄날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강남진 기자>

이른 아침, 제1관문 주흘산 등성 너머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면 문경새재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면서 분주한 아침을 맞는다. 골짜기를 따라 낮게 깔린 물안개가 전통한옥의 기와지붕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문경새재를 찾는 여행자 손에는 안내책자 대신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들려 있다. 이들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한 장소를 찾아 여행을 이어간다.


특히 최근 문경을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다. 1천5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킹덤' 등 촬영지로 알려지면서다. 7만㎡ 부지 위에는 조선시대 한양의 육조거리와 광화문 등이 재현돼 있다.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괜히 공기의 밀도조차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높게 솟은 목조건물과 세월의 흔적이 묻은 돌담 골목길은 영화 촬영 세트 느낌보다 시간이 멈춘 옛 고을의 풍경이다.


나무 기둥에 새겨진 거친 질감, 비바람에 깎인 담벼락의 균열, 발끝에 닿는 돌길은 스크린 속 기억과 결합해 방문객에게 강력한 생동감을 준다. 여행자들에게 문경은 '보는 곳'을 넘어 '확인하는 곳'이다. 자신이 영화와 드라마에서 느꼈던 감동의 실체를 확인하고, 다시 오랜 기억의 공간으로 남긴다.


문경새재의 콘텐츠 관광이 가져온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평범함의 재발견'이다. 과거라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길이나 낡은 평상에도 관광객의 발길이 닿는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고뇌가 담긴 장소이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은 곳곳에서 사진을 찍고, 영화·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머물렀던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기도 한다. 인증샷 촬영을 넘어선 일종의 '재연(Re-enactment)'이자 '오마주(hommage·존경)'로 손색이 없다.


문경에서 1박 2일간 여행 중인 이창영(25·부산시 초량동)씨도 스마트폰 화면과 눈앞의 풍경을 번갈아 보며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한쪽에 자리한 나지막한 흙담이었다.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소박한 담벼락이지만, 이씨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그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폭발하던 장면을 수차례 돌려봤던 촬영지가 이곳이라는 생각에 평범한 담벼락도 색다르게 느껴진다"면서 "영화 속 시간과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아 스크린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좋아한 사람은 반드시 와봐야 할 곳"이라고 덧붙였다.


문경새재 휴식공간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박순자(65)씨는 "변화된 관광 트렌드를 절실하게 느낀다"며 "예전에는 조선의 건축양식이나 새재의 역사적 유래를 묻는 여행자가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은 영화 속 특정 장면 촬영지와 배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걷던 곳은 묻는 젊은층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문경새재는 누군가에게는 과거급제를 꿈꾸며 걸었던 선비의 길로, 다른 이는 좀비 떼를 피해 달리던 드라마 '킹덤'의 급박한 사투 현장의 대궐 마당길로 남아 있다.


◆ 콘텐츠가 활력을 불어넣은 지역경제


문경 산북면 김룡사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 전경. 곧게 뻗은 전나무들이 터널처럼 이어진 길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며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남진 기자>

문경 산북면 김룡사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 전경. 곧게 뻗은 전나무들이 터널처럼 이어진 길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며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남진 기자>

영화 촬영 세트장에서 차를 몰고 30여 분 정도 산길을 달리면 색다른 정취의 절집이 나타난다. 운달산 자락 깊숙한 품에 안긴 김룡사다. 이곳은 일부 영화 속 인물들이 혼란한 세상에서 벗어나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던 장소로 등장한다. 특히 사찰로 향하는 1㎞ 구간 전나무 숲길의 풍경이 압권이다. 수령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거목이 하늘 높이 뻗어 초록색 터널을 이룬다.


울창한 원시림이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과 계곡물의 웅장한 물소리가 도시의 소음을 잊게 할 때쯤이면 오래된 목조건물의 담백한 나무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면, 숲길은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여백의 공간이 된다.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산과 계곡, 사찰의 풍경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왕의 남자', '광해', '관상', '킹덤'까지, 문경새재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사극 촬영의 1번지다. 스크린 마케팅 효과는 관광객 수 증가를 넘어 지역경제 전반에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 주변 상인들은 "개봉한지 20년이 넘은 영화부터 최신작까지 여운을 찾아오는 손님이 대부분"이라며 "SNS를 보고 찾아오는 젊은 여행객 덕분에 상가 전역이 활기를 띠면서 한층 젊어지는 기분이 든다"고 입을 모았다.


문경 관광의 잠재력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문경시가 집계한 관광지 방문객은 지난해 900만명 수준이다. 문경새재, 철로자전거, 에코월드, 석탄박물관이 관광객 유입을 주도했다. 여기에 영화 촬영지 관광까지 결합시킨 올해는 1천만 관광객 돌파는 무난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문경 관광 정책의 초점은 '기억을 남기는 일'에 맞춰져 있다. 사람은 어떤 장소를 기억할 때 그곳의 위도와 경도와 같은 위치가 아니라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기도 한다. 조선의 옛길 위에 현대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문경은 과거 유산과 현대의 상상력이 만나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옛 선비들이 장원급제의 간절한 마음으로 고개를 넘었다면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서사를 더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경은 대한민국 '이야기 산업'의 심장으로 고동치고 있다. 이곳을 걷는 모든 이는 저마다의 시나리오를 품은 주인공이며,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다시 문경의 새로운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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