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4> 이상국의 '향단(香壇)과 옥결(玉缺) - 조선 성리학 거두, 회재 이언적의 孝와 仁 이야기 (경주)'

  • 입력 2011-07-06   |  발행일 2011-07-06 제7면   |  수정 2021-05-2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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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의 향단(보물 제412호). 회재 이언적의 어머니 월성손씨가 거주했던 집이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경주라는 '스토리의 보물창고’를 고향으로 둔 까닭에, 사람들의 눈길을 덜 받아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옥산 아래 독락당에서 홀로 즐김(獨樂)을 기꺼워하신 분이 그 일을 억울해 할 리야 없지만, 조선에 드리운 정신의 큰 빛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우리가 정작 억울해 해야 할 일이다. 회재는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태어난 동방5현(東方五賢·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준봉(峻峰)이다. 그보다 11세 아래인 퇴계 이황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분의 큰 도를 알지 못했다. 나 또한 어리석어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에게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0여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 의지할 데를 찾다가 그에게 물을 기회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 뒤에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을 흠모하였다."

퇴계조차도 무릎을 꿇고 그리워했던 대유학자가 우리에겐 왜 이리 낯설어졌을까. 그가 펼친 학문의 경지가 워낙 큰 성취였는지라 짧은 두리번거림으로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천하의 인재에게 고루 기회를 줘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굳이 학파를 개창하지 않아, 그의 학문을 치열하게 홍보해 줄 제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가 닦아놓은 유학의 큰 도는 남송(南宋)의 주희(1130~1200·호는 회암(晦庵))에 이르러 학문의 체계를 갖춘다. 그로부터 361년 뒤 조선에서 '주희(晦)의 집(齋)’을 자처하는 선비가 등장한다. 그가 회재 이언적이다. 주자학을 이 땅에 제대로 이식한 사람. '철학자 회재’ 얘기도 좋지만, 여기선 그 분의 사람냄새를 좀 맡자.



양동마을 들어서는 어귀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눈에 잘 띄는 집이 하나 있다. 향단(香壇·보물 제412호)이란 이름을 지닌 이 곳은 회재의 어머니 월성손씨가 거주했던 집이다. 원래 99칸이었는데 6·25전쟁 때 일부 파괴된 것을 보수하면서(1976년) 56칸으로 줄였다. 지금은 51칸이다. 독락당에 몸을 낮춰 앉았던 회재답지 않게 지은 고대광실(高臺廣室)은, 외롭게 살아간 어머니를 우러르는 그의 마음이 아닐까.

향단은 회재가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노모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라는 설도 있고, 회재가 자신을 대신해 고향에 남아 노모를 모시는 아우 이언괄을 위해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경상감사 시절이면 1543년(53세)이다. 이 무렵 어머니는 노환이 깊어 풍기(風氣)에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홍문관 제학 겸 동지성균관사(종2품)를 맡고 있던 이언적은 3월에 관직을 버리고 어머니 월성손씨에게로 달려간다. 아들을 보고는 현기증으로 주저앉는 어머니를 껴안고, 그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한 달이 채 못되어 중종은 회재를 불러올린다. 왕은 당시 경상감사에게, 회재의 모친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고 잘 돌보라는 특명을 내린다. 대구의 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을 지나며 편찮은 노모가 있는 쪽을 얼마나 돌아보았을까. 상경하던 회재는 문경에서 자신이 병들어 눕게 된다. 왕은 다시 충청감사에게 분부하여 회재를 극진히 간호하라고 한다. 이 해 7월 지방관을 한사코 원하는 이언적의 뜻을 받아들인 중종은 마침내 경상감사로 임명한다.



이언적은 소문난 효자였다. 그는 그 전에도 몇번이나 노모 봉양을 위해 귀향을 간청했지만, 왕은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느냐’면서 허락해주지 않는다. 끈질긴 애원에 중종이 마지못해 안동부사와 김해부사로 발령을 냈으나, 이번엔 사간원에서 '격을 낮춰 지방관료로 가는 건 옳지 않다’며 반대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한 그 내면에는, 적막한 과부의 삶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다.

이언적은 18세 때 결혼한 부인 밀양박씨에게서 아이를 얻지 못했다. 아우인 언괄은 아들을 보았으나, 어릴 때 병으로 잃고 말았다. 두 아들을 앉혀놓고 어머니는 쓸쓸한 집안을 둘러보며 한숨 짓는다. “어찌 이 집은 이리 자식복이 없단 말인가?" 서른 초반에 남편을 잃고 고단하게 살아온 그녀는 자식이라도 번성하기를 원했다. 50세 되던 해, 이언적은 어머니를 위하여 사촌동생 이통의 셋째 아들 응인을 양자로 데려온다.



회재의 또 다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기문총화(記聞叢話·엮은 이와 연도 미상)’와 조식의 '남명집’에 나온다. 경주에서 주학교관(훈도)을 하고 있던 이언적은 25세 되던 해(1516년) 석(石)씨 성을 가진 관비(官婢)와 사랑을 했다. 그리고 임신한 상태였는데, 그것을 모르고 조윤손이란 사람이 석씨가 마음에 들어 소실로 들였다. 조윤손에 대해선 설이 여럿이다. 지중추부사를 지낸 조윤손(曺潤孫)이라고도 하고, 남명 조식의 친척이었던 조윤손(曺胤孫)이라고도 한다. 7개월 뒤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윤손은 그에게 옥결(玉缺·혹은 옥강(玉剛)이라고도 한다)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옥결이 장성하자 그는 후사로 삼고 집과 논밭, 노비들을 물려준다. 이언적은 어느날 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인이야 첩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아들은 돌려주는 게 옳지 않은지요?" 1547년 조윤손이 죽고 난 뒤 옥결은 장례를 치르고 나서 회재의 부인 박씨를 찾았다. 박씨는 울면서 그의 손을 잡고는, 회재가 강계로 귀양을 떠났으니 그리로 가보라고 했다. 강계에서 옥결은 회재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는다. 그 기록이 '관서문답록’(주해잠계집(註解潛溪集)에 실려 있다)이다.

옥결은 이 곳에서 생부에게 '전인(全仁)’이란 이름을 받는다. 회재가 평생을 닦아온 공부의 핵심이 '인(仁)’이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과아자야(汝果我子也).’ 너는 과연 내 아들이로구나. 평생 학문을 통해 낳은 자식 하나가 바로 온전한 사랑(全仁)이로구나. 그런 부르짖음이었을까. 이전인은 정3품 당하관인 예빈시정 벼슬을 했다. 땅밑으로 몰래 흐르는 시냇물의 의미로 '잠계(潛溪)’라는 호를 썼다. 이후 이언적은 '법자(法子)’인 응인에게는 종택을 지키도록 하고, '혈자(血子)’인 전인에게는 옥산서원을 지키도록 분배를 한다.



회재는 '구인록(求仁錄)’이란 책을 썼는데, 그는 천지의 마음이 인(仁)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천지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고 말했는데,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회재는 말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얻어 그것을 본성으로 삼은 까닭에 사람 모두가 측은한 마음을 지닌다. 이것이 인의 실마리다. 생명을 좋아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은 천지의 덕과 부합된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며, 인간은 만물의 신령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갖추면 그것이 효도이며, 그것은 천지의 마음을 갖추는 인(仁)이기도 하다." 그는 인(仁)을, 생명을 낳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풀어낸다. 이런 생각은 열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과 어렵사리 살아낸 지난 시절의 이력에서 피어난 것일지 모른다.



어머니 손씨의 친정집이기도 한 양동마을의 '서백당(書百堂)’은 회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설창산이라는 풍수가는 이 집에서 세 사람의 빼어난 인물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우재와 회재, 두 사람이 이미 태어났으니 앞으로 한 사람이 더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월성손씨 종갓집인 이 집 사람들은 혹시 딸네들이 와서 여기서 아이를 낳아 회재처럼 높아질까 싶어, 임신한 몸으로는 자고가지 못하게 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서백(書百)은 참을 인(忍)자를 하루에 백번씩 쓴다는 의미로 마음단속을 잘 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그래서 그런지 회재는 소용돌이치는 사화(士禍) 속에서 비교적 온건한 처신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랬지만 57세(1547년) 때 정미사화로 칼끝을 결국 피하지 못하고 유배를 간다. 이듬해 모친의 부음을 한 달 늦게 전해듣는다. 이후 1553년 63세로 형지에서 눈을 감는다. 강계 귀양지에서 아들 이전인에게 해준 말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전인이 여쭙기를, “정자(程子)께서 과부는 차라리 굶어죽을지언정 재가는 하지 않는다는 의논이 어떠한지요?" 하니 대인께서 말씀하셨다.

“부인된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겠지. 그렇다고 천하의 모든 여자들이 이처럼 굶어죽을 필요야 있겠느냐. 지금 양반들이 한미하고 일가친척이 별로 없이 젊은 나이에 자식이 없는 데도 새 과부로 재가하지 않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부모로서는 마땅히 당사자의 뜻을 물어 수절을 하겠다면 허락하되, 그렇지 않다면 재가토록 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관서문답록>에서.


회재에 관한 스토리텔링은, 그를 범접하기 어려운 위인으로만 만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조선 성리학의 거봉이라는 찬사는, 소통의 문지방만 높일 뿐이다. 회재도 몰래 사랑을 하고, 외로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치적 행동가였다. 또 혼자 가만히 앉아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는 끝없는 '자기완성’의 열정가였다는 점들이 고루 살아나야 하지 않을까. 양동마을에서는 향단-서백당-무첨당을 중심으로 한 길과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있는 회재 묘소와 달전재사를 아우른 스토리코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또 옥산마을의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혀 상심하던 회재가 자연을 벗삼아 한적하게 뜻을 벼르고 후학을 위해 가르침을 행하던 곳으로, 아름다운 건축 공간미를 함께 즐기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는 명소다.

협찬 : 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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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전문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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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서백당 전경.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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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첨당 전경. 여강이씨 종가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상류층 주택에 속해 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나 쉼터 또는 책 읽는 장소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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