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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영화] 그녀가 죽었다…'관종'의 삶 훔쳐보던 공인중개사, 살인사건에 휘말리다
공인중개사 구정태. 싹싹한 미소가 명품인 그는 보기와는 다르게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의 집에 들어가 몰래 훔쳐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최근 그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SNS 인플루언서인 '한소라'다. 편의점 소시지를 먹으면서 비건 샐러드 사진을 포스팅하는 그녀의 삶은 알면 알수록 흥미롭다. 한소라의 삶을 엿본 지 153일 되던 날,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만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소라의 집에 들어간 구정태가 발견한 것은 소파에 축 늘어져 죽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던 것. 로맨틱 코미디 같던 영화는 어느새 범죄 스릴러로 태세를 전환한다. 그가 한소라 집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의 협박이 시작되고, 사건을 맡은 강력반 형사 오영주의 수사망은 촘촘히 좁혀진다. 구정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는 먼저 한소라의 SNS를 통해 주변 인물 탐색에 들어가는데…. 영화가 보여주는 상황이나 인물은 낯설지만,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하다. 멀쩡한 얼굴로 몰래 누군가를 훔쳐보는 남자와 그럴싸한 거짓말로 대중들의 환심을 얻는 인플루언서가 그렇다. 둘은 전혀 다른 이질적 인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닮아 있다. 김세휘 감독은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음흉한 데가 있고, 끊임없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비호감적인 캐릭터들이다. 절대 옹호하거나 미화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김 감독은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 되면서 관종, 염탐, 관음 같은 개념들이 부작용처럼 등장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이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실존적 현상이 된 것"이라며, "관객들이 캐릭터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볼 텐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특히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비중 있게 할애한 남녀 주인공의 내레이션이다. 정태는 관객에게 말을 거는 직접적 방식을, 한소라는 스스로에게 독백하는 형식을 썼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정태는 밖으로 향하는 인물이고, 반면 한소라는 안으로 향하는 인물이기에 내레이션을 다르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5일 개봉.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남의 삶을 몰래 엿보는 남자와 거짓말로 대중의 환심을 얻는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녀가 죽었다'.
[주말&여행] 경남 함양 지리산 가는 길, 지안재와 오도재…돌고 도는 고갯길…인생길 닮았구나
명징하게 구속된 속도를 의식적으로 지키고 있다.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량이 뜸한 시골길에서도. 몇몇 차들이 바쁜 아침처럼 꽁무니를 보이며 쌩하니 멀어지면 속도계를 본다. 내가 너무 느린가. 그러다 난데없는 커다란 오토바이가 나를 앞지른다. 헬멧 아래 삐져나온 백발의 머리칼이 긴 강물 같은 잔상을 남긴다. 그 하얀 물결 따라 함양읍 구룡리 옥녀봉 아래에서 '지리산 가는 길'로 들어선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직선 길을 지나 팔령천을 건너고 조동마을을 스쳐 이제 꼬부랑길을 천천히 오른다. 저 앞에서 굽이마다 아슬아슬 기울어지는 오토바이는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지만넘어지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고갯마루를 넘어 사라진다. 남겨진 고갯마루에 사람들이 서 있다. ◆지안재느리게 여섯 번 반을 굽이돌아 고갯마루에 올라 멈춘다. 고개는 지안재다. 함양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2004년에 개통됐다. 워낙 경사가 급한 산길이라 안전을 위해 구불구불 완만하게 돌아가는 도로를 낸 것이 지금의 지안재 모습이다. 재 아래 조동(棗洞)마을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대추지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팔령천을 사이에 두고 제한(蹄閒)마을과 조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안재는 제한치(蹄閑峙)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가파른 고갯길에 '말발굽도 쉬어간다'는 뜻이다. 제한은 조동마을의 자연부락으로 옛날 역(驛)이 있었던 곳이다. 제한역은 조선 세종 때인 1438년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경상도 함양의 새 역은 '제한'이라 칭한다'라는 기록이다. 동쪽의 사근역(沙斤驛)과 서쪽의 인월역(引月驛)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아마 제한역은 두 역 사이에서 임시로 쉬어가는 역할을 하다 세종 때 정식 역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역 주변에는 역참 관원들에게 딸린 식솔과 물자공급 등을 위한 촌락이 형성되어 제한촌이라 했다. 제한촌의 뒤에 있는 고개가 제한치다. 제한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기 쉬운 지안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진다. 역명은 대개 지명을 따르는데 이곳만은 거꾸로 역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즉 역로는 제한역에서 지안재가 아니라 팔령천을 따라 팔랑치 너머 인월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지안재에서 말발굽을 쉬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꾸역꾸역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고개를 올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거듭거듭 그리하여 오솔길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침내 지금의 길이 났을지도 모른다. 길이 닦인 지 벌써 20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멈추어 쉬어 간다. 지안재는 오도재 아래의 작은 고개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안재'라 따로 구분해서 부른다는데 함양 쪽에서는 그냥 통칭 '오도재'라 부른다. 나는 함양사람도 아닌데 2007년 처음 이 고개를 넘고는 십수 년을 오도재라 했다. 이후 '지리산 가는 길' 따라 지안재를 넘고 오도재를 넘은 것이 족히 예닐곱 번이건만 지안재의 모습은 잊지 못하면서 이름은 자꾸만 잊었다. ◆오도재사방으로 바짝 좁혀진 골짜기로 든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을 따라 더욱 높은 오도재로 향한다. 오도재는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 능선의 고도가 낮아지는 잘록한 안부(鞍部)에 있다. 함양에서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 그리고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다. 옛날 지리산골 마천사람들은 함양장날마다 나뭇짐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와 하동 등지의 소금과 해산물도 이 고개를 넘어 내륙지방으로 운송되었다. 잿마루에 '지리산제일문'이 우뚝 서 있다. 현판은 함양 출신의 명필가 정주상 선생의 글씨라 한다. 문 아래에 함양 방향을 조망하는 전망대와 매점, 화장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 입구에 청매(靑梅) 인오(印悟)조사의 시비가 있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깨달을 각(覺)이 12번 나오는 그 유명한 '12각시'다. 인오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끈 분이다. 그는 마천면 삼정리의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였는데,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모아 함양 장터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고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어 누구든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이 고개를 넘어 장터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재의 오도(悟道)는 '도를 깨우치다'라는 뜻이다. '지리산제일문' 옆 숲속에 산신각이 있다. 두 여인이 앉아 치성을 드리는데 아름다운 수목들 사이로 볕뉘가 어른대어 어쩐지 가슴이 미어진다. 가야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은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국하고 9만 대군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가 잠시 머문 곳이 조동마을 아래 구만동이고, 대궐터를 잡은 곳이 오도재 넘어 추동이다. 그리고 다시 보다 깊은 칠선계곡으로 피란한다. 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은 오도재에 올라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후 성황당이 생겼고, 지나는 길손들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다. 그 자리에 지금 산신각이 있다. 그녀들의 비손 위에 나의 기도를 슬쩍 얹고는 발걸음도 살금살금 숲을 빠져나온다. 여섯번 반 굽이도는 지안재 도로 2004년 개통오도재 잿마루에 관문 '지리산제일문' 들어서조선 청매인오 선사 고개 넘나들다 큰 깨달음'지리산조망공원' 웅장한 지리산 능선 한눈에오도재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지리산조망공원'이다. 지리산 산신인 마고할미가 천왕봉을 머리에 얹고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녀 너머로 지리산의 능선이 한눈에 담긴다. 조 아래가 추동, 저 아래가 마천, 천왕봉 너머는 하동과 구례다. 김종직과 정여창과 김일손과 유호인 등이 이 고개에 멈추어 지리산을 노래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청매선사 등 승군이 이 고개에 머물렀다. 이 고개의 동쪽 산청 땅에 구형왕의 무덤이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은 무력, 무력의 손자는 김유신이다. 어느 날은 안개였고 어느 날은 비였고 어느 날은 멈추었고 어느 날은 스쳤다. '지리산 가는 길'은 맥락 없이 자꾸만 이어지는 이름들의 길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시간들의 길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감쪽같이 잊어버릴 이름들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가끔 생각날 시간들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지안재 넘어 오도재에 이른다.여섯 번 반을 굽이돌아 해발 370m의 고갯마루에 오르는 지안재. 함양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2004년에 개통됐다.지리산제일문 앞에서 함양방향을 바라본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이 펼쳐진다.지리산제일문. 지리산으로 가는 관문으로 2006년에 준공됐다. 오른쪽 시비에 인오조사의 '12각시'가 새겨져 있다.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이 제단을 쌓고 기원하던 자리에 산신각이 있다. 길손들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던 자리이기도 하다.
[개봉작] 미지수
감독:이돈구 출연:권잎새·반시온 장르:멜로 등급:12세 이상 관람가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다섯 인물들의 미지의 슬픔과 시간을 그린 영화.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지수',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절망적인 '우주', 우주선 발사뉴스에 집착하는 '기완', 비가 오면 발작하는 남편 때문에 괴로운 '인선' 등의 사연이 그려진다.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개봉작] 스턴트맨
감독:데이빗 레이치 출연:라이언 고슬링·에밀리 블런트 장르:코미디 등급:15세 이상 관람가 스턴트맨 콜트는 잠수 이별을 택하고 후회뿐인 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전 여자친구 조디의 촬영장에 복귀하며 아련한 재회를 기대한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갑자기 주연배우가 사라지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개봉작] 차이콥스키의 아내
감독: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출연:일리오나 미하일로바 외 장르:멜로드라마 등급:청소년 관람불가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와 아내 안토니나의 파격적 사랑을 그렸다. 5회 연속 칸영화제에 진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차이콥스키 부부의 광기 어린 사랑과 열정을 유려한 화면에 펼쳐놓았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개봉작] 쇼생크 탈출
감독:프랭크 다라본트 출연:팀 로빈스·모건 프리먼 장르:드라마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995년 개봉 이후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다. 콘텐츠 커뮤니티 '키노라이츠'에서 한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20세기 영화' 설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쓴 앤디가 쇼생크 감옥에 갇혀서도 존엄을 잃지 않고 지낸 끝에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는 과정을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보여준다. 8일 개봉.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K팝 문화의 이면 '악플'(2) 무섭고 이기적인 팬덤 문화
"아이돌들 몇억씩 벌면서 징징대는 거 듣기 싫다. 똑같이 힘든데 주 5일 출근에 월 200만원 버는 직장인들도 있다."요즘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K팝 산업과 관련해 자주 보이는 게시글 내용이다. 전 세계적으로 K팝이 흥하고 있지만 산업의 뒤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 K팝 아티스트들은 '보이는 직업' 특성상 대중의 사랑을 기반으로 돈을 버는데, 이로 인해 과도한 잣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모 아이돌의 열애설이 논란으로 떠오르면서 아티스트가 자필 사과문을 올리는 일까지 발생했다.악플 고충 내비친 NCT드림 런쥔 팬들 비난에 불안증세로 활동 중단 에스파 카리나 열애에 극성팬 분노트럭 시위까지 이어지자 사과문 "팬들이 뒷받침해주는 아이돌 문화'보상 심리'로 과도한 잣대 들이대K팝 산업 오래 유지되기 위해선건강한 팬덤 문화부터 선행돼야" K팝 스타인 아이돌은 엔터사의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다. 아이돌의 인기를 형성하는 요소는 아티스트들의 재능도 있지만 주로 문화자본, 엔터기획사의 규모, 팬덤 등이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이에 따라 아이돌들은 대중에게 전문적인 아티스트보다는 보이는 직업 또는 엔터사의 상품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으며 악플, 감정 착취, 과도한 품평 등 객체화·대상화라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 돈을 벌기에 '그래도 되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 K팝 산업과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론장을 새로운 눈으로 풀이하는 책 '망설이는 사랑'에서 저자 안희제도 "아이돌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노래나 춤과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일보다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일'로 이해된다"고 했다.이로 인해 최근 K팝 아티스트들의 호소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지난달 7일 그룹 엔시티 드림(NCT DREAM)의 런쥔은 자신이 받은 악성 메시지를 팬소통 플랫폼에 공개하며 고충을 토로했다. 해당 메시지에는 '아이돌들 살기 너무 편해졌다'는 말과 함께 외모와 실력을 비하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면서 런쥔은 "아이돌도 사람이고 힘듦을 느낀다. 보이는 건 당연히 예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접한 네티즌들 중에는 런쥔의 입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나오는 한편 "굳이 왜 부정적인 메시지를 팬과의 소통 창구에 올리며 징징대는지 모르겠다" "팬들이 감정 쓰레기통인가" 등의 반응도 적지 않았다. 런쥔은 결국 컨디션 난조와 불안 증세로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열애설이 논란이 된 경우도 있다. 지난 3월5일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는 자신의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저를 응원해준 마이(공식 팬덤)들이 얼마나 실망했을지, 그리고 우리가 같이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마이들이 상처받은 부분 앞으로 잘 메워나가고 싶다." 일주일 전 배우 이재욱과의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그사이 여러 팬들이 배신 당했다는 비난을 온·오프라인으로 표출하면서 뒤돌아섰기 때문이다. 카리나 소속사 인근엔 해외팬들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트럭 시위가 등장하기도 했다. 트럭에는 "팬이 너에게 주는 사랑이 부족하니? 당신은 왜 팬을 배신하기로 선택했습니까"라는 멘트가 적혀 있었다.런쥔도, 카리나도 스타들이 이렇게 엄격한 잣대에 직면하는 근본적인 이유에는 아이돌은 대중에게 보여줘야 하는 영역과 숨겨야 하는 영역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10년째 K팝을 덕질(무언가에 파고 드는 일) 하고 있다는 이세영(26)씨는 "아이돌은 보이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긍정적이지만 수동적인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듯하다.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아바타'처럼 말이다"라면서 "그런 점에서 고충 토로나 열애설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는 점에서 숨겨야 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우리의 사랑으로 돈을 버는 네가 감히?'식의 생각이 사람들의 무의식에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팬과 가수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보상 심리'로 풀이되기도 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팬들이 가수를 뒷받침하고 밀어준다고 생각하기에 유사 제작자 마인드가 있는 듯하다. 자신들이 스타에게 해주는 만큼 스타도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 스타로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면서 "그러니 연애를 한다든지, 푸념을 한다든지 하는 건 이들에게 열심히 하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것으로 비친다. 그런 심리가 있어서 아이돌들을 팬들이 다그치는 일들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단순히 상대를 좋아하는 걸 넘어서 과도한 것을 요구하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팬의 위치에 맞지 않는 건강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스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응원해주는 선에서 그치는 게 가장 팬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K팝을 좋아하는 대중 사이에서 확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에스파 카리나엔시티 드림 런쥔
[박지형의 스포츠와 인문학] 중국 축구와 아레오파지티카
1644년, 영국 의회가 출판물의 사전 검열에 해당되는 '출판 허가제'를 부활시키려 하자, 문호 존 밀턴은 '아레오파지티카'라 불리는 짧은 팸플릿을 통해 그것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밀턴은 자유 경쟁만이 '진짜'를 판별해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강력하게 설파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픈된 장에서는 절대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신념은 이어진다. "일견 거짓으로 보이는 것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것을 사전 차단하는 것은 악(惡)이다." 밀턴의 저 통찰은 21세기가 된 지금 모든 정상 국가에서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보편칙은 지켰을 때보다는 지키지 않았을 때 그 위력을 통감하게 된다.지난 1월에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중국은 3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1골도 넣지 못한 채로 조기 탈락했다. 얼마 전 치러진 U-23 아시안컵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한 명이 퇴장당한 일본에게 0-1로 패배하는가 하면, 우리와 맞붙은 경기에서도 수많은 기회들을 놓치며 결국 0-2로 패배하고는 조기에 짐을 싸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중국이 첫 출전한 그 대회에서 내리 3연패로 탈락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 축구를 대놓고 무시하는 한국인은 없었다. "지금은 경험이 적어서 저렇지만 20년 뒤가 되면 아마 우리가 이기기 힘든 팀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 축구의 굴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실력이 그 당시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중국 축구가 이 모양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연역적으로 보자면 핵심은 결국 '밀턴의 통찰'과 맞닿아있을 터다. 그 나라에서는 선수 선발의 장(場)이 오픈 된 자유 경쟁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즉, 중국의 '아레오파고스(고대 그리스의 법정)'는 철저하게 '특정 선수'만을 뽑을 뿐, '기타 선수'는 아예 배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중국에서 활약했던 유소년 코치들의 인터뷰를 보면 심증은 확신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애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화를 냈어요. 이렇게 게으르니까 니들이 못하는 거다. 그런데 나중에 애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돈 많고, '빽' 센 아이들이 이미 뽑히기로 '내정'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희망이 없는 애들은 열심히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그렇게 '간택'된 선수들이 가게 되는 프로축구의 환경도 중국 축구의 몰락에 한몫 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선수들이 기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톱 선수들은 이제 자국 리그에 등 따습게 안주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순지하이, 판즈이, 리티에, 양첸 등의 선배들이 유럽에서 고군분투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다 할 경쟁 없이 손쉽게 프로가 된 도련님들이, 쿼터로 자리가 보장되는 팀에서 편안하게 백만장자로 늙어가고 있는 낙원. 나라의 리그가 그래서야 국대의 경쟁력이 생길 리 만무하다.나는 중국 축구가 망하든 흥하든 별 관심이 없다. 내게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스포츠 문화다. 과연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돈과 인맥을 초월하여 유소년들을 키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이제 올림픽도 못 나가는 우리네 농구, 배구 선수들은 대체 해외의 그 어떤 리그에서 지금 받고 있는 그 엄청난 연봉을 받을 수 있을까? 밀턴으로 돌아가자.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외국인들에게도 더 크게 문호를 열어라. 스스로 낙원을 버리고, 다시 투쟁으로 나아가자. 14억이 고작 5천만에게 공포를 느끼는, 그 한심한 그들 축구의 무기력을 비웃기 전에. 문화평론가지난달 19일 오후(현지시각) 카타르 도하 압둘라 빈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조별리그 B조 2차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 연합뉴스박지형 문화평론가
[주말&여행] 마실 가듯 떠나요 '대구 앞산 고산골', 어디선가 '카앙~' 공룡 울음…놀란 잣나무는 쭈뼛쭈뼛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너무나도 청량한 빛깔의 메타세쿼이아에 눈길이 박힌다. 늘씬한 줄기와 뾰족뾰족한 우듬지의 열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수리가 시원해진다. 갑자기 무언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천천히 뒷목을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공중에 있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얼굴과 마주친다. 하하 놀랐다.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어디선가 공룡 우는 소리 카앙- 카앙- 들린다. ◆공룡이 활보하던 골짜기주차장 옆 계곡에서 공룡 발자국을 본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이곳을 활보하던 공룡이 남긴 것이다. 조각류의 것이 4개, 용각류의 것이 7개, 모두 초식공룡의 것으로 추정된다. 옆에는 물결무늬의 연흔과 퇴적층의 층리도 보인다. 그때, 경상도 일대는 분지형 저지대였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들어 점차 드넓은 호수가 만들어졌고 주변으로는 많은 못과 늪지대가 생겨났다. 직경이 150㎞나 되는 호수는 경상도 전역은 물론 대한해협과 일본 본토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그 한가운데에 대구가 있었다. 날씨는 따뜻했고 초식 공룡의 먹이가 되는 나무고사리, 소철, 연한 순의 송백류 등이 풍부했다. 공룡과 다양한 동물들은 물과 먹이를 찾아 습지와 늪과 수풀로 우거진 호수를 활보했다. 육중한 걸음은 발자국을 남겼고, 발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건조한 기후를 맞았으며, 또 다른 퇴적물이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약 7천만 년 전 화산폭발이 일어나 앞산이 생겼고, 2006년 고산골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2016년에는 공룡공원이 만들어졌다. 공룡공원 옆으로 메타세쿼이아길이 뻗어 있다. 넓은 흙길 양편으로 곧게 솟은 나무줄기 사이로 공룡과 사람들이 보이고 이따금 공룡 우는 소리가 골짜기에 퍼진다. 공룡공원은 아이들이게 인기다. 공룡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아이들은 공룡 뼈가 숨겨져 있는 모래놀이터를 최고로 좋아한단다. 길가에 또 다른 화석지 안내판이 나타난다. 계곡 아래로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건열이 보인다. 건열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지표면이 마르면서 수축해 다각형의 무늬로 갈라진 것이다. 다각형 무늬가 흰 빛인 걸 보니 갈라진 틈 사이로 모래가 채워진 듯하다. 휙 스치는 오늘의 바람이 1억년 전의 바람 같다. 어린이 체험 학습장이 환하다.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온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이들 주변을 토끼가 어슬렁거린다. 살아있는 진짜 토끼다. 체험장 가장자리의 벤치에는 자전거를 타고 온 노인이 그림처럼 앉아 있다. 메타세쿼이아길은 공룡공원에서 고산골 수덕사까지 900m 정도다. 수덕사 앞에 고산골 관리사무소와 앞산 등산코스 안내도가 있다. 여기서 길은 토굴암 방향과 법장사 방향으로 나뉜다. 오늘의 목표는 법장사 지나 잣나무 숲이다. ◆법장사 지나시멘트 등산로다. 이 길에는 밤에도 불이 켜져 있어 야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성불사를 지난다. 등산로 옆으로 숲 트레킹 길이 시작된다. 굴암사를 지난다. 담벼락에 늘어선 무궁화가 이제 막 새잎을 내밀었다. 법장사에 닿는다. 일주문 편액에 '대덕산 법장사'라고 적혀 있다. 담장 위로 석탑이 높다. 신라 말엽에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근심이 큰 왕이 있었다고 한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백 리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들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왕은 절을 짓고 고산사라 했는데, 이듬해 왕비가 백일기도를 올리고 왕자를 낳자 왕은 크게 기뻐하여 고산사에 3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고산사는 자식 없는 부녀자들의 기도처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1961년 고산사 터에 세워진 절이 법장사다. 석탑은 흩어져 있던 탑의 잔해를 모아 세웠다고 한다. 고산골은 고산사가 있던 골짜기다. 법장사를 지나면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한다. 한 걸음이 천근이라 멈추고, 허리가 뻐근해 멈추고, 무릎이 시큰해 또 멈춘다. 멈추면 들꽃들이 보인다. 하늘하늘 연보랏빛 소래풀 꽃이 많다. 따뜻한 모퉁이에는 노란 뽀리뱅이, 긴긴 목을 빼 들고 작은 얼굴에 빛을 담는다. 야외무대를 지난다. 무대는 풀에 뒤덮여 있고 중앙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주인공처럼 서 있다. 객석은 푸른 이끼로 가득하다. 고대인이 물고기를 새겨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바위를 지나 가침박달나무의 흰 꽃을 보고 나면 시멘트길과 트레킹길이 만난다. 그리고 곧 침목 계단이 있는 흙길이다. 저 위로 삼각의 지붕과 반짝거리는 거울 벽과 나무에 걸린 빨간 시계가 보인다. '물이 있는 쉼터'다. 맑은 물이 수조에 떨어지고 빨간 바가지가 동동 떠 있지만 음용에 부적합하다는 안내문이 있다. 빨간 시계는 시간이 맞지 않다. 삼각 지붕은 사각의 파고라에 비닐 벽을 두른 쉼터였다. 내부에 거울, 빗, 시계, 달력, 수건 따위가 걸려 있다. 주변에는 커다란 거울과 생각보다 많은 운동기구가 있다. 한 아저씨가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두 아주머니는 벤치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나를 앞질러 갔던 여자는 이곳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되돌아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나를 추월해 간 남자는 내가 이곳에 닿기도 전에 다시 나를 스쳐 내려갔었다. 많은 사람이 이곳까지의 등산을 루틴으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잣나무 숲에서 돌 많은 산길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아 자꾸만 멈추게 되지만 아무도 없는 산길은 언제나 무섭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비목나무 앞에 긴급구조신고처 파-2 안내판이 있다. 두근두근 급한 걸음으로 10여 분쯤 흘렀을까, 잣나무 숲이 시작된다. 서늘하고 멋있다. 아니, 서늘해서 멋있나. 1983년에 대형 산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고 2002년에 2만 그루, 2015년에 1만1천 그루를 솎아 베었다고 한다. 바람이 심상치 않다. 숲의 심장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긴급구조신고처 파-3 근처만 왔다 갔다 하다 돌아선다. 하산 길은 트레킹길이다. 도도도도도 거의 뛰듯이 내려간다. 제법 날다람쥐 같은걸. 그래도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계류 앞에서 멈추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다시 시멘트 길을 만나고 유아숲체험장에 들어서고야 큰 숨을 내쉰다. 아이들이 놀다 간 오솔길에 분홍 진달래꽃과 노란 산괴불주머니와 연보랏빛 소래풀 꽃과 초록의 참나무 잎이 모여 있다. 검은 토끼가 벤치 아래 돌처럼 앉아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따라 맨발산책로로 들어선다. 고산골 집들이 보이고 텃밭 너머 티라노사우루스와 메타세쿼이아길이 보인다. 바람이 변덕스러웠던 봄, 한바탕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듯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앞산순환도로 동쪽 끝 상동교 서단에 공룡공원 이정표가 있다. 공룡공원 바로 앞에 고산골 공영주차장과 주차 빌딩이 있으며 최초 30분에 200원, 이후 10분마다 100원, 1일 주차는 2천원이다. 공룡공원까지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 남구 국민체육센터 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무료다. 공룡공원은 상시 개방이며 입장료는 없다. 저녁 8시 이후는 주차료도 무료다.맨발산책로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텃밭 너머 티라노사우루스가 보인다.고산골 계곡에 있는 공룡 발자국.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이곳을 활보하던 공룡이 남긴 것이다. 옆에는 물결무늬의 연흔과 퇴적층의 층리도 보인다.1961년 고산사 터에 세워진 법장사. 석탑은 흩어져 있던 탑의 잔해를 모아 세웠다고 한다. 고산골은 고산사가 있던 골짜기다.고산골 잣나무 숲. 1983년에 대형 산불이 난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왼쪽). 트레킹 길에서 만난 폭포와 같은 계류. 트레킹 길은 자연에 폭 둘러싸여 있지만 시멘트길과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다. 곳곳에 서로를 잇는 샛길도 있다.고산골 잣나무 숲. 1983년에 대형 산불이 난 이후 24만㎡ 면적에 4만6천 그루의 잣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왼쪽). 트레킹 길에서 만난 폭포와 같은 계류. 트레킹 길은 자연에 폭 둘러싸여 있지만 시멘트길과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다. 곳곳에 서로를 잇는 샛길도 있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8〉줄 없는 거문고(하) 정신은 찾지 않고 껍데기만 좇을 뿐…고요함 속 찾은 깨달음의 경지
"옛말에 이르기를 거문고는 악(樂)의 으뜸이라, 군자가 항상 사용하여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군자가 아니지만 거문고 하나를 지니고 줄도 갖추지 않고서 어루만지며 즐겼더니, 어떤 손님이 이것을 보고 웃고는 다시 줄을 갖추어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길게 혹은 짧게 타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옛날 진나라 도연명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두고 그것으로 뜻을 밝힐 뿐이었는데, 나는 이 구구한 거문고를 가지고 그 소리를 들으려 하니 어찌 옛 사람을 본받겠는가?" 시·거문고·술을 너무나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던 이규보(1168~1241)가 남긴 내용이다. 그 역시 도연명의 무현금의 세계를 동경했음을 알 수 있다. 줄 없는 거문고 '무현금'의 세계는 이처럼 한국의 선비들에게도 깊이 스며들었다.소리가 없음에 느끼는 오묘함 체득귀한 줄이나 채 가져도 부질 없는 것귀로 듣는게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선비들에 깊이 스며든 무현금 세계◆조선의 선비와 무현금이규보는 도연명의 무현금 세계를 찬미하는 시를 적지 않게 남겼다. 다음은 도연명의 시에 대해 읊은 작품 '독도잠시(讀陶潛詩)'이다. 도잠(陶潛)은 도연명의 본명이다. 연명(淵明)은 도잠의 아호이다. '내가 사랑하는 도연명은(吾愛陶淵明)/ 그 말이 너무도 평담하다(吐語淡而粹)/ 항상 줄 없는 거문고 어루만졌다지(常撫無絃琴)/ 그러기에 시도 모두 그렇구나(其詩一如此)/ 지극한 음률은 소리가 없는 법이니(至音本無聲)/ 무슨 줄이 필요하겠는가(何勞絃上指)/ 지극한 말은 문체가 없는 법인데(至言本無文)/ 어찌 꾸밈을 일삼으랴(安事彫鑿費)/ 자연에서 나온 그 평화로운 말들(平和出天然)/ 음미할수록 진미를 느끼네(久嚼知醇味)/ 인끈 풀고 전원에 돌아와(解印歸田園)/ 세 갈래 좁은 길 소요하면서(逍遙三徑裏)/ 술 없으면 친구 찾아가(無酒亦從人)/ 날마다 취해 쓰러졌지(頹然日日醉)/ 한 평상에 희황이 누웠으니(一榻臥羲皇)/ 맑은 바람 솔솔 불어온다(淸風颯然至)/ 순수한 태고 시절 백성이요(熙熙太古民)/ 고상하고 뛰어난 선비로세( 卓行士)/ 그 시 읽고 그 사람 상상하며(讀詩想見人)/ 천년토록 높은 의리 숭앙하리(千載仰高義)'.이규보의 또 다른 시 '소금(素琴)'이다. '천뢰(우주)는 처음부터 소리 없는데/ 흩어져 만규(萬竅)의 소리를 내는구나/ 오동은 본래 고요한 것이나/ 다른 힘을 빌려서 소리가 나네/ 내가 줄 없는 거문고로/ 유수(流水)곡 한 곡을 타네/ 지음(知音)이 듣기를 원하지도 않고/ 속물이 듣는 것도 꺼리지 않네/ 다만 내 마음을 쏟아/ 애오라지 한두 줄 퉁겨 보네/ 곡조가 끝나면 또 고요하게 침묵하니/ 아득히 옛사람의 뜻과 합치되네'화담(花潭) 서경덕(1489~1456)은 '무현금명(無絃琴銘)'을 남겼다. 무현금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琴而無絃)/ 본체는 놓아두고 작용을 뺀 것이다(存體去用)/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非誠去用)/ 고요함에 움직임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靜基含動)/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聽之聲上)/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不若聽之於無聲)/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樂之刑上)/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不若樂之於無刑)/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樂之於無刑)/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乃得其)/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聽之於無聲)/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乃得其妙)/ 밖으로는 있음에서 체득하지만(外得於有)/ 안으로는 없음에서 깨닫게 된다(外得於無)/ 그 가운데에서 흥취 얻음을 생각하면(顧得趣平其中)/ 어찌 줄에 얽매이겠는가(爰有事於絃上工夫)/그 줄은 쓰지 않고(不用其絃)/ 그 줄의 줄 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用其絃絃律外官商)/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吾得其天)/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樂之以音)/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樂其音)/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音非聽之以耳)/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聽之以心)/ 저 종자기가(彼哉子期)/ 어찌 나의 거문고 소리를 귀로 들으리(曷耳吾琴)'종자기(鍾子期·BC 387~299)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의 사람이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종자기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종자기가 죽은 후에 백아는 지음(知音)을 잃었다고 탄식하며 거문고를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조선 전기 문신인 이영서(?~1450)가 남긴 시 '무현금(無絃琴)'이다. 여기에서도 이런 선비의 삶을 잘 읽을 수 있다. '도연명이 거문고 하나를 가졌는데(淵明自有一張琴)/ 줄을 매지 않았지만 뜻은 더욱 심오했었네(不被朱絃思轉深)/ 참된 맛을 어찌 거문고 소리로써 얻을 것인가(眞趣豈能聲上得)/ 천기란 모름지기 고요함 속에서 찾아진다네(天機須向靜中尋)/ 좋은 거문고 줄과 채는 모두 부질없는 것(鯤絃鐵撥渾閑事)/ 유수와 고산을 켰다는 악곡도 헛애만 쓴 것이네(流水高山 苦心)/ 옛 거문고 가락 속인의 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니(古調未應諧俗耳)/ 천년 세월이 흘러가도 그 곡조 아는 이 없으리(悠悠千載少知音)' '곤현(鯤絃)'은 곤어(鯤魚) 가죽으로 만든 줄로, 좋은 거문고 줄을 의미한다. 곤어는 북해에 산다는 상상의 큰 물고기이다. 그리고 '철발(鐵撥)'은 쇠로 만든 채(현을 퉁기는 도구)를 말한다. 좋은 악기나 연주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것이 관건임을 이야기하고 있다.줄이 없는 거문고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도연명은 무현금 하나를 가지고 어루만지면서 심오한 뜻을 추구했다. 참다운 맛은 거문고에서 나오는 소리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귀한 거문고 줄이나 채를 가졌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백아가 아양곡을 잘 타고 종자기가 그 가락을 잘 알아들었다는 것도 헛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연명이 줄 없는 거문고에서 들었던 그 곡조를 알고자 하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채근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무자서(無字書)를 읽을 줄은 모르며,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현금(無絃琴)을 뜯을 줄은 모르니,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이처럼 선비들, 군자와 성인이 되고자 했던 옛 지식인들은 그들이 추구한 인격을 완성해 가는 동반자로 무현금을 가까이했던 것이다.무현금의 세계를 추구한 것은 선비들뿐만이 아니다. 선사들, 불교 수행자들은 '몰현금(沒絃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줄 없는 거문고라는 비유를 통해 탐진치(貪嗔痴)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이경윤(1545~1611)의 '월하탄금도'(부분). 이 그림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김봉규 bg4290@naver.com
[사람의 서재] 우울·파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오랜 기간 많은 청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인간 실격'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우울과 절망에 빠진 젊은이의 심리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는데,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다.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7남 4녀 중 열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 쓰시마 집안은 고리대금업을 통해 대부호 가문으로 성장했는데, 이런 집안의 역사는 다자이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였고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창 시절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도쿄제국대 불어불문과에 입학한 후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 1930년 연인과 투신자살을 기도했지만 홀로 살아남았다. 1935년 소설 '역행'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27세가 되던 해 "유언을 쓰는 마음으로 썼다"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했다. 그는 또다시 아쿠타가와상에 응모했고 발표에 앞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책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첨부했다. "부디 저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주십시오. 바라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깊은 경의와 비밀스러운 혈족감이 이와 같은 부탁의 말씀을 드리게 한 것 같습니다. (중략) '만년' 이 한 권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분명 괜찮은 작품일 것입니다."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그는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지금까지의 도덕이나 문학에 반발해 새로운 인간성 회복을 찾아 가자고 주장하는 '무뢰파(無賴派)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인간 실격'은 '퇴폐와 파멸의 정조'를 기저에 깔고 있는 일본 무뢰파 문학의 대표작이다.이후 3년 뒤인 1948년 연인과 함께 또다시 투신자살을 기도했고 생을 마감했다. 향년 38세. 유서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기 때문에 죽습니다"라고 썼다. 조현희기자다자이 오사무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0> 이병철, 삼성물산 '반도호텔'로 이전
삼성물산은 사세 확장에 따라 종로2가 영보빌딩에서 1954년 7월1일 본사를 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있는 반도호텔 빌딩 530호로 이전했다. 반도호텔은 노구치 시타가우라는 민간인이 1936년에 세운 호텔로 당시 최고의 규모였다. 반도호텔 이전에 1914년에 세워진 조선호텔이 국내 최초의 호화호텔이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총독부의 철도국이 설립한 호텔이었다. 어느 날 노구치 시타가우는 사람을 만나려고 조선호텔 정문에 들어섰다. 그러자 수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장을 저지했다. 옷차림이 너무 허접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입장을 하긴 했는데 기분이 나빴다. 그는 흥남 질소비료 공장을 돌아보다가 서울에 약속이 있어 진흙이 묻은 구두를 신고 급히 달려오는 중이었다.그날 밤 그는 조선호텔을 능가하는 호텔을 설립하려고 결심했다. 노구치 시타가우는 당시 일본질소 콘체른의 회장으로 아시아 최대의 압록강 수풍댐과 흥남질소 등과 그 산하에 약 26개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불화수소를 공급하지 않아 문제 됐던 신월화학공업도 그의 소유였다. 그는 3층인 조선호텔보다 두 배 이상 높은 8층의 반도호텔을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세웠다. 지하 1층~지상 8층 객실 111개에 150명이 숙박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는 객실이 69개밖에 없던 조선호텔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반도호텔은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최고층 건물 중 하나였다. 당시 반도호텔은 5층까지는 사무실, 6·7·8층은 호텔 객실이었다. 반도호텔 내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3대의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다. 필자도 초등학생 시절인 1962년경 그걸 타본 적이 있다.당시 삼성물산공사는 그 호텔의 5층 30호실을 사용했다. 삼성물산 본사는 40평 크기였으며 이병철, 조홍제 부사장 등 총 19명이 근무했다. 당시 이병철과 조홍제는 가운데에 사무실을 놓고 양쪽 끝에 집무실에서 근무했다. 삼성물산의 조직은 경리부, 영업부, 부산사무소, 도쿄지점 등이었다. 삼성물산의 주요 수출품은 농수산물과 광산물이었고 그 외에 약간의 공예품과 모직물 등이 있었다. 수출에 비해 수입 품목은 매우 다양하여 비료, 종이류, 섬유, 비철금속, 목재류, 화공약품 등 그 종류가 다양했다. 1957년 삼성물산의 연간 수출입실적은 1천50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연간 교역량의 약 3.81%를 차지했다. 삼성물산은 나날이 성장하여 1959년 1월15일에는 총자본금이 1억5천만환이었으며 종업원은 142명에 달했다.제당업 성공 뒤이을 후속 사업 논의면방직산업 진출 최우선 고려했으나시설영세·외국의존 높은 모직 선택조홍제 FOA 원조금 받아내 독일행제안가보다 20만달러 낮은 값에 계약이 거래가 韓·獨간 민간무역 '제1호'◆제일모직의 설립 새 사무실에서 제당업으로 성공한 이병철과 조홍제는 또 다른 사업을 찾는다. 삼성그룹의 수뇌부가 이사회를 열어 업종을 선택하는 회의가 열렸다. 1954년 초의 일이다. 처음에는 면방직 산업의 진출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공장의 설립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조홍제가 상공부 당국과 의견을 나눠보니 "면방직 공업은 이미 여러 기업가들이 공장을 건설 중에 있고 또 기존시설도 대부분 복구되어 가동 중에 있는 만큼 더 이상 면방공장의 신설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시설규모가 영세하여 많은 양을 외국산에 의존하고 있는 모직 분야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것이 당국의 의견이었다. 조홍제는 상공당국과 여러 차례에 걸쳐 협의한 끝에 면방직이 아닌 모직 공장을 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상공부 당국이 이러한 견해를 낸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1953년 말, 즉 6·25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국내에 면방직 방적기가 무려 15만7천809추가 있었고 직기 수는 3천715대였다. 6·25전쟁 직전에는 무려 9천75대였던 것이 전쟁 와중에 상당수 파손되어 3분의 1 규모로 감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상당 부분이 계속 복구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모방직 방적기는 6천347추에 106대의 직기만 가동되고 있었다. 따라서 면방직에 비해 모방직 방적기가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모방직의 경우 당시 한국에는 마산과 밀양 등지에 소규모의 모직 시설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양복지와 같은 고급 모직물은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마카오 신사한때 '마카오 신사'라는 유행어는 영국에서 수입된 양복지로 양복을 해 입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양복에 쓰이는 모방직 제품 대부분이 외제였다. 따라서 조홍제는 현대적인 대규모 공장을 세워 가동한다면 수입 대체 산업으로도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모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생산이 시작되면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조홍제는 공장 설비를 위한 자금 지원을 얻기 위해 미국 원조 당국과 접촉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러한 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외국인이 공장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공장을 가동할 능력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모직공장이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방적, 즉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든 후 염색, 가공, 직포 등의 공정을 거쳐야 하고 그것들은 각기 분업화, 전문화되어 있었으므로 한국의 기술 가지고는 어렵다는 것이다.그러나 조홍제는 이러한 공정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판단한다. 즉 '울톱 제조공정'을 제외한 최신식 일관생산시설 1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홍제는 미국의 FOA에서 대외원조자금 60만달러를 받아내게 되었다. 조홍제는 일본의 '대일본모직'과 미국의 모직공장을 둘러보았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다시 조홍제는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시에 있는 기계무역상인 C.일리스라는 회사를 찾아갔다. 조홍제는 일본에서 독일경제학과를 나왔으므로 나름대로 독일의 기계 산업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스핀바우 사와 협상조홍제는 여러 회사를 방문한 끝에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계설비가 성능 면에서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그롬베크 상무를 만나 스핀바우 사의 기계 성능에 관해 문의하였다. 그롬베크 상무는 조홍제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가장 믿을만한 회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는 서류 파일을 조홍제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모직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온도, 습도, 전력, 노동력, 교통, 용수, 수질, 종업원의 기술, 지도, 훈련내용 등 무려 48개 항목의 문제점과 대응책이 적혀 있었다. 조홍제와 스핀바우 사 간의 가격 흥정이 독일 현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스핀바우 사는 80만달러가 넘는 가격을 제시했다. 자금이 60만달러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브레멘의 호텔 방에 누워 이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날 조홍제는 스핀바우 사의 그롬베크 상무에게 "내가 준비한 달러는 60만달러뿐입니다. 우리는 달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나라입니다. 그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핀바우 사 사장은 기곗값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기계 자체의 성능이 우수한 것만 계속 강조하였다. 다시 조홍제가 반론을 제기했다.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에게는 그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60만달러밖에 준비를 못해서 이것 가지고는 5천추의 모직 생산시설밖에 갖추지 못하지만 얼마 안 가서 몇 배로 증설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탈리아, 프랑스의 기계회사와도 가격을 협상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핀바우 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이 회사와 거래하고 싶습니다. 대신 기계가격은 내가 제시한 선에 맞추어 주십시오"라고 떼를 썼다.스핀바우 사 사장은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 얼마 후 아침에, 호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조 사장, 축하합니다." 결국 스핀바우와 조홍제 간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계약내용은 5천추 1식을 60만달러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스핀바우 사는 당시의 기계판매로 19만5천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의 민간무역 제1호였다. 그 얼마 후 독일의 스핀바우 사의 기술자들이 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한국의 산업 사상 민간 기업이 이룩한 최초의 기술 도입이었다. 제일모직의 선진기술 도입과 연구개발은 최첨단 모직기술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 작가·전경련 교수제일모직공장을 둘러보는 이병철. 1962년 집무실에 앉아 있는 조홍제. 이영민 감독의 영화 '서울의 휴일'(1956)에 나온 반도 호텔.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3) 서운희의 앤틱 지식·정보
오래된 도자기를 보면 '언제 만들어졌지?' '어느 회사 제품이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찾기 어렵다. 이런 갈증을 해결해줄 '가뭄 속 단비' 같은 책이 지난달 발간됐다. 앤티크(앤틱, Antique) 도자기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백과사전,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사진>다.저자인 서운희는 약 10년간 유럽 앤티크 도자기를 모으고 있는 수집가다. 세계 3대 도자기인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을 비롯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보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작한 취미였지만 이제는 국내에서도 앤티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번 신간을 발간했다. 기존 해외 서적은 찾기도 쉽지 않고, 찾아도 도자기의 이름이 회사명으로 이름이 표기된 경우가 있어 국내 독자들이 앤티크 도자기에 관한 책을 접하거나 모르는 도자기의 이름을 알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자는 자신이 보유한 여러 소장품들을 바탕으로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백과사전식으로 구성해 설명한다.앤티크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게재할 내용이 매우 풍부해 한 권의 책으로는 그 내용을 모두 담기 모자라며 방대하다. 이에 저자는 '지식'편과 '정보'편을 나눠 두 권으로 발간했다. 두 권의 저서는 내용이 상호 연결돼 있다. 지식편은 앤티크 도자기의 스토리·팩토리(제조사)·모양·연표·명장·기념 접시 등의 내용이, 정보편은 지식편과 마찬가지로 스토리·팩토리·기념 접시에 더해 이마리 패턴·제조 번호·양식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온 가족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쉽게 풀어썼다. 큰 책에 저자가 직접 찍은 다양한 시각자료도 들어가 있어 잡지를 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앤티크는 일반적으로 오래전에 만들어진, 100년 이상 된 도자기(ceramic), 포슬린(porcelain), 포터리(pottery)를 일컫는다. 이 책에선 이를 일일이 구분해 부르기엔 번거로운 면이 있어 통칭해 '앤틱'이라 부른다. 'Antique'란 단어도 외래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땐 '앤티크'라 표기하지만, 본책에선 일반적인 독자들이 통상적으로 부르는 '앤틱(엔틱)'으로 표기했다.저자는 서문에서 "박물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거리감 있는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서 수집 가능한 다양한 유럽 도자기를 '앤틱'이라 칭해 이 책에 나타냈다"며 "오래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2) 당대 최고 장인이 완성한 빈티지 도자기…백마크·디자인엔 문화 코드 담겨
"원래 수집에 취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앤티크 도자기를 접하게 됐는데 이건 언제 만들어졌고 이름은 뭘까, 어느 회사 제품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찾아보고 모으게 됐어요. 몇 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희 집에 방문한 사람 중에는 박물관급이라 말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웃음)." 서운희 도서출판 앤틱 대표는 '앤티크(앤틱, Antique) 도자기' 수집가다. 경북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서 대표는 금융기관 근무를 시작으로 커리어를 쌓았는데, 도자기나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앤티크 도자기를 수집하게 된 건 '앎의 즐거움'으로 시작됐다. 10여 년 전 앤티크 도자기를 우연히 접한 후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과거의 물건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금융가 일하다 수집가로 옛것서 새것 아는 재미 빠져 정보 찾고 모으다 책까지 내 명가 고유의 紋章 백마크 위조 구별하려 새기기 시작 제조사·시대별 다르게 표기 도자기 예술에 숨ㅅ은 역사 십자군 승전 700주년 접시나 청나라 영향 받은 디자인도도자기의 종주국은 중국이지만 그가 수집하는 앤티크 도자기는 주로 유럽에서 제조된 것들이다. '백마크'(Back mark)의 매력 때문이다. 오래된 도자기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문자나 숫자, 작은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백마크다. 유럽의 도자기 회사들은 도자기를 제조할 때마다 밑바닥에 상표인 백마크를 정교하게 새긴다. 17세기까지 유럽에는 토기나 도기 수준의 연질도만 있었는데, 1710년 작센 공국의 마이센(Meissen)에서 도기를 처음 생산했다. 마이센은 자기를 제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조품이나 열등한 모조품으로부터 자사 제품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깨닫고 진품을 나타내기 위해 마크 표시를 그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이후 백마크 표기는 유럽의 다른 도자기 제조사로도 이어졌다. 백마크는 제조 회사에 따라, 심지어는 같은 회사라도 제조 시기에 따라 다르게 표기된다. 영국 민턴(Minton)의 경우 1891년부터 1912년 사이 제조된 제품에는 기본 인쇄 마크에 'England'란 단어가 새겨져 있지만 이후 1950년까지는 'Made in England'라는 문구가 종종 추가된다. 서 대표는 이 점을 매력으로 꼽았다. "보통 오래된 도자기를 보면 예쁘다, 아름답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도자기마다, 심지어는 같은 제조 회사라도 시기에 따라 백마크 디자인이 다 달라요. 그런 새로운 정보들을 알아가는 게 정말 즐겁더라고요. 모르는 백마크는 알 때까지 찾아본다고 몇 달이 걸린 적도 있어요. 온·오프라인 서적을 모두 들여다봤죠." 앤티크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품이다. 장인들은 시대마다 고유한 스타일을 창출했는데, 접시에 담긴 그림이 당시 중요한 사건이나 문화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은 1888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기념접시를 발행하고 있는데, 한 해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나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접시 앞면에 쓰인 연도는 접시에 담긴 사실이 발생한 해를 의미한다. 그는 1919년 제조된 단네브로그(Dannebrog) 700주년 기념 접시로 설명했다. "하늘에는 덴마크 국기가 있고, 그 밑에는 군인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그림이죠. 1219년 십자군전쟁 때 하늘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붉은색 깃발이 덴마크 진지로 내려오면서 덴마크 군대가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붉은색 깃발을 단네브로그라 해요. 그래서 덴마크에서는 이 붉은 깃발을 축복으로 여겨 국기로 정하게 됐어요. 그 일의 700주년을 기념해 만든 접시예요. 앤티크 도자기를 통해 역사적 사건도 엿볼 수 있는 거죠."제조사에 따라 그 회사만의 고유한 패턴도 나타난다. 로얄 코펜하겐의 경우 독일 마이센에서 매각한 '블루 플루티드'가 있다. 중국의 청화백자를 참고해 디자인한 푸른 밀짚꽃 문양 패턴이다. 영국의 와일만(Wileman)과 쉘리(Shelley)는 굉장히 다양한 패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마리 패턴'이 유명하다. 18세기 초 영국이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비결을 알게 되자 일본 도자기의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다. 이마리는 일본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를 수출하는 아리타 인근 항구 이름이다. 와일만과 쉘리는 19~20세기 화려한 금색으로 칠해진 붉은 주황색 장식과 함께 언더 글레이즈를 사용한 이마리 스타일로 화려한 패턴을 만들었다.이런 재미로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한 도자기들은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집을 장식하고 있다. 거실부터 주방, 방 안까지 다양한 회사, 여러 패턴의 제품들이 진열돼 있다. 세계 3대 도자기인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을 비롯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도자기를 구하는 방법이 어렵지 않았냐고 물으니 최근 국내에서도 앤티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간편한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요즘은 판매 시스템이 잘돼 있는 것 같아요. 국내에서도 여러 앤티크 도자기 셀러들이 활동하고 계셔서 그분들을 통해 하나둘씩 구입했어요. 오프라인 매장도 꽤 있어요"라고 했다."정말 흥미롭죠.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저 혼자 알고 있는 게 아쉽더라고요." 서 대표는 그의 신간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를 펴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미 2021년 앤티크 도자기의 백마크에 관한 책을 발간했지만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필요성을 느껴서다. 그는 "처음 펴낸 책에는 백마크에 관한 내용만 있었어요. 최근 앤티크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보다 다양하게 쓰면 앤티크를 처음 접하는 분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어요. 좋은 건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라며 웃었다. 글=조현희기자·사진=도서출판 앤틱서운희 대표가 소장 중인 영국 로졸 웨어의 도자기.로얄 덜튼의 셰익스피어 시리즈 제품들. 도자기에 표현된 셰익스피어.아래는 도자기로, 뚜껑은 실버 플레이트 혹은 니켈 등으로 만든 비스킷 배럴.영국 웰링턴 차이나 찻잔 세트. 그래픽=장수현기자서운희 대표의 자택. 세계 3대 앤티크 회사의 도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앤티크 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앤티크의 세계(1) 컬렉터 서운희씨가 말하는 빈티지 도자기 수집의 미학
수집은 아주 재미있는 취미다. 다양한 물건과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쾌락과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에 따라서는 어떤 문화나 역사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수집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물건 중 하나가 '앤티크(앤틱, Antique)'다. 앤티크란 형용사로 옛날의, 고대의, 고풍의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명사로 치면 골동품이다.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 된 물건을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쓰임새가 넓어져 100년이 지나지 않아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 오래된 물건이면 앤티크로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앤티크 수집의 가장 큰 매력은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앤티크는 현대 제품들과는 다른 미(美)를 갖고 있어 매력적인데, 예스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희소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잘 살펴보면 물건이 만들어진 시대·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앤티크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제조된다. 특히 유럽의 왕조와 귀족들이 즐겨 쓰던 것들은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것이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은 1888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기념접시를 발행하고 있다. 접시 앞면에 쓰인 연도는 접시에 담긴 중요한 사실이 발생한 해다. 매년 특정한 사건이나 행사 등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다.이처럼 앤티크 수집은 단순히 독특한 물건을 모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앎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같은 매력으로 유럽에서 앤티크 수집은 일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취미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 생소한 문화로 여겨진다. 앤티크에 대한 정보도 그리 많지 않아 입문의 벽도 존재한다. 이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던 중 최근 앤티크 관련 책이 나왔다. '서운희의 앤틱(엔틱) 지식'과 '서운희의 앤틱(엔틱) 정보'다. 두 책은 상호 연결돼 있는 책으로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풍부한 정보들이 체계적으로 담긴 백과사전이다.저자인 서운희 도서출판 앤틱 대표는 10여 년 전 앤티크 도자기를 우연히 접하게 됐다가 '이건 언제 만들어졌지?' '이름은 뭐지?' '어느 회사 제품이지?' 등과 같은 궁금증을 갖고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집한 앤티크 도자기는 현재 셀 수 없을 만큼 모였다. 그는 앤티크 도자기에 대한 수요층이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처럼 궁금증을 갖고 앤티크 도자기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앤티크 전문 출판사를 차려 책을 발간했다. 2021년 12월에 펴낸 '서운희의 앤틱(엔틱) 백마크'가 첫 저서다. 앤티크 도자기의 백마크(밑바닥 상표)에 관한 책으로는 국내 최초다. 앤티크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할 정도로 첫 저서부터 반응이 좋았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요청도 줄이어 이번 신간 두 권을 펴내게 됐다고 한다.앤티크 도자기와 서 대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집에 방문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가득한 그의 집은 유럽 여러 회사에서 나온 오래된 도자기들로 채워진 '박물관'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매력적인 앤티크 도자기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최은지기자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대협 "법원 행태는 모순…정부 의대생 복귀 호소는 오만" 주장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정부, 대학 "2025학년도부터 의대 증원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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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띠 5월 18일 ( 음 4월 11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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