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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 탁영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김일손이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후 서원 앞을 흐르는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했다고 해서 ‘자계(紫溪·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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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Briefing
15세기 후반 조선 정치사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에 대항하는 사림파(士林派)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당시 사림파는 정치적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며, 신진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다. 이 때문에 훈구파의 입장에서 사림파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차에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난다. 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사관(史官, 실록 등을 기록하고 편찬을 맡아 초고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었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98)이 주도했다. 청도 출신인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이면서 사림파의 중심이었다. 조의제문을 실은 사초를 빌미 삼아 훈구파는 사림파 제거에 나서고, 결국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진다. 그의 스승인 김종직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만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김일손의 직필(直筆) 정신은 지금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편은 무오사화의 칼끝 앞에서도 직언과 직필을 서슴지 않았던 탁영 김일손의 이야기다.
#1. 사림파의 맹장으로 성장하다
무오년(戊午年 1498·연산군 4), 김일손은 고향 청도에서 모친상을 치렀다. 6월에 상복을 벗고, 함양의 일두(一 ) 정여창(鄭汝昌)을 자주 만나 교우했다. 7월2일, 의금부도사가 함양으로 와 김일손을 체포했다. 끌려가던 일손은 여창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 일이 나의 사초(史草, 사관이 실록 편찬을 위해 작성하는 초고)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네. 또한 사림(士林)의 화(禍)는 이로부터 시작일 것이네.”
그랬다. 조선 최초 사화사건의 불꽃은 이렇게 당겨졌다.
김일손은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현재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영남사림의 영수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 정몽주와 길재로 이어져 온 성리학의 학맥이었다. 스승과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을 그는 예감했을까.
23세가 되던 1486년. 김일손은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았다.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이 강직한 젊은 선비에게 성종(成宗)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의 행적은 특별히 눈에 띄었다. 김일손은 남효온과 함께 원주의 원호, 파주의 성담수, 불가에 귀의한 김시습을 방문하고, 선산의 이맹전, 함안의 조려를 만났다.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이후 정계를 떠나 은둔을 택했던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을 모두 대면했던 것이다.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인하는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단종이 생을 마감한 지 수십 년, 강력한 군주였던 세조와 성종을 통해 다져진 새로운 정치환경에서 단종폐위사건의 재조명은 사림의 최대 관심사였다. 사림의 기대주인 김일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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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영귀루 옆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나무 앞에는 이 은행나무를 김일손이 심었다는 탁영선생수식목(濯纓先生手植木)이라는 비석이 놓여있다. |
사림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와는 과거사에 대한 입장이 정반대였다. 이 때문에 두 세력 간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김일손 역시 훈구파 관료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들의 원망을 늘려갔다. 또한 성종과 연산군에 걸쳐 여러 차례 소릉(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 주장했다. 단종의 생모라는 이유로 현덕왕후의 신주는 종묘에서 철거되고, 문종과 합장돼 있던 관은 파헤쳐져 버려졌다. 세조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정치 한복판에서 김일손의 발언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단종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정치활동은 그러나 뒤바뀐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소릉복위는 왕이 어진 정치를 선언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리라 생각했다. 실현만 된다면 그것은 성종에 이르러 새롭게 무르익어가는 왕도를 돕는 길이며,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훈구파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그리하여 신민이 안정을 되찾을 거라 믿었다.
이런 시각은 김일손이 훨씬 앞서 과거시험에 제출한 ‘중흥대책(中興對策)’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천지의 억울함을 풀고 일월의 어둠을 걷어내야 비로소 기강과 법도가 되살아나고 예악문물이 가지런히 거행되고 마침내 중흥할 수 있다.”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아픔을 감싸 안아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기상조였다. 김일손은 1496년 1월 마지막으로 소릉복위를 간절히 바라는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그 길로 고향 청도로 내려왔고, 함양의 정여창과 힘써 학문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무오년에 이르러 그 꿈은 깨지고 만다.
#2. 직필(直筆)의 사초(史草),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설치되자 훈구파 대신 이극돈이 전권을 맡았다. 그는 선왕 때 작성된 사초를 열람했다. 그러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서 자신이 언급돼 있는 내용을 발견한다. 정희왕후의 국상 기간에 기생을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앞에서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따위였다. 그는 계략에 능한 유자광을 찾아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고, 몇몇 노회한 대신과 머리를 맞댔다.
김일손의 사초는 거리낌 없는 직필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연산군 앞으로 나아갔다. 조선의 법에 따르면 왕은 실록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지 않고선 못 배기도록 자극한 뒤, 이번 사례는 종묘사직에 관련된 특별한 경우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발췌해 연산군에게 바쳤다.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신하들의 비리가 폭로되어 있었고, 궁궐의 비밀이 적혀 있었다. 또 단종을 보필했던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절개 있는 죽음으로 언급한 내용도 있었다.
사초를 본 연산군은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당장 김일손을 잡아오라”는 명이 궁궐을 가로질렀다. 마침내 김일손이 끌려왔다. 연산이 물었다.
“실록이란 무엇이냐? 실록이라 한다면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하는데, 너의 사초는 모두가 헛된 것이니, 어떻게 실록이라 하겠느냐?”
김일손은 두려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의 사초는, 허모에게 들었고 정모에게도 들었으며 최모에게도 들었는데, 모두 믿을 만한 자이기 때문에 사실이라 생각하고 쓴 것입니다. 황보인, 김종서는 섬기는 바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제왕이 마땅히 추앙하고 권장할 일이기 때문에 ‘절개로 죽었다’ 한 것입니다. 신이 성종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또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에도 거듭 영광을 입었사온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해서는 숨긴다’ 하였는데, 왕이 과실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숨겨야 하거늘, 하물며 없는 일을 쓰느냐?”
“예로부터 사관은 왕의 부모라도 악행이 있다면 숨김이 없이 바른대로 적었고, 공자가 춘추(春秋)를 엮을 때에도 왕의 작은 잘못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사초에 넣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항우에게 살해당한 뒤 강물에 버려진 초나라 왕 의제를 조문하는 형식으로, 조카를 죽여 왕이 된 세조의 불의를 꾸짖는 글이었다.
사실 조의제문의 속내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는데, 김일손이 덧붙인 말이 글의 의중을 직접 드러내고 있었다. 김일손은 사초에다 그 전문(全文)을 싣고, 김종직의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라고 논평을 달았던 것이다. 또한 단종의 시신이 함부로 버려져 훼손됐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는 ‘단종이 자살하자 예로써 장사지냈다’는 세조실록의 내용과 큰 차이가 있었다.
김일손은 권세 있는 자들의 떵떵거림 뒤에, 숨죽이고 있는 힘없는 자의 목소리를 역사의 증언으로 취했던 것이다.
훈구파는 조의제문을 더욱 악의적으로 해석해 연산군의 분노를 부추겼다.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죽도록 미워하는 왕의 성격을 이용했다. 결국 연산군은 다루기 까다로운 젊은 사림학자들을 이 기회에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는다. 그것은 훈구파의 바람이기도 했다.
“김종직은 항우가 의제를 죽인 일에 빗대어 선왕을 헐뜯었으니,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 도당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무리지어 망령된 글을 칭찬하고, 사초에 써서 불후의 문자로 남기려 했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으므로 능지처사(凌遲處死)하라.”
무오사화의 칼끝은 결국 김일손을 겨냥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김일손이 처형 당할 당시, 청도 운계(雲溪)의 냇물이 갑자기 붉은 핏빛으로 변해 3일간 멈추지 않고 흘렀다고 전해진다. 이 때부터 ‘자계(紫溪,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훗날 김일손을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紫溪祠)로 불렸고,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나선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됐다. 1661년(현종 2) ‘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자계서원은 김일손의 고향인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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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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