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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철원 한탄강 잔도길…수직의 바위절벽 아슬아슬 물 위를 걷다
그게 우연이었을까. 드르니 게이트를 지나 드르니 쉼터에 섰을 때, 먼저 강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에 목젖이 꿈틀했다. 그런데 그 시각 어느 여행객 휴대폰에서 소녀 가수가 부르는 아버지의 강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아, 아버지 불러 봐도 대답 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는 너무 애절해 나의 감정에 시나브로 물결이 일었다. 그렇다. 내가 나의 아버지를 불러 보아도 이미 강물처럼 흘러가신 분이 대답할 리가 없고, 오늘만은 왠지 내 자녀가 나를 아버지 하고 부를지라도 나는 대답 없이 흘러가는 저 강처럼 흘러, 아버지의 강이 되고 싶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비애의 감정에 애면글면 빠져드는지. 드르니 쉼터의 드르니는 '들르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후삼국시대, 태봉국을 세운 궁예왕이 왕건의 반란으로 쫓길 당시 이곳에 들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탄강과 자연이 빚은 수직의 경이로운 바위 절벽, 그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청록빛 강물은 마구 탄성을 지르게 한다.절벽 중간 위태롭게 매달린 잔도길인기 명소 급부상한 철원의 야심작철원군이 야심작으로 만든 한탄강 잔도길은 어느 날부터 인기 명소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잔도길은 국민의 시선을 끌어모으면서 관광 특수효과를 단단히 누리고 있다. 말하자면 국내 최고 수준의 명품 코스, 핫플레이스가 된 셈이다. 깎아지른 듯 아름다운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만든 잔도길은 첫걸음부터 아찔하다. 한발 한발 걸을수록 오금이 저리고 스릴이 넘치며 짜릿하게 소름이 돋는다. 낭떠러지 아래는 청록색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강은 또 수직 절벽 협곡과 앙상블을 이루며 굽이굽이 흘러간다. 한 번씩 내려 볼 때마다 다리가 풀리고 후들거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과 협곡 주상절리가 보이고 몸은 허공을 헤엄치는 것 같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기도 한다. 그러나 잔도는 기대 이상이어서 나의 눈길은 나의 내면 어딘가의 기쁨을 쳐다보기도 했다. 맷돌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는 맷돌랑 쉼터를 쉬지 않고 지난다. 오고 가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이젠 잔도길이 겁나지 않고 오히려 희열과 두근거림을 준다. 이어지는 절벽과 밝은색 화강암 위에 검회색 주상절리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고 마그마가 화강암 틈새를 밀고 들어온 자국인 풀줄기 모양의 '암맥'도 관찰된다.민출랑 쉼터에서 잠시 쉰다. 민출랑은 전라도 사투리로 깎아지른 절벽을 뜻하는데, 한탄강 민출랑은 너럭바위 끝부분 경사진 여울 일대를 말한다. 근데 왜 전라도 사투리가 여기에 어김없이 접을 붙였을까. 도무지 아리송하다. 절벽을 따라 깔린 현무암을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귓등에서 말발굽 소리를 낸다. 너른 바위 쉼터를 지나고, 출렁다리인 주상절리교를 건너자 거기에 드르니 스카이 전망대가 나타난다. 반원의 돌출부가 강 쪽을 점유해 시야가 확 트이며, 유장한 한탄강이 두 눈 속으로 흘러간다. 몸은 허공에 떠 있다. 우리의 생명도 그 기원이 허공이며 하늘이었다. 우주는 텅 빈 무에서 출발, 유가 되었다가 종국엔 무로 돌아간다. 허공은 우주의 알파요 오메가다. 돌단풍교와 쉼터는 그냥 지나친다. 철없이 피는 돌단풍의 유혹에 넘어가 앉게 되면 눈자위가 울긋불긋 물들 것만 같다. 비록 천천히 걷지만 금세 돌아나가고 하는 협곡의 에움길 잔도에 야릇한 통쾌감이 발바닥을 자극한다.반원 돌출형태 드르니스카이전망대바닥 투명유리 한탄강전망대 '아찔'현무암교를 거쳐 동주 황벽 쉼터에 앉는다. 저쪽 편의 밝은 황톳빛 주상절리를 감상할 수 있다. 원래는 아래쪽은 검은색, 위쪽은 황토색과 암갈색이지만 주상절리 벽은 햇빛에 의해 황톳빛으로 물든다. 동주는 철원의 옛 명칭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걷는다. 이제 주상절리 길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인 한탄강 스카이 전망대에 선다. 반원형으로 돌출된 잔도길을 덧대 붙이고, 바닥은 모두 투명한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강심장을 가진 사람도 전신이 얼어붙는다. 씨암탉 걸음으로 아기작 아기작 걷는다. 천연으로 만들어진 하얀 모래밭에 깎아내린 것 같은 절벽. 급류의 물살이 만든 기묘한 화강암 바위들의 풍경은 볼수록 신비하다. 여행객들이 환호를 터뜨린다. 돌아보면 약 40m쯤 절벽 중간에 위태롭게 매달린 하늘색 잔도가 협곡 절벽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감탄 또 감탄이다. 특히 발밑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그물 구조물을 지날 때는 그 아래 흐르는 청록색 강물로 간담이 서늘하다. 이렇게 짜릿한 탐험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트레킹에서 누리는 경험이다. 우리는 그 찬란한 물질문명 때문에 온갖 사람들이 영적으로 다 잠을 자며 꿈속,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 속에서 걷고 나의 실존을 확인한다. 아 한탄강, 한탄강은 금강산 아래쪽 추가령 지구대에서 발원하여 평강, 철원, 연천 전곡리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총길이 136㎞의 제법 긴 강이다. 본래 이름은 '한 여울', 즉 큰 여울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한탄강(漢灘江)으로 부르게 됐다. 그러나 이 한탄강은 궁예왕이 철원 땅을 후고구려의 도읍으로 삼으면서 제빛을 발산하는가 싶더니,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하던 그가 부하 왕건에게 쫓기어 이 강을 건너면서 눈물 어린 한탄(恨嘆)을 하였다고 한탄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남북 분단의 상처와 아픔이 한탄강이라는 어감으로 상징화되고, 철원과 더불어 비운의 역사를 어부바하여 흐른다.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2번 홀교와 쪽빛소 쉼터도 지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잔도와 더불어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바위그늘교와 샘소쉼터도 지나간다. 나는 걸을 때만 나의 꿈에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꿈은 항상 나의 발과 함께 움직이고 뻗어간다. 내 다리가 움직이면 나의 시간도 꿈으로 바뀌어 흐른다. 마치 저 한탄강처럼. 트레킹은 가장 자유로운 나로 돌아가 모태의(母胎)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다.주상절리 협곡·청록빛 강물 감탄사한발한발 걸을수록 허공에 있는 듯수평절리교도 지난다. 철원 한탄강에는 화강암이 가로로 깨진 수평절리가 많다. 땅속에 화강암이 숨겨져 있다가, 화강암을 덮은 다른 암석이 제거되면, 화강암이 재바르게 드러난다. 이때 화강암의 약한 곳이 깨지면서 생기는 것이 수평 절리다. 화강암교를 건넌다. 예로부터 한탄강 여울의 소리가 가마솥 끊는 물소리 같다 하여 구리소라고 불리는 구리소 쉼터에서 잠시 멈춰 선다. 트레킹은 자신만의 처용무다. 인간의 역사는 걸으면서 출발했다. 말하자면 '호모 워크스(Homo walkers)'다. 기술의 발달은 걷기의 퇴행을 가져왔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은 걸으면서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정말 어딘가에서 즐기기보다 걷기 위해서 여행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가 좀 더 걸어 나가 순담 스카이 전망대에 도착한다. 이제 날머리 순담 게이트는 지척이다. 여기의 경치는 별다르고 황홀한 절경이다. 휘어지는 절벽과 기묘한 형상의 기암괴석들 사이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살이 더 빨라지는 곳이 '강의 허파'로 불리는 여울이며 산소를 많이 생산, 물을 정화시킨다고 한다. 나는 종일 걷고 또 꿈속 같은 잔도길을 발이 아프도록 다녔다. 오늘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너와 나 우리는 함께 걸었다.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삼라만상이 하나이자 불멸이란 것을. 그리고 걸을 때 정신과 영혼이 생동하는 자유로운 자기가 된다는 것을.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 사진작가☞주소 : 강원도 철원군 갈마읍 군탄리 산 174-3 드르니 주차장☞트레킹 코스 : 드르니 게이트 - 드르니 스카이 전망대 - 철원 한탄강 스카이 전망대 - 순담 스카이 전망대 - 순담 게이트한탄강 직벽의 주상절리길.쉼터에서 본 한탄강의 비경.한탄강 직벽의 수려한 비경.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주말&여행] 경북 칠곡군 낙동강 역사 너울길…낙동강 물길따라 4.5㎞…6·25 호국정신이 숨쉰다
왜관읍 서쪽으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른다. 강물은 단단해 보였다. 수면을 뒤덮은 잔물결들은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엎드려 새겨 넣은 각인처럼 느껴졌다. 종일 미세먼지 매우 나쁨, 초미세먼지 나쁨을 기록한 날이지만 강변은 숨쉬기에 썩 괜찮았고 새순이 잔뜩 돋아난 수목의 터널에서는 새소리가 청아했다.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은 과거와 점점 멀어지는 것인데, 거리감과 상기 사이에는 알지 못할 어떤 미덕이 있어 덕분에 오늘 걸음은 평안하다.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오토캠핑장~제2 왜관교 구간 조성6·25전쟁때 끊겼던 '호국의 다리'·자매도시 공원 등 지나강변 절벽 버드나무터널·메타세쿼이아 흙길도 아름다워◆낙동강 역사 너울길 약목면 관호리 관호산성 아래 오토캠핑장에서부터 기산면 죽전리 제2 왜관교까지 4.5㎞ 구간을 '낙동강 역사 너울길'이라 한다. 칠곡군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구 왜관철교 상·하류 일대 조성한 길이다. 캠핑장을 지나 칠곡보에서 잠시 멈춘다. 공도교 양쪽에 사각의 액자와 하트 액자 포토존이 있다. 액자 속으로 강 건너 풍경이 들어찬다. 태극기가 높이 휘날리는 건물은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이다. 수년 전 기념관의 입체영상관에서 본 328고지 마지막 전투 영상은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아 있다. 그 옆에 가로로 긴 건물은 칠곡보 통합관리센터, 센터 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은 향사아트센터다. 칠곡 출신 국가무형문화재로 국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향사 박귀희 명창의 호를 따서 만든 지역 최초 국악 공연장이다. 뒤돌아보면 관호2리 마을 뒤로 해발 110m의 백포산(栢浦山)이 아담하게 솟아 있다. 저곳에 삼국시대의 성곽인 관호산성이 있다. 본래 이름은 백포산성이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며 관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의 정자는 '관평루'다.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평화를 바라본다'는 의미다. 칠곡보에서 산을 올라 내성 석축을 따라 걷는 '관호산성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관호2리는 구왜관(舊倭館)마을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일본인 사신이나 교역자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다. 1905년 일본인들이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관호리의 왜관에 역을 설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백포산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다는 이유로 강 건너 파미면 회동에 역을 설치하고 왜관역이라 했다. 현재의 왜관리 왜관역이다. 그때부터 관호리 왜관은 구 왜관이 되었다. 백포, 왜관, 관호, 관평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중첩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호는 '호수를 바라본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산 아래 낙동강은 정말 호수처럼 넓다. ◆칠곡보에서 왜관철교까지칠곡보에서 왜관철교까지는 강변서로 제방길이 뻗어있다. 벚나무 길이다. 낙동강 역사 너울길은 제방 아래 강변 들판의 산책로로 이어진다. 덩굴장미와 머루포도와 능소화가 차례로 연결된 긴 터널을 지나면 '자매도시 공원'이 펼쳐진다. 꽃 모양의 입체적 구릉이 산철쭉으로 뒤덮여 있고 황금사철과 회양목이 꽃잎 하나하나의 경계선을 부드럽게 그린다. 초봄에는 칠곡의 꽃인 매화가 피었다 졌고, 머지않아 작약이 만발하겠고, 가을에는 구절초가 피어나겠다. 칠곡군의 자매도시는 중국 제원시와 전북 완주군이다. 각각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고 상징적인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완주의 봉동이 우리나라 최초의 생강 재배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왜관철교 아래를 지난다. 주변은 공사를 하는 모양으로 약간 어수선하다. 점심 식사를 막 마친 인부들이 저마다의 휴식에 빠져 있다. 기차가 긴 여진을 남기며 지나간다. 강변에는 유채꽃이 조금, 제비꽃은 카펫으로, 거대한 두 그루의 버드나무는 신선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왜관교 아래를 지난다. 사철나무와 대나무가 울타리를 이룬 깨끗한 길이 이어진다. 사철나무 너머 오렌지 빛깔의 건물은 경북도와 칠곡군의 청년연합회 건물이다. 그 옆은 강 쪽으로 테라스가 있는 카페다. 그리고 바로 구 왜관철교가 나타난다. ◆호국의 다리에서 제2 왜관교까지 구 왜관철교는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교다. 1941년에 복선인 왜관철교가 가설되면서 이 다리는 경부선 국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유엔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 다리의 경간 1개를 폭파했다. 이를 계기로 유엔군은 낙동강 전투에서 승리했고 북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구 왜관철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의 상징물로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1979년 안전상의 문제로 전면 통제되기도 했지만 1993년 이후 인도교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 호국의 다리는 공사 중이다. 2025년 8월까지 호국의 다리 일원에 호국평화테마파크를 조성할 예정이다. 철교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탑은 왜관지구전승비다. 탑 일대는 '애국동산'으로 칠곡 출신 애국지사들의 위령비와 추모비, 기념비, 제단 등이 모여 있다. 애국동산은 자고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산 정상에는 평화 전망대와 한미전몰장병 추모비가 있다. 오늘 전망대는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강변 절벽에 버드나무가 터널을 이룬 아름다운 길을 지난다. 오직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청아하다. 대나무 숲을 지난다. 캐주얼한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를 스친다. 바짓단을 둥둥 걷어 올린 그는 맨발이다. 신발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죽전리에 들어선 듯하다. 물소리 들린다. 좁은 계류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제 절벽은 조금씩 누워 구릉지와 들판으로 펼쳐진다. 국립환경과학원 수질측정센터를 지나 하우스 밭과 대단한 소나무를 가진 과수원을 지나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서 있는 들판의 흙길로 나아간다. 길가에는 하얀 모래별꽃, 보랏빛의 갈퀴나물, 연보랏빛 주름잎꽃, 청보라 빛의 큰봄까치꽃이 한창이다. 가장 많은 것은 샛노란 고들빼기와 애기똥풀이다. 제방 위로 몇 채의 집들이 보인다. 비스듬한 사면을 한 여인이 강아지와 함께 내려와 강변의 벤치에 앉는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샛길을 여러 번 보았다. 관호에서 두어 번, 죽전에서 두세 번 정도였던 듯하다. 수트의 남자도 그렇게 강변으로 내려섰겠지. 강마을 사람들은 언제든 아주 빨리 강변에 닿을 수 있구나. 멀리서 한 여인이 걸어온다. 멀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맨발이다. 오른손에 쥔 신발이 달랑거린다. 그녀를 지나쳐 메타세쿼이아 길의 끝에서 뒤돌아선다. 돌아가는 길, 오늘의 인상과 추념 사이에는 어떤 알지 못할 미덕이 있어 덕분에 걸음이 평안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경부고속도로 대전방향 왜관IC로 나간다. 톨게이트 지나 오른쪽 왜관방향으로 나가 직진, 매원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한다. 제2 왜관교 건너 우회전해 직진, 관호오거리에서 12방향으로 직진해 관호교차로에서 오른쪽 강변서로로 나가 직진한다. 관호2리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뒤 우회전하면 칠곡보 오토캠핑장(관호산성 둘레길 입구)이다. 캠핑장 맞은편에 주차장이 있고, 강변서로를 따라가면 칠곡보 우안 부근과 왜관철교 아래쪽에도 주차 공간이 있다. 관호오거리에서 1시 방향으로 나가면 곧바로 왜관철교 아래 주차장에 닿는다. 제2 왜관교 아래 강나루 체육공원에서 출발해도 좋다.구 왜관철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의 상징물로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다리 건너 자고산 자락에 애국동산이 자리한다.칠곡보 공도교 양쪽에 액자 포토존이 있다. 강 건너에 칠곡 호국평화기념관, 칠곡보 통합관리센터, 향사아트센터 등이 자리한다.강변 절벽에 버드나무가 터널을 이룬 아름다운 길을 지난다. 오직 바람소리, 새소리만이 청아하다.자매도시 공원 내의 중국 제원시 공원.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조형물이 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세계 홀리는 'K-라면' (2) 중국서 밀가루 늘여 만든 납면, 일본 인스턴트 라멘 거쳐 한국의 라면으로
도약기중일전쟁 비상식량이던 납면日사업가 치킨라멘으로 개발삼양식품이 제조기술 배워와1963년 한국 최초 라면 선보여황금기1980년대 신라면·너구리 등장사발면·짜파게티 출시 다양화전성기유튜브 '매운맛 챌린지' 열풍한류 타고 수출 효자품목 등극 ◆中→日→韓…삼양의 '치킨라면'이 시초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중국 북방에서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잡아 늘여 만든 납면이 중국군의 비상 식량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일본으로 전파됐다.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인 안도모모후쿠가 1958년 미군이 구호품으로 지급한 밀가루를 활용해 개발한 '치킨라멘'이 오늘날 인스턴트 라면의 시작이다.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생산된 것은 1963년 9월15일이다.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초 전중윤 회장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봤고,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5만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100g에 10원이었는데, 커피 한 잔이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그러나 밥과 국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은 초기에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1965년 나온 정부의 혼분식(混粉食)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이 정책은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를 줄이고 혼식과 분식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이때부터 라면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음식으로 다가왔고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해 롯데공업(현 농심)에서도 롯데라면을 생산했다. 1966년 연 240만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개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파병 장병들의 보급품으로 납품되기도 했다. 삼양식품은 1963년 총 42명의 종업원만이 몸담고 있었지만, 약 10년 후인 1970년 중반엔 무려 5천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거대 제조사로 성장했다.◆황금기 도약…신라면·짜파게티의 등장1970년대가 라면의 도약기였다면 1980년대는 황금기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찾는 상품 다수가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절대빈곤 해소를 위한 기업인들의 의지, 급속한 경제발전 등으로 라면 수요 증가에 탄력이 더해지면서 제조사들은 새로운 상품을 계속 출시하며 제품의 다종화에 주력했다. 삼양라면은 1980년대 초반에만 '뽀빠이면' '귀빈면' '떡라면' '라면1번지' 등을 선보였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의 '라면의 기원과 국내 보급의 역사'에 따르면, 이에 대항하는 농심은 기념비적인 제품을 출시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981년에 시판되기 시작한 '사발면'으로, 이는 용기를 개봉한 이후 물을 넣어 즉석라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조된 제품이다. 이어 1982년에는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 1983년엔 '안성탕면', 1984년엔 '짜파게티', 1986년엔 '신라면'을 출시했다. 특히 신라면은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을 받는 제품으로 2020년 국내 라면시장 전체 매출의 15.97% 규모로 1위다.스포츠는 한국인의 라면 사랑에 더욱 불을 붙였다. 1984년 LA올림픽 1호 금메달리스트 레슬링의 김원기는 "조금이라도 양을 늘리려고 일부러 라면을 불려서 먹었다"라고 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 사상 최초의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회자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관중석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도 세계에 중계되며 한국 컵라면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형 컵라면은 1972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봉지라면보다 두 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는 부진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 이후 컵라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한류 열풍…미디어 통해 세계 각지로 쏙쏙21세기 들어 세계화가 본격화된 가운데 한국의 라면은 'K-푸드'가 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난 12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우리나라 농식품 수출액은 22억달러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라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30.1% 증가해 2억740만달러로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농심의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경우 2021년 처음으로 해외 매출(5천억원)이 국내 매출(4천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신라면 국내 매출은 5천억원(41%), 해외 매출은 7천100억원(59%)에 달한다.수출의 일등공신은 K-콘텐츠다. 전 세계 사람들이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 등의 OTT를 통해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접하면서 라면의 인기도 뜨거워졌다. K-라면은 단순히 제품만 알려지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레시피와 재미있게 먹는 법까지 더해져 널리 퍼졌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원 안〉는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라면에 채끝살 등을 얹은 요리인데, 인스턴트 라면도 고급 음식의 식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이를 통해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K-라면 레시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에는 '라면땅'(끓이지 않은 라면 면을 양념 스프에 묻힌 것)을 먹는 장면이 등장해 라면 과자에 대한 외국인들의 궁금증도 유발했다. '먹거리 경험 소비' 문화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SNS, 유튜브 등에서 매운 음식 먹기에 도전하는 소위 '매운맛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매운 라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삼양식품이 2012년 출시한 불닭볶음면은 국내외 매운 라면 열풍을 선풍적으로 일으킨 상품인데, 신라면보다 매워 매운 음식에 익숙한 한국인이 먹어도 땀을 흘릴 맛이다. 구독자 59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는 영국인 유튜버다. 2014년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 반응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는데, 외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불닭볶음면에 대한 궁금증, 시식 후기 등이 줄이었다. 이후 '불닭볶음면 먹기 챌린지'도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불닭볶음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출시 해인 2012년 1억원이 되지 않던 불닭브랜드 수출액은 꾸준히 상승해 지난해 6천800억원을 달성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올해도 해외법인을 중심으로 현지 영업마케팅을 강화하며 해외사업 성장세를 이어갈 계획"이라며 "수출 시장 다변화와 소스, 냉동식품 등으로의 수출 품목 확대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삼양식품 초기 광고. 창업주인 전중윤 회장은 국내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생각해 라면을 출시했다. 지난 12일 서울 성동구 플랜트란스에서 농심 짜파게티 출시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짜파게티 분식점' 팝업스토어에서 라면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컵라면을 구입한 관광객들. 591만 유튜버 '영국남자'가 2014년 올린 '런던의 불닭볶음면 도전' 영상.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세계 홀리는 'K-라면' (1)'꿀꿀이죽' 충격이 만든 라면, 이젠 전세계 홀리는 K-푸드
지난해 12월, BGF리테일은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KT&G 상상마당에 라면을 직접 제조해 먹을 수 있는 CU 편의점을 열었다. 일명 '라면 라이브러리'로 불리는 이곳은 외국 관광객을 포함해 2030세대가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유럽의 지붕, 만년설이 쌓인 스위스 융프라우산 정상에서 자주 보이는 라면이 있다. 농심 '신라면'의 컵라면이다. 한국인은 익숙한 냄새에, 외국인들은 매콤한 맛에 끌려 현지 매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신라면 컵라면은 이제 융프라우 관광객에게 필수 먹거리가 됐다.구독자 59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는 영국인 유튜버다. 2014년 삼양의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의 반응을 편집한 영상을 올렸는데, 외국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1천125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한국인에게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간편하고 싼데 맛까지 있다. 그래서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음식 중 하나다. 2022년 한국인의 연간 평균 라면 소비량은 77개라고 한다. 한 달에 평균 6개는 먹는 셈이다.한때 라면은 몸에 나쁜 음식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들의 수요 증가로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져 나쁜 이미지로만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좋은 재료와 영양소를 강조하는 제품도 출시되고 있다. 비건 라면인 애터미의 '감자라면'이 그 예다. 매운 음식 열풍으로 맵다고 유명한 삼양의 불닭볶음면에서 더 매워진 '핵불닭볶음면'도 나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출시 초기엔 '이걸 누가 먹나' 하는 소비자들의 궁금증이 있었지만, 이제는 '매운맛 덕후'면 너도나도 한 번씩 도전하고 있다.이런 라면은 중국에서 일본,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한국에선 1963년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치킨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기존에 라면은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소비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하지만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K-푸드인 라면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K-라면은 미국, 유럽, 중동, 남미 등 여러 지역 편의점, 슈퍼마켓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1분기 우리나라 농식품 수출액은 22억달러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라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30.1% 증가해 2억740만달러로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농심의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경우 2021년 처음으로 해외 매출(5천억원)이 국내 매출(4천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신라면 국내 매출은 5천억원(41%), 해외 매출은 7천100억원(59%)에 달한다.국내 식품기업들의 '라면 경쟁'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 각지를 사로잡기 위해서다. K-라면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을 방증한다. 이에 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K-라면이 이토록 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주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라면을 먹으면서 읽으면 재미는 배가 될 듯하다.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최은지기자
[주말&여행] 경남 거창 봄의 계곡…속삭이는 물소리 춤추는 수양버들 '봄의 왈츠'
감탄스러운 물소리다. 명랑하고 가볍고 피로를 모르는 물소리다. 찬연한 꽃들이다. 종달새처럼 땅에서 솟아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꽃들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분처럼 흩날린다. 참 웃음 헤픈 나날이다. 건계정 계곡 2㎞ 구간 벚나무 산책로거창장씨 문중서 1905년에 정자 세워병곡계곡은 옛날 보부상들 넘나들어월성계곡 사선대, 의친왕 이야기 간직 ◆건계정 계곡거창읍의 서쪽에 동산처럼 봉긋한 산이 거창의 진산이라는 건흥산이다. 꼭대기에는 과거 삼국이 치열하게 싸울 때 쌓았다는 거열산성이 있어 일대는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덕유산의 여러 물줄기가 하나 된 위천이 마리면을 거쳐 거창읍 건흥산의 남쪽 아래를 흐르는데 그 천변에 건계정(建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를 중심으로 약 2㎞ 구간을 건계정 계곡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벚나무 산책로가 길고 지금 이 길은 벚꽃 천지다. 산자락에는 몇 그루 개살구나무가 분홍 꽃을 피웠고, 천변에는 노란 개나리가 한 움큼, 길섶에는 짙은 자주색의 꽃잔디가 군데군데 도드라진다. 일대는 최근에 정비되었는지 아직 여기저기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계곡의 저 끝에는 거창읍의 아파트가 자글자글 모여 있다. 그들은 모두 발꿈치를 힘껏 치켜들고 부럽게, 그립게, 이곳을 바라보는 듯하다.건계정은 벚나무 산책로의 상류에 위치한다. 목재 데크 산책로를 따라 물레방아를 지나 산길을 오르내리며 갈 수도 있고, 도로를 따라 올라가 건계정교를 건너 물가의 식당을 거쳐서 갈 수도 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수양벚나무와 복사꽃을 헤쳐 열며 산책로를 따라간다. 물레방아의 홈통 아래를 통과한다. 나무바퀴를 돌리며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이 계곡물과 투덕대는 소리가 한동안 요란하다. 산길은 가파른 편이지만 그리 길지 않다. 식당 입구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낙화하고 있다. 건계정은 거창장씨(居昌章氏) 문중에서 1905년에 세웠다. 고려 충렬왕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시조 충헌공(忠獻公) 장종행(章宗行)과 공민왕 때 홍건적을 토벌하고 개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아림군(娥林君, 거창의 옛 이름)에 봉해진 아들 장두민(章斗民)을 추모하는 정자다. 건계정이라는 이름은 독립 운동가 곽종석(郭鍾錫)이 지었다고 한다. 장씨는 중국 남당(南唐) 때 건주자사(建州刺史)를 지낸 장자조(章仔釣)를 시조로 하는데, 건계정의 건(建)자는 선조의 고향인 건주 땅을 잊지 말라는 의미라 한다. 건계정교를 건너 정자의 맞은편 천변으로 간다. 잔뜩 물오른 연둣빛 수양버드나무 아래에서 건계정을 바라본다. 정자는 맑은 물 위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의 등 위에 올라서 있다. 바위 면에 수많은 각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정자로부터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산중턱의 건물은 장씨 재실이다. 벼랑에 진달래가 반짝거린다. 수양 버드나무 아래 노란 산괴불주머니는 자울자울 졸고 있다. 다리 옆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진다. 화르르 꽃비가 내린다. 꽃비 속에 하늘이 되롱거린다. ◆병곡계곡위천을 거슬러 간다. 수승대의 대단한 벚꽃을 지나 북상면 소재지의 소소한 벚꽃무리들도 지나 덕유산 자락으로 좀 더, 좀 더 가까이 달려간다. 그러다 홀린 듯 병곡길로 들어선다. 수양벚나무의 길이다. 수양벚나무의 분홍 꽃들로 몽롱한 길이다. 홀리어 투신하듯 달린다. 너무 흐드러진 것들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달려도 걷는 듯하고 걸어도 나는 듯하고 또 내 무릎이나 팔꿈치 따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의 초입부터 내내 많은 사람들이 걷는 듯, 나는 듯, 꽃 속을 배회하고 있다.덕유산 동엽령에서 흘러내린 분계천과 남덕유산 삿갓골에서 흘러온 월성천이 농산리 농산교에서 만나 위천이 되는데 병곡길은 분계천과 함께 흐른다. 길 따라 천을 거슬러 병곡리 가곡마을, 장암마을, 시항마을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병곡마을이 자리한다. 해발 500m에 자리한 병곡마을은 덕유산 아래 첫 마을이라 한다. 서쪽의 산수리 계곡과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 하여 병곡(幷谷)이라 하는데 훨씬 오래된 이름은 '빙기실'이다. 그래서 분계천 골짜기를 병곡계곡 또는 빙기실 계곡이라고 부른다. 1천m가 훌쩍 넘는 동엽령은 예부터 전북 진안으로 통하는 영호남 사이의 큰 장삿길이었다. 동엽령을 넘나드는 보부상들은 빙기실 계곡을 오르내리며 빙기실 마을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월성계곡빙기실 마을 끝에서 병곡길은 산수병곡길이 되어 남향한다. 길은 산수리 중심마을을 지나면서 산수천과 함께 흘러 덕유월성길의 산수교 아래에서 월성천과 하나 된다.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5.5㎞의 계곡이 월성계곡이다. 월성(月星)이라는 이름은 계곡 상류에 위치한 월성마을에서 왔는데 마을 남쪽 월봉산(月峰山)의 옛 이름인 월성산(月星山)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농산교에서 출발하면 창선리 지나 산수교를 건너 월성리로 향하게 된다. 월성계곡은 거대한 산세에 둘러싸여 있다. 사방으로 1천m가 넘는 봉우리의 연속이다. 수량은 풍부하고 화강암 바위와 벼랑을 끼고 도는 물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월성계곡 역시 분홍의 수양벚나무로 가득하다. 갓 오른 연둣빛 새순들 사이 하얀 벚꽃과 조팝꽃과 돌배나무 꽃도 늘비하다. 월성천 물길은 서출동류(西出東流)한다. 서쪽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풍수에서는 명당의 한 요소로 여긴다. 월성계곡에 '서출동류 물길 트레킹 길'이 있다. 산수교에서 월성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 월성리 황점마을까지 5.9㎞의 길이다. 그 길에 훌쩍 솟구친 벚나무 오솔길도 있고, 고목의 솔숲도 있고, 월성마을 월성 숲도 있고, 제법 넉넉한 산골 분지의 밭도 있고, 네 명의 신선이 놀다 갔다는 사선대(四仙臺)도 있다. 황점마을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선대에서 오래 머문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널브러진 평상들도 싫지 않다. 1909년, 의친왕 이강이 거창 위천면 출신의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청년들과 만나 사선대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었다고 한다. 정태균은 1907년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여 다양한 직책을 맡고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사선대에 진달래가 피었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꽃이 핀 것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모든 꽃 지는 시간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Tip대구광주고속도로 거창IC로 나와 우회전해 직진, 회전교차로에서 1시 방향으로 나가 직진, 중앙교사거리 회전교차로에서 9시 방향으로 나가 위천 따라 계속 직진한다. 절부사거리 회전교차로에서 12방향으로 나가자마자 오른쪽 거안로로 빠져나가 직진하면 산성교 앞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는 무료다. 건계정 산책로 끝 송정교 아래에도 주차공간이 있다. 절부사거리에서 거열교를 건너 거열산성 이정표를 따라가거나 거함대로에서 송정교 건너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거안로를 타고 계속 직진하다 마리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 장풍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수승대를 스쳐 직진한다. 북상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해 37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농산교 지나 우회전해 들어가면 병곡계곡, 37번 지방도로 계속 직진하면 월성계곡이다.건계정은 위천의 맑은 물에 꼬리를 담그고 거열산성을 향해 기어오르는 거북바위의 등 위에 올라서 있다. 산중턱의 건물은 장씨 재실이다.덕유산에서 발원한 분계천 골짜기를 병곡 또는 빙기실 계곡이라 부른다. 길 따라 이어지는 수양벚꽃의 행렬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건계정을 중심으로 약 2㎞ 구간을 건계정 계곡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벚나무 산책로가 길고 지금 이 길은 벚꽃 천지다.해발 500m에 자리한 병곡마을은 덕유산 아래 첫 마을이라 한다. 서쪽의 산수리 계곡과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 하여 병곡이라 하는데 훨씬 오래된 이름은 '빙기실'이다월성계곡의 서출동류 물길 트레킹 길은 산수교에서 황점마을까지 5.9㎞의 길이다. 훌쩍 높은 벚나무 아래 트레킹 길이 보인다.네 명의 신선이 놀다갔다는 사선대. 의친왕은 사선대 일대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었다고 한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봄날, 옛 그림 속 노승을 찾아서
햇살 한 줌이 새순에 닿는다.햇살이 이불 위에 모여 겨울을 털어낸다.식물에도 손길이 뻗었다.생명을 움트게 한다.평온한 봄날이다.해바라기하는 꽃나무 곁에서차를 마신다.나른해진다.금방 꿈결로 접어든다.멀리 따스한 햇살 아래 잠 든 노승이 보인다.그도 나처럼 꿈속일까.도인을 찾아서 조선시대에 유행한 선승화(禪僧畵) 속으로 들어간다.◆낮잠 든 노승과 이 잡는 노승낮잠에 빠진 스님을 그린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은 차비대령화원을 지낸 중인 출신이다. 그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문하에서 남종문인화풍을 받아들였지만 풍속화의 마지막 전통을 이었다. 그의 '오수삼매(午睡三昧)'는 한 명의 인물이 화면을 장악한 선승화이다. 주름진 옷 선이 꿈틀거리는 용 같다. 마치 도를 가슴에 품은 스님이 중생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듯하다. 화가는 질문에 답을 하듯 '오수삼매'를 그려 보인다.한낮 햇살 아래 노승이 무릎을 세운 채 잠에 들었다. 성근 짚신을 신은 스님의 맨발이 처연하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얼굴을 묻은 자세가 엄숙하다. 짓눌린 높은 콧대에 감은 눈, 검은 눈썹, 반듯한 이마가 수려하고, 주름진 얼굴에서 연륜이 느껴진다. 깎은 머리가 희끗하다. 머리카락에서 깊은 도력이 묻어난다. 가사 아래 드러난 목덜미가 꿋꿋하다. 곧고 건조한 필선으로 옷깃을 그렸다. 웅크린 어깨에는 강한 먹을 가했고, 풀어헤친 장삼은 농담에 변화를 주었다. 옷 주름이 날개를 접은 천사의 폼이다.햇살이 기운다. 깊은 잠은 바람 소리, 새소리도 멀리한다. 꿈속을 거닐다가 적정(寂靜)에 든 노승은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환한 가슴을 열어 극락으로 들어가는 순간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다. '이' 때문이었다. 겨우내 입었던 장삼에 여러 마리의 이가 기생하고 있었다. 노승은 옷 속에 있는 이를 잡아서 놓아주기로 한다. 스님이 옷을 풀어헤쳐 이를 잡는다. 이 광경을 기막히게 그린 화가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이다. 조영석은 서민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대부 화가이다. 그는 관념적인 산수화나 인물화를 그리기보다 현실생활에 종사하는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풍속화의 새 시대를 연 시대정신이 앞선 화가였다. 사대부의 신분이어서 그림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림의 재능에 순응하며 살았다. 노승을 그린 작품에는 그의 위트와 순발력이 넘친다. 특히 '이 잡는 노승'은 소나무 등걸에 앉아 이를 잡아서 놓아주는 노승의 여유로운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햇살이 좋아서 산책에 나선 노승은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소나무 등걸에 앉은 스님은 옷자락을 펼쳤다. 겨울 동안 동거한 제법 살이 오른 이를 이사 보내기 위해서다. 이를 잡으려는 노승과 잡히지 않으려는 이 사이의 결전이 시작되었다.노승의 예리한 눈빛에 이가 딱 걸린 모양이다. 스님은 입술을 앙다문 채 눈빛을 모은다. 이를 놓치지 않을 태세다. 이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스님의 손길에 백기를 든다. 성근 머리에 흰털이 길게 자란 눈썹, 이를 잡기 위해서 숨을 참은 듯 상기된 얼굴, 스님의 앉은 자세 등에서 조영석의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필선으로 옷 주름을 그렸고, 물기 가득한 담묵으로 나무를 표현했다. 사실적인 인물과 남종화풍의 소나무가 조화를 이룬 것은 조영석이기에 가능했다.◆호리병 속의 박쥐와 스님의 뒷모습뒷모습으로 화면을 압도하는 신선이 있다. 호리병을 들고 길을 가던 중 잠시 쉬려고 앉았다. 불현듯 호리병을 연다. 순간 호리병에서 박쥐가 날아간다. 이 모습을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1600~?)이 그림으로 남겼다. 바로 '박쥐를 날리는 신선'이다. 그는 선승화로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더 인기를 얻은 신필(神筆)로 불린 화가다. 대표작인 '달마도' 못지않게 빼어난, '박쥐를 날리는 신선'도 득의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신선과 박쥐가 등장하는 도석(道釋)인물화다. 왜 신선과 박쥐가 한 쌍을 이루었을까. 박쥐는 부처의 제자 16나한 중 열세 번째 인계타 존자의 전생 모습이다. 어느 날, 박쥐가 살고 있던 동굴에 지나가던 상인들이 추위를 피해서 들어왔다. 그중 한 상인이 불을 피우고 경전을 읽었다. 생솔가지가 타면서 동굴에 연기가 꽉 찼다. 죽음이 닥쳐와도 박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경 읽는 소리에 심취했다. 이후 박쥐는 죽어서 사람으로 환생했다. 불교에 귀의하여 생사를 초월한 아라한과를 얻었다. 박쥐는 호리병 속에 있다가 중생을 구제할 순간이 오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박쥐를 날리는 신선'은 박쥐가 전생(前生)을 벗고 아라한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신선 옆에 놓인 호리병에는 박쥐가 빠져나간 뒤 한줄기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신선은 가볍게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박쥐를 본다. 넓은 등을 보이며 앉은 신선은 더벅머리에 이마가 살짝 보인다. 화가의 표현력이 익살맞다. 살짝 드러난 이마가 빛을 발하며 신선의 앞모습을 유추케 한다. 대담한 필획으로 처리한 두꺼운 옷과 화가의 무르익은 텅 빈 배경에서 묘한 긴장감이 돈다. 왼쪽 위에 쓴 '연담'이 인물과 조화를 이룬다.호리병에서 빠져나간 박쥐는 아라한이 되어 한 사람의 죽음을 배웅하러 간다. 박쥐는 화가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화가는 죽음을 예감하고 혼신을 다해서 염불을 외운다. 꿈에서 깬 화가는 구름을 타고 아미타불 곁으로 가는 스님을 그린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염불서승(念佛西昇)'이다. 그의 바람은 그림처럼 스님이 되어 이생을 떠나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김홍도는 생을 반추해 본다. 화가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왕에게 총애도 받았다. 풍속화가로 알려졌지만 신선도를 잘 그려서 화원(畵員) 화가로 발탁되었다. 화려한 삶도 잠시 인생의 덧없음을 감지한다. 화가로서 마지막 힘을 다해 '염불서승'을 그린다. '염불서승'은 염불을 하며 서방 정토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김홍도는 아미타불을 친견하러 갈 때 입을 수의(壽衣)를 생전에 준비했다. 모시 천에 자신을 스님의 모습으로 그렸다. 옅은 하늘색 위에 구름이 물결을 이루며 떠 있다. 구름 위에는 연꽃이 만발하게 장식되어 있다. 승복 차림의 스님은 극락세계를 바라본다. 편안하게 앉은 자세가 평화롭다. 화가의 기량이 넘치는 필력을 가볍게 처리하여 머리와 귀, 꼿꼿한 목선, 갸름한 얼굴선이 해맑다. 눈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찍어 마치 부처의 눈에 점안(點眼) 의식을 한 것 같다. 김홍도만의 노련함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광배를 그려서 득도한 스님의 열반을 표시하였다. 왼쪽 위에는 '단로(檀老)'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그 아래 자신의 호를 새긴 두 개의 낙관을 두었다. 김홍도는 아마 '염불서승'의 수의를 입고 아미타불 곁으로 갔을 것이다.◆베란다의 아미타불오수를 즐긴 스님이 몸을 일으킨다. 덩달아 나도 잠을 깬다. 알싸한 꽃향기가 가득하다. 새가 우짖는다. 정신을 차리니 우리 집 베란다다. 차가 식었다. 꽃나무 위로 햇살이 찬란하다. 콩알만 한 연둣빛 점이 박힌 춘란은 생명을 틔우느라 분주하다. 40년 넘게 나와 함께한 관음죽이 등대처럼 서 있다. 관음죽은 그림 속의 노승이 애타게 찾던 나의 아미타불이다.김홍도, '염불서승', 모시에 옅은 채색. 20.8×28.7㎝. 유숙, '오수삼매', 종이에 수묵, 40.4x28㎝.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옅은 색, 23.9×17.3㎝. 김남희(화가)
[사람의 서재] 서머싯 몸
소설가로 더 유명하지만 극작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명작을 남기고 간 작가가 있다. 인생관을 강하고 명석한 문체로 묘사하고,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풍자 희극을 써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서머싯 몸이다.몸은 1874년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고문변호사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자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숙부 밑에서 자랐다. 한동안 독일에 유학한 뒤 런던의 한 의대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97년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했다. 1897년 의대를 졸업하고는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해 소설, 희곡을 계속 썼다. 1907~1908년 그의 희곡 4편이 런던 4곳의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되면서 이름을 떨쳤다.한국에서도 많이 읽히는 '인간의 굴레'는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몸이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이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 1919년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모티프를 따온 소설 '달과 6펜스'〈사진〉를 펴내면서 호평을 받고 작가로서 지위를 확립했다.그는 91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해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소설은 '케이크와 맥주'(1930), '면도날'(1944), 희곡은 '순환'(1921 초연), '높은 사람들'(1923), '서밍업'(1938)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2) "까칠하고 강인한 모습 선인장, 나와 비슷해 자주 그리죠"
"사실 제 그림은 한풀이 같은 거예요. 갑자기 제게 닥친 불행이 제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으니까요.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세상은 봄꽃으로 환한데 마음은 우울하다. 대구 대명동 한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이환상(47)씨를 만났다. 손목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 힘겹게 휠체어를 끌고 면회실로 왔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장기 입원 환자다.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이씨는 계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술을 가까이하며 살았다. 개인전도 열고, 대학 졸업 후에는 달서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도란도란 어울려 지냈다. 그런 건강한 청년에게 2018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다. 누나들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착한 막내아들에게 세계는 야속했다. 어느 날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일어서는데, 방 안에 있던 서랍장 손잡이에 몸이 부딪히면서 목뼈가 부러졌다. 수술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스스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는 5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원래 오른손잡이인데…왼쪽 팔로 그리고 있죠."감금 아닌 감금 생활은 그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병상 생활 중 한 번도 그린 적 없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라도 그려야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나에게 갤럭시탭을 사달라 부탁해 하나씩 그렸다.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지만, 왼쪽 어깨와 팔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어 손등에 펜을 고정해 그리고 있다. 원래 그는 오른손잡이다. 불편한 팔을 움직이다 보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8시간을 꼬박 그려야 한 개를 완성할 수 있다.그가 들고 온 갤럭시탭으로 이씨의 그림을 함께 봤다. 폴더에는 벌써 300개가 넘는 작품들이 있었다. 한(恨)과 동시에 삶에 대한 집념이 느껴졌다. 소재도 가족의 얼굴, 자화상, 가수, 사물, 풍경화 등 다양하다. 재미있게 본 방송 프로그램, 자주 듣는 음악 등이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그는 '싱어게인'을 즐겨 보는데, 방송을 보면서 '안개'라는 노래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원곡 가수인 정훈희를 그린 적이 있다. 이씨는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리는데, 많게는 하루에 5개가 올라올 때도 있다. 이제 그의 일상은 다시 그림 그리기가 된 것이다.송두리째 바뀐 일상서양화 전공한 후 개인전도서랍장 부딪혀 목뼈 부러져수술 받았지만 5년째 병상다시 화업이 생활로거동 가능한 왼팔에 펜 고정 태블릿 피시 사용 그림 그려그림으로 찾은 자유떠나고 싶어서… 욕하려고…기존 화풍 벗어나 소재 선택누나 "작은 전시 열어주고파""예전에 개인전을 준비할 때는 일관된 스타일, 화풍(畵風)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 그게 조금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있어요. 몸은 자유롭지 못 하지만 머리는 자유로워진 거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유난히 선인장 그림이 많아 이유를 물어보니 선인장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제가 좀 까칠해요.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을 쓰죠. 선인장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시만 있을 뿐이지, 사막에서도 오래 버티고 살아가니까. 그 모습이 제 모습 같아요." 신발, 발가락, 캐리어, 자동차 등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무의식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발과 발가락은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에 대한 답답함, 캐리어와 자동차는 어디로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제가 태국을 안 가봤거든요. 유튜브에서 여행 영상을 많이 봤는데 태국이 정말 가고 싶더라고요. 슬리퍼 신고 캐리어 몰고 태국에 가고 싶다, 이런 마음을 표현한 거죠."음식이 나오는 그림들도 있어 대뜸 물었다. "그림에 음식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네요. 이 가지는 뭔가요?"그는 욕하기 위해 그린 거라고 답했다. 설마 '가지가지' 한다는 뜻이냐며 다시 물으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조금 짜증 나는 일이 있었는데, 속으로 저 사람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며 그린 거〈원 안〉예요. 그래서 가지도 두 개죠." 그림을 하나씩 설명해주는 그의 눈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본인만의 철학이 보였다. "정말 단순하죠. 그림 그리고, 예술 한다고 해서 특별한 게 없어요. 억지로 특별하게 그리려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고 어렵기만 하죠. 가장 일상적인 게 특별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면회 시간이 끝나가 이씨의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씨는 "아직은 다른 계획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몸은 움직일 순 없지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데 작은 희망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이씨의 누나 이정임씨는 "동생만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지지만 늘 마음이 아프죠. 지난해 갤럭시탭을 구입해 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불편한 몸으로 누워서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동생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기회가 되면 작은 전시회라도 열어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그림. 선인장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의 신발 그림. 무의식 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가 노래 '안개'를 듣고 감명 받아 그린 원곡 가수 정훈희.
[위클리 키워드] 성인 10명 중 3명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 가장 고려"
사교육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위기 속에 학군, 학원가 등과 인접한 소위 '학세권' 단지에 대한 선호 현상이 높아지고 있다. 성인 10명 중 3명은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부동산R114는 지난달 21∼31일 전국 성인남녀 5천4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 집 마련에 대한 수요자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지난 8일 밝혔다. 그 결과 거주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지 요건으로 응답자의 29.7%가 '교육환경'을 꼽았다. 이어 교통(25.1%), 주거 쾌적성(21.2%), 편의시설(15.2%) 순으로 나타났다.아파트를 구입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는 40.6%가 브랜드를 꼽았다. 상위권 브랜드 아파트가 품질, 설계, 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하위권 브랜드 아파트보다 신뢰도가 높고 향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뒤로는 조경 및 커뮤니티 시설(20.8%), 단지 규모(19.9%), 실내 평면 구조(18.0%) 순으로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최은지기자
[동 추 거문고 이야기] 〈7〉줄 없는 거문고(상) 전원시인 도연명 '줄 없는 거문고' 뜯으며 마음의 소리 읊다
거문고(琴)는 도연명에서 유래한 '줄 없는 거문고', 즉 무현금(無絃琴)의 정신이 부각되면서 선비들로부터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되었다. 관리 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전원시인으로 살았던 도연명(365~427)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선비 시인이다. 도연명은 거문고를 사랑하고 연주하기도 했는데, 무현금도 곁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거래사'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긴 도연명에 대해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했다.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었다.대표작 '귀거래사' 남긴 中 대문호관직 내려놓고 전원에 묻혀 낭만 즐겨이백 등 후대 시인 그의 문장 추종'무현금' 바람직한 선비 표상으로◆도연명과 무현금이런 도연명의 삶을 기록한 양(梁)나라 소통(蕭統·501~531)의 '도연명전'은 '도연명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거문고를 늘 곁에 두고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마음을 기탁하곤 했다(淵明不解音律, 而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意)'라고 적고 있다.그리고 소통은 도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인격과 문학을 높게 평가했다. '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넘어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며, 아울러 굳은 정절로써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도연명 사후 60년 정도 지나서 심약(沈約)이 지은 '송서(宋書)' 중 '은일열전(隱逸列傳)'에서도 도연명의 무현금에 대해 거의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도연명은 그의 작품이나 기록을 보면, 거문고를 전혀 연주할 줄 몰랐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명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면서 이와 같이 표현한 후 무현금의 세계는 바람직한 선비를 표상하는 경지를 상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돌아가리라. 교제를 그만두고 어울림을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는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메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리면, 장차 서쪽 밭에서 농사일을 해야겠다. 혹은 천을 두른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숙하게 물고랑을 찾아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길의 언덕을 지난다.'그리고 51세에 자식들을 위해 쓴 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는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뜨기도 했단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거문고 연주를 배워 연주할 줄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며 즐기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세계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도연명은 줄 없는 거문고를 지니고 수시로 거기에 마음을 실어 달래면서, 스스로도 '다만 거문고가 지닌 아취를 알면 그뿐이지, 어찌 수고롭게 줄을 튕겨 소리를 낼 것인가(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거문고를 곁에 두고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소리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며 깨달음을 얻는 데 있었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은 도연명을 사모하는 친구를 위해 지어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漢)나라 제갈후(諸葛侯)가 은거할 때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불고 칠현금(七絃琴)을 연주하며 평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다가, 고기가 물을 만나듯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자 우뚝이 삼분천하(三分天下) 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 저 도연명 또한 제갈량을 사모한 자였기에 깊이 좋아하는 뜻을 자신의 이름에 드러내고서 마침내 무현금(無絃琴)을 두고 그에 회포를 부쳤으니, 아마도 제갈량과 같은 체(體)를 가지고 있었으나 쓰임이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 그대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도연명이 제갈량을 좋아했던 이유이니, 이것으로 충분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벗은 힘쓸지어다.'◆'무현금'에 대한 중국인들의 찬사도연명 별세 후 많은 이들이 그의 무현금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중 먼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0)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栗陽)'이다.'도연명은 날마다 취해서/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봄이 온 줄 모르네/ 꾸미지 않은 거문고엔 본래 줄이 없고/ 술을 거를 때는 칡베 두건을 쓰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쪽 창문 아래에서/ 스스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말하네/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 가까이 했던 벗을 한번 만나 볼는지' 도령(陶令)은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 벼슬을 지냈다 하여 칭한 말이다. 오류(五柳)는 도연명이 자신의 집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컬었던 데서 유래한다.그리고 도연명은 여름철 한가로울 때에 북쪽 창 아래에 눕고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희황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이자 상고 시대의 제왕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은 복희씨가 살던 상고 시대야말로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지던 때라 믿어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율리(栗里)는 도연명이 살던 마을로, 여기서는 시인의 친구가 현령으로 있는 율양을 이야기한다. 백거이(772~846)는 '구중유일사(丘中有一士)'라는 시를 남겼다. '산 속에 사는 한 선비(丘中有一士)/ 도를 지키며 오랜 세월 보냈네(守道歲月深)/ 걸을 때는 새끼로 맨 옷을 입고(行披帶索衣)/ 앉아서는 줄 없는 거문고 타네(坐拍無絃琴)/ 흐린 샘물은 마시지 않고(不飮濁泉水)/ 굽은 나무 그늘에는 쉬지를 않네(不息曲木陰)/ 티끌만큼이라도 의에 맞지 않으며(所逢苟非義)/ 천 냥의 황금도 흙보다 못하게 여기네(糞土千黃金)/ 마을 사람들 그 기풍 따르니(鄕人化其風)/ 난초 숲에 있는 듯 향기가 나네(薰如蘭在林)/ 지혜롭든 어리석든 강하든 약하든(智愚與强弱)/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일 없었네(不忍相欺侵)/ 그 선비 찾아가 보고 싶어(我欲訪其人)/ 만나러 가려 하다 다시 생각하네(將行復沈吟)/ 그 얼굴 꼭 봐야만 하겠는가(何必見其面)/ 그 마음 제대로 배우면 될 일이지(但在學其心)'이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연명 이후 많은 중국 선비들이 그의 무현금의 정신세계를 인용하는 가운데, 도연명의 삶을 사랑하며 이상적인 선비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선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그래픽=장수현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1) "손등으로 그린 그림, 내게 다시 자유 주네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이 중 무엇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모두 우리의 일부다. 이 감정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항상 함께한다.하지만 야속하게도 기쁨보단 슬픔이, 즐거움보단 노여움의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진다. 때론 그 슬픔과 고통,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되는 일을 겪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결코 간결하고 명쾌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겪어본 감정, 슬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또한 슬픔이다. 왜일까. 자신의 슬픔에는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는 그토록 무심하기 때문이다.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잘 우는 우리가, 소설 속 비극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떠올리면서 복수를 기획하기도 하는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는 무감각하다. 자신 말고 다른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사실이지만 인간이 그렇다.그래서 우리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슬픔에 대한 공부다.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그러면서 말한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고.최근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한 작가를 만났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채 5년째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만나기 전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괜한 질문으로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아닐지, 내 시선이 과하게 동정 어린 시선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중에도 상처를 다시 쑤시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그림에 신발과 발이 자주 등장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봤다가 금방 후회했다. 조금만 생각했다면 답을 알 수 있었을 텐데.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슬픔을 공부한다. 이 공부는 어렵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한평생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우리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도 하니까.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이야기를 전한다. 봄이 왔는데 병원에 있는 그의 세상이 너무 외롭고 차갑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나의 죄를 벌하며 그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길 바라본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자화상. 침대에 앉아 손등에 펜을 고정시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환상 작가의 갤럭시탭 그림 폴더. 300개가 넘는 그림이 들어 있다. 천윤자 시민기자
[주말&여행] 전북 무주 내도리 앞섬마을…육지 속 섬마을서 만날 '봄꽃'은 약속을 잊은 듯…
복사꽃을 보겠다고 앞섬으로 왔다. 마음만 급한 탓에 꽃은 한 송이도 피지 않았다. 구미와 김천을 지나는 동안 벚꽃은 8할 정도의 개화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추풍령을 넘으면서 기대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스산한 영동 땅을 가로지르며 무주로 들어서자 마음은 잔잔해졌다. 무주읍의 벚꽃은 6할 정도 피었다. 잠두마을의 잠두길 산벚은 조금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부남면 굴암리의 벚꽃길은 4할 정도 환했다. 벚꽃이 져야 복사꽃이 핀다. ◆무주읍 내도리 앞섬마을무주읍으로 향하는 압치재를 저 앞에 두고 내도로로 들어선다. 내도리(內島里)로의 진입이다. 내도리는 육지 속의 섬이라는 뜻이다. 진정 섬을 만나려면 얼마나 가야 하나. 한동안은 참으로 좁장한 산길이다. 연두로 물든 수목들과 부지런히 일구어 놓은 밭뙈기들의 너수룩한 모습에 신산한 마음이 빵긋해진다. 작은 방죽이 있다는 방죽안(지내)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 산속 깊이 자리한다는 산의마을 표석을 지난다. 내도초등학교와 학교 앞 삼거리의 내동슈퍼 사이를 통과하며 문 닫은 지 오래되어 속절없이 낡아가고 있는 둘의 얼굴을 본다. 고요하고 아기자기한 내동마을을 지나 제법 긴 길을 서서히 내려가면 뒷섬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드디어 금강이 나타난다. 후도교를 건너면 앞섬마을이다. 뒷섬은 후도(後島), 앞섬은 전도(前島) 마을이라고도 한다.앞섬마을 뒤편의 소나무 동산을 스친다. 수려한 소나무들과 함께 깨끗한 무덤 몇 기가 양지에 누워있다. 앞섬 체험센터를 지나고 복숭아집하장을 지나면 금강을 가로지르는 앞섬다리에 닿는다. 강 저편에 무주의 진산인 향로산(香爐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다리 건너 향로봉 서남자락의 수리재를 넘으면 바로 무주 읍내다. 앞섬다리 끝자락에 마을 표지석이 있다. 그 위로 마을 전체를 담은 커다란 사진이 빛바랜 채 걸려 있다. 사진은 금강이 마을을 크게 감싸고 돌아나가는 전형적인 물돌이 지형을 보여준다. 육지속의 섬이 맞다. 금강이 휘돌며 만들어 놓은 강변 땅이 모두 복숭아밭이다. 주민의 9할이 복숭아를 키운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홍도화 가로수 길'도 조성되어 있다. 마을 특산품인 복숭아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붉은 겹꽃이 화려한 홍도나무를 심어 놓았다. 복사꽃도 홍도화도 벚꽃이 져야 피어난다. 마을 표지석 맞은편 배 모양의 조형물에 시인 모윤숙의 시가 새겨져 있다. '세찬 물결 달려와/ 그 귀한 목숨을 삼켜 갔으니/ 엄마 엄마 숨차게 허덕이다가/ 애처롭게 사라져간 넋들이여…' 앞섬다리가 생기기 전 앞섬의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읍내 학교로 갔다. 1976년 6월8일 갑자기 폭우가 내렸고,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어난 강물에 배가 뒤집혔다. 이 사고로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대통령의 명으로 건설된 다리가 앞섬다리다. 곁에는 '수난한 곳'이라는 비석과 1963년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의 촬영지라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현장비가 있다. 신영균, 최은희, 허장강, 김희갑 등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금산 방우리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촬영의 대부분은 내도리에서 이뤄졌다고 한다.◆반딧불이 노는 꽃밭전도마을회관 바로 옆길로 빠져나가면 '앞섬강변길'이다. 강변 둑길을 따라가면 수력발전소의 낮은 보쯤부터 금산 방우리다. 여기서부터 거의 벼룻길이라 할 수 있는 좁은 도로가 마을까지 이어진다. 천천히 눈도 깜빡이지 말고 달려야 하는 길이다. 숨을 쉬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곡류하는 강변을 따라 늘어선 기암절벽의 산과 시퍼런 강물과 무심한 하늘뿐이다. 방우리에서 앞섬다리로 이어지는 금강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어름치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반딧불이 명멸하며 밤하늘을 수놓는 장면을 감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명소다. 사실 무주에서 반딧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구천동 계곡에서도, 반디 랜드가 있는 남대천에서도, 칠연계곡 아래에도 반딧불이가 출몰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이 내도리 앞섬다리 부근이라 한다. 앞섬 강변에 아주 너른 꽃밭이 있다. '무주 아일랜드 생태 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꽃 모양으로 구획을 나눈 꽃밭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핀다. 샤스타데이지, 펜스테몬, 꽃범의 꼬리, 부채붓꽃, 아스타, 수국, 에키네시아로즈, 청화쑥부쟁이, 핑키윙키 등 22가지 꽃들이 식재되어 있다. 여름이면 늪지에 노랑어리연이 피어난다. 가을이면 목교 주변 수로 가에 차새풀과 구절초, 수크령, 가는 억새, 꿩의 깃 햇살 등이 피어난다. 지금, 맞은편 산자락에 진분홍 진달래가 파르르 빛을 낸다. ◆질마바위와 '맘 새김 길' 앞섬과 뒷섬을 잇는 후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강변을 따라 좁은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자줏빛 광대나물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 있다. 다른 꽃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들이 피지 않으면 안 될 곳을 골라 피어난다는 광대나물 꽃, 이곳은 선택받은 봄맞이의 땅이다. 벼랑에는 아주 드문드문 산벚이 피었다. 그 투명한 분홍 너머로 벼랑의 바위 사이에 맞춤으로 놓인 꿀통들을 본다. 산벚과 꿀통의 관계는 분명 긴요한 듯한데, 벌이 보이지 않는 봄이다. 후도교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질마바위가 있다. 성곽의 문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다. 바위 문은 정과 망치로 벼랑을 쪼아 낸 '학교 길'이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 자식들이 강을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무주읍내의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부모들이 직접 만들었다. 뒷섬마을과 산의, 내동마을 등의 학생들이 이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산의에서는 새벽밥을 먹고 나서야 등교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부모들은 읍내 장터에 내다 팔 곡식을 등에 지고 이 길을 걸었다. 강변 길 끝 읍내로 이어지는 고갯길은 너무도 힘들었다고 한다. 노고가 한눈에 보인다. 바위 아래에 작은 비석이 있는데 '1971. 5. 20'이라 새겨져 있다. 뒷섬에서 앞섬으로, 다시 무주읍으로, 두 번이나 나룻배를 타야 했던 아이들은 이날부터 걸어서 등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길은 금강 '맘 새김 길' 중 2코스인 '학교 가는 길'이다. 이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닌 아이들은 이제 60-70대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 가는 길에 제비꽃 한 포기, 민들레와 봄맞이꽃이 흔하다. 저것은 쑥인가. 어릴 적에는 냉이며 쑥을 캐러 무시로 다녔건만 왜 이제는 쑥을 알아보지 못할까. 신발주머니 달랑이며 학교 가던 하많은 아침들도 아득하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경부고속도로 서울방향으로 가다 황간IC에서 내린다. 황간삼거리에서 9시 영동 방향으로 가다 마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마산교차로에서 오른쪽 대전, 영동방향 4번 국도에 오른다. 계속 직진하다 영동교차로에서 장수, 무주방향 19번 도로를 타고 직진한다. 봉소교차로에서 오른쪽 내도리, 압치 방면으로 빠져나가 압치버스정류장 앞에서 우회전해 내도로를 타고 가면 된다. 산의마을, 내도초등학교, 내동마을, 뒷섬마을 지나 후도교를 건너면 앞섬마을이다. 내도로는 앞섬마을을 관통해 앞섬다리를 건너 북고사 가는 길 초입에서 끝난다. 학교 가는 길은 후도교에서 질마바위, 북고사, 무주고등학교까지 약 3㎞다.앞섬다리 주변은 밤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를 감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명소다. 그 강변에 너른 꽃밭이 있고 철 따라 꽃들이 무더기로 핀다. 봄꽃을 보겠다고 왔지만 마음만 급한 탓에 한 송이도 피지 않았다.금강이 휘돌며 만들어 놓은 앞섬마을의 강변 땅이 모두 복숭아밭이다. 주민의 9할이 복숭아를 키운다고 한다.앞섬과 뒷섬을 잇는 후도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강변을 따라 '학교 가는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자줏빛 광대나물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 있다.질마바위. 학부모들이 정과 망치로 벼랑을 쪼아 낸 '학교 길'이다. 뒷섬마을과 산의, 내동마을 등의 학생들이 이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앞섬마을 소나무 동산. 수려한 소나무들과 함께 깨끗한 무덤 몇 기가 양지에 누워있고 아래로 복숭아밭이 넓게 펼쳐진다.
[사람의 서재] 프랑수아즈 사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극한의 자유 즐겼던 문학계 거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김영하의 소설 제목으로도 인용된 이 문장은 프랑스 여성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한 말이다. 오늘날까지 회자될 만큼 파격적인 발언인데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사강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다운 말이다.사강은 1935년 남프랑스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에 진학했지만 첫 시험에서 낙제했다.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위스키와 재즈를 즐기다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요트 사고를 당해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6주 만에 소설 '슬픔이여 안녕'〈사진〉을 쓰고 출간하는데, 18세의 나이였다. 남녀 간의 심리 전개를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단단한 문체로 묘사해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해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문단 데뷔와 함께 '사강 신드롬'을 쏘아 올린 것.1957년에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 "사강, 교통사고로 즉사하다"라는 뉴스가 전 세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소생해 3개월간의 병상 생활에서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23세 때 20세 연상의 남성과 결혼하지만 2년 만에 헤어졌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7세에 한때 패션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젊은 미국인과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시 이혼했다.이후 사강은 신경 쇠약, 정신병원 입원, 폭음과 마약, 도박에 탐닉했다. 도박으로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된 그녀는 '도박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적인 정열'이라고 하며 '돈이란 본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다.1995년에는 두 번씩이나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한 말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다.2002년엔 탈세범으로 기소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옹플레르에서 노년을 보내던 사강은 심장과 폐 질환으로 수년간 투병하다 2004년 숨을 거뒀다.대표 작품으로는 '슬픔이여 안녕'을 비롯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패배의 신호', 희곡은 '스웨덴의 성(城)'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시집 '마카다' 펴낸 김계희씨(2)음식하다 깃든 사색, 詩로 풀어…"마카다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어서예"
"중학교 졸업 이후 글을 따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신 젊을 때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했어요.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편지를 참 많이 썼습니다."40년간 공사현장 식당(일본어 '함바')에서 일한 할머니가 첫 시집을 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계희씨는 칠순을 맞아 지난달 23일 시집 '마카다'를 출판했는데, 1970년대 중학교 졸업 이후 시(詩)는 물론 글공부도 특별히 한 적이 없다. 그런 김씨가 시를 쓰게 된 건 글쓰기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젊을 적부터 가족과 지인들에게 편지를 즐겨 썼는데, 이런 습관이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도 이어졌다고 한다.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나서부터는 휴대전화에 여러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했다. 어릴 적 추억부터 최근 있었던 일, 사물과 자연을 보며 든 생각까지. 소재가 다양하다며 운을 떼니 그는 남들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라며 살갑게 웃었다. "원래 사색을 즐겨 해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는 건가…이런 생각을 특히 많이 해요. 함바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음식 하나를 봐도 인생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글로 옮겼죠."김씨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건 주변인들의 칭찬으로 시작됐다. 휴대전화에 기록해둔 글들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낼 때마다 '재밌다' '울컥했다' '구수하다' 등의 답장이 이어지면서 시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기존에 쓴 짧은 구절들을 다듬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장문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때부터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후 언어유희 등 시적 요소를 추가해 글을 쓰면서 내 글들을 시집으로 내보자 생각했죠."김씨의 시집 '마카다'는 그의 한평생 추억이 담긴 이야기다. 총 99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집은 가족, 음식, 고향, 인생, 자화상으로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는데, 어릴 적 가족과의 추억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대다수다. 그런 만큼 1950~1970년대 살아온 사람들이 공감할 요소가 많다. 김씨는 안동 길안면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가족에 대한 시들은 궁핍한 시절 시골에서의 정겨운 생활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등엔 언제나/ 찌든 땀 냄새/ 풀 냄새/ 볏짚 냄새'(지게) '허겁지겁 산길 내려와/ 풀숲에 주저앉아 펼쳤더니/ 고추 된장에 버무린 주먹밥 서너 덩이/ 군침이 마중물이 되어/ 게 눈 감추듯 먹었다'(나무꾼과 도시락).김씨의 에너지 넘치는 성격이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 신선하고 구수한 표현도 많다. 김씨는 매년 봄이면 고향으로 봄나물인 두릅을 따러 가는데, 몇 년 전 무리하게 채취를 시도하다 손목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일화를 추억하며 나물을 면밀히 관찰한 작품이 '두릅'이다. '독한 놈/ 몸뚱이에 가시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며/ 봄볕 따사로운 날/ 전투에 나섰다'. 대표 시이자 표제인 '마카다'는 '모두'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김씨가 대표 시를 '마카다'로 정한 이유는 타인에 대한 애정에서부터다.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상이지만 혼자 잘 사는 것보다 가족,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모두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 실제 김씨는 모임에 나가면 '분위기 메이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별명이다.김씨가 '함께'의 가치를 배우게 된 건 그의 언니로부터다. 김씨의 언니는 칠남매의 맏이로서 어릴 적부터 그의 동생들을 반듯하게 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빈자리까지 채울 만큼 넉넉함을 실천했다고 한다. '마카다'도 그런 언니에 대한 김씨의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한 시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형제들 간 우애가 남달랐는데 언니의 역할이 컸어요. 동생들과 돈독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 동생들을 잘 챙겨줬죠. 그랬던 언니가 지금 아픈 상황이에요. 옛날 일은 기억하지만 당장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요. 언니에게 이렇게 고마움이 큰데…." 그는 인터뷰 중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김씨의 향후 계획은 경상도 방언이 담긴 시집을 내는 것이다. 그는 "마카다로 시집을 내고 나서 경상도 방언으로 시집을 구성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언 중에는 재미있고 특이한 말들이 참 많은데, 지역 사람들에겐 친근하고 타지인들에겐 흥미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신춘문예에 도전할 거란 목표도 살며시 내비쳤다. 신춘문예는 일간 신문사가 문학 작품을 공개 모집해 신인 작가를 등단시키는 제도다. 김씨는 시집을 낸 후 시에 대한 흥미가 커져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욕심이 생겨 신춘문예에도 도전해보려 해요. 아직 시를 전문적으로 쓰진 못 하지만, 문학을 더 공부하고 사색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며 수줍게 웃었다. 글=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사진=B-story 제공김계희씨의 휴대전화 메모장. 메모장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모여 시집 '마카다'가 나왔다.
[한희정의 소소한 패션 히스토리] 검은색(Black), 심플&시크…여성복에 파고든 블랙의 美
1926년 코코 샤넬 '리틀 블랙 드레스'남성복에 쓰이던 검정 여성복에 도입우아함·세련미 대표 아이템으로 등극美블랙팬서당, 유니폼에 검은색 차용흑인차별에 저항 강인한 이미지 강조다양한 매력 가진 블랙 대중 사랑받아가장 어두운 색인 검은색은 패션에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를 담고 있어 미적인 효과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오염이 잘 보이지 않고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실용적 이유로 대중적으로 선택이 많이 되는 색이다. 검은색은 다양한 문화와 맥락, 분야에 걸쳐 죽음과 애도, 권위와 권력, 우아함과 세련미, 격식과 진지함, 신비로움, 반항과 반란, 어두움과 두려움, 미니멀리즘(Minimalism) 등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을 나타내며, 가장 밝은색인 흰색과 함께 대비되는 의미로 선과 악, 계몽기와 암흑기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현대 패션에서 검은색은 강인한 이미지와 다소 반항적인 느낌 그리고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는 데 다수 사용된다. 고대 이집트, 로마 시대에는 검은색 옷이 매우 드물었다. 깊고 어두운 검은색을 만드는 염색 방법의 수준이 높지 않았고 왕족과 귀족이 권력과 권위, 사치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소수 착용하는 정도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검은색은 죽음과 부활의 신이자 다산, 농업, 부활, 생명과 초목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나타내는 색으로 죽음, 밤, 인내, 부활을 상징했다. 이 시기 검은색이 죽음의 색인 동시에 생명을 의미했던 것은 매년 나일강 범람으로 남겨져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검은색의 흙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검은색은 우아함과 격식의 의미로 벨벳, 실크와 같은 고급 직물에 적용되었고 레이스, 보석,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상류층의 패션에 사용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검은색은 대표적으로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상징하여 장례 의복으로 거의 규정화되었다. 지금처럼 보편화되지는 않았으나 검은색 옷으로 고인을 애도한 사례를 보면 고대 로마에서 고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고 애도하기 위해 검은색 가운 형태의 토가(toga)를 입었고,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 남편인 앨버트 왕자가 사망한 후 남은 생애 동안 검은색 드레스를 착용하여 그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검은색 정장은 현재 남·여성복 모두에서 가장 기본적인 차림 중 하나이다. 왕족과 귀족의 시대였던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시대의 남성복은 밝은색과 레이스·보석 등 여성복 못지않게 화려함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무렵부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귀족의 밝은색 의복에 반발하여 어두운 색의 남성복이 대두되었고. 19세기를 거쳐 검은색 등 어두운 색의 정장은 더욱 널리 인기를 끌게 되었다.그 후 검은색은 1926년 코코 샤넬이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가 대중화되면서 여성복에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단순하지만 우아한 이미지가 있으며, 일상적 생활이나 차려입어야 하는 여러 행사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입을 수 있어 꼭 가져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다. 이에는 20세기 초 꼭 신체를 조이는 불편한 의복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면서 현대적 아름다움으로 유지하려는 샤넬의 가치관이 담겨 있는 것으로, 단순하지만 멋있는 검은색의 남성복 정장 개념을 여성복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1926년 패션잡지 보그(Vogue)는 리틀 블랙 드레스를 '샤넬의 포드(Ford)'라 언급하여 계층에 상관없이 이 스타일을 편하게 입을 수 있음을 나타냈다. 드레스가 일상복에서 훨씬 더 흔하였고 화려한 장식과 색상의 패션이 유행했던 당시 샤넬이 발표한 리틀 블랙 드레스는 새로운 패션의 지평이었다. 이는 이후 20세기 모더니즘이 확산되면서 시대적 감성에 맞게 응용되어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현대적 미니멀리즘의 대표색인 검은색은 단순하면서 세련되고 아름다운 색으로 패션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20세기 검은색 패션이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성은 반항과 저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6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설립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권력 정치 조직인 검은 표범당, 즉 블랙 팬서당(Black Panther Party)은 검은색 베레모, 선글라스, 가죽 재킷을 혁명의 의미로 착용하였다. 이들은 전략적, 상징적 유니폼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볍지 않고 존엄성으로 대해주기를 원하여 강하고 단정한 스타일로 유니폼을 구성하였다.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만연했던 흑인차별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이념으로 평등에 대한 열망 또한 반영되어 흑인들의 힘과 자부심에 대한 믿음 또한 포함하였다. 블랙 팬서당의 단정한 검은색 패션과 달리 찢어지고 날카로운 장식의 검은색 가죽 재킷은 1980년대 펑크 패션의 대표적 품목이었다. 또한 블랙 블록(Black bloc)이라 하여 80년대 낙태 제한, 원자력 발전, 불법 거주자 퇴거에 반대하는 시위나 무정부주의 반세계화 운동 등의 시위에서 검은색의 옷, 마스크,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가려 시위 참가자의 신원을 감추고 식별을 어렵게 하는 목적으로 착용하는 전략이 있었다. 색상도 채도도 없는 검은색은 다른 화려한 색보다 강한 이미지를 발현하며, 현대미와 전통미, 고급스러움과 반항, 권위와 자유로움, 어두우면서도 가장 화려함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단조롭게 보이지만 전혀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하며 소재 사용이나 의류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검은색은 마치 무지개와 같은 매력을 가진 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1926년 발표된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블랙팬서당의 검정 의복. 흑인 인권운동가 휴이 뉴턴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법원 앞. 1890년 검은 드레스를 입은 빅토리아 여왕. 한희정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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