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21> 우광훈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 야은 길재 스토리 (구미)'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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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11-02   |  발행일 2011-11-02 제7면   |  수정 2021-05-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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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채미정(採薇亭)’. 야은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768년(영조 44)에 건립됐다.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한 길재의 절의는 중국의 백이·숙제에 비교된다. 백이·숙제는 은(殷)이 망하고 주(周)가 들어서자, 새로운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형제성인(兄弟聖人)이다. ‘채미’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백이·숙제에 버금가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자 이름을 ‘채미정’으로 지었다고 한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Story Memo
구미 해평현(지금의 해평면)에서 태어난 야은 길재(吉再·1353∼1419)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삼은은 고려조에서 벼슬을 했지만, 이성계의 조선 건립 당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대표적인 선비들을 일컫는 말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한 길재는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가 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려말 창왕 때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나라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400년(정종 2) 세자 이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려 했지만,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려 정중히 거절했다. 그후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영남일보의 야은 길재 스토리는 ‘불사이군’의 뜻을 굽히지 않은 길재의 높은 충절을 모티브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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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입구. 곧게 뻗은 다리의 모습이 길재의 올곧은 충절을 보는 듯하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맞아. 이 나라의 수도는 개경이 아니었지….’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중턱에 올라서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뚝뚝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리, 서둘러야 하옵니다. 세자께서 기다리시옵니다.”

“잠시만 기다려라. 오늘 보면 더 이상은 보지 못할 풍경 아니더냐.”

길재는 바위 위에 턱하니 걸터앉은 다음 손에 든 부채를 펼쳤다. 도성 안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청계천과 사정문 앞으로 펼쳐진 다양한 저잣거리. 분명, 풍문 이상이었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신세계는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왕 14년. 무장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왕을 폐하고 최영 등 중신들을 살해하자, 길재는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선주(善州·오늘날의 선산)로 내려갔다.

‘아! 백이·숙제의 운명이로구나….’

그로부터 4년 뒤. 나라가 조선으로 바뀌고 세상이 더욱 더 혼란스러워지자, 별의별 괴담이 전국을 떠돌았다. 충절을 지키려던 고려의 군신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든가, 권력다툼에서 패한 조선의 공신들이 머나먼 동토의 땅으로 귀양을 떠났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역시 영험한 약이었다. 세상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고, 백성도 이씨왕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길재의 집 앞에도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어 경전을 논하는 소리가 쉼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역말의 방울소리가 문전 앞을 시끄럽게 어지럽히더니, 붉은 관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어명이오! 야은은 어서 한양으로 떠날 채비를 하시오.”

“한양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길재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이렇게 물었다.

“좋은 일이니 심려치 마시오. 내가 알기로는 세자께서 그대를 부르시는 듯하오. 그대가 경서에 밝고 행실이 옥처럼 맑아 왕실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라는 게 조정의 뜻이라는구려. 자, 어서 서두르시오. 여기서 한양까지는 천리길이외다.”

세자라면 이방원을 일컫는 말이었다. 훗날 태종이 될 방원은 길재보다 열네 살이나 어렸지만,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우인이기도 했다.

“세자께서?”

길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명은 고마운 일이나, 나에겐 홀로 되어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노모가 있소.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낙향한 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길재는 여전히 두려웠다. 망국의 원혼들…우왕과 창왕, 그리고 최영과 이색의 마지막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그러나 서슬퍼런 어명을 거역할 순 없는 법, 왕명을 받은 고을의 벼슬아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성화는 길을 재촉했고, 결국 길재는 한양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재가 한양에 도착하자, 세자 이방원이 그를 환대했다. 방원은 이제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태조가 내놓은 왕위를 곧장 물려받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길재와 방원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덕담을 나누었다.

“야은, 우린 한 동리에 살아 우의가 두터웠으며 자주 만나 학문을 논하였지. 그 당시 나는 자네의 깨끗한 인품과 탁월한 학문이 늘 부러웠다네. 더구나 왕씨(왕건의 후손을 표현하는 말)가 복귀하였을 때 스스로 야(野)로 물러나 초연히 수학하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어.”

“부끄럽사옵니다.”

길재는 방원의 말에 볼을 붉혔다. 그렇게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결국 방원의 선의를 알게 된 길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대궐에 입궁한 방원은 정종에게 길재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제수토록 간하였다. 허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길재는 대궐로 나아가 사은하지 않고, 곧장 방원을 찾았다.

“저하, 저는 이제 벼슬에는 추호의 욕심이 없습니다. 저는 저하의 용안을 한 번 뵌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옵니다. 지금 고향에는 홀로 되신 제 노모가 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제 뜻을 굽어 살피시어 저를 선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그러자 방원이 안타까운 듯한 얼굴로 답하였다.

“그대의 말은 사람의 향기로 가득하니, 참으로 그 뜻을 거절할 수 없구려. 그러나 그대를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주상이니, 주상에게 사면을 고하는 게 더 옳을 듯하오.”

결국, 길재는 정종 앞으로 나아가 고개 숙여 아뢰었다.

“신이 본래 미천한 사람으로 신씨(고려말 우왕·창왕이 왕건의 씨가 아니라, 신돈의 씨였다는 것을 표현한 말)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문하주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왕씨가 왕위에 복귀하자 저는 벼슬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신이 그렇게 한 까닭은 유가(儒家)의 큰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공부컨대, 연(燕)나라가 제(齊)나라를 칠 때 연의 장수 악의는 왕촉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그가 사는 마을을 삼십리 밖에서 포위한 채 군령을 내려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예를 갖추어 왕촉을 부르니 왕촉은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옵니다. 이때 왕촉이 한 말은 아직도 저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꿈틀대고 있습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저는 미천하여 왕촉처럼 목숨을 버리지도 못하였고, 백이·숙제처럼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며 절의를 지키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는 유가의 정신만은 용케도 득하였습니다. 진정 원하옵건대,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저의 충정을 이루게 해주시고, 효로 늙은 어미를 봉양하며 남은 생을 마치게 해 주옵소서.”

길재의 상소문을 읽은 정종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벼슬을 사양하는 것도 그렇지만, 유가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역시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종은 곧장 아우 방원에게 이 일을 전하였다.

방원의 반응 역시 기이했다.

“이번 일은 전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나의 뜻에 따르겠다…’ 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형제도 공신도 없었던 방원이었다. 그런 동생의 입에서, 그것도 자신이 천거한 인물이 벼슬을 거절하는데, 나의 뜻을 따르겠다?

결국, 정종은 권근을 불렀다. 권근은 유학에 정통한 대학자이자, 길재의 스승이기도 했다.

“길재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오? 이토록 벼슬을 마다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권근이 머리 숙여 답했다.

“그는 미천한 선비일 뿐이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타의 모범이 될 만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더 머물기를 청하시고 작록(爵祿)을 더해주어 뒷사람들이 본받도록 하셔야 하옵니다. 하지만 그가 계속 머물기를 거절한다면 차라리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시어 그곳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도록 하시는 것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정종은 결국 권근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게 낙향을 허락받은 길재는 그제야 도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양을 빠져나오면서 길재는 문득 개경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어찌 되었을까? 족히 닷새는 걸리겠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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