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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세운 후, 1543년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해 서원의 시초가 됐다. 1550년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현판을 하사받아 지금의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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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의 영정 |
◆Story Briefing
영주 출신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년)은 국내에 성리학(주자학)을 처음 전한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다. 안향은 무너져 가는 나라의 윤리와 도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수차례 원나라에 들어가 성리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교육기금인 섬학전을 조성해 인재양성에도 열성을 쏟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은 훗날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 되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면서 영남 사림파를 태동시키기도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3편은 국내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회헌 안향의 이야기다.
#1. 예의와 윤리가 무너진 세상을 개탄하다
경북 흥주(興州, 지금의 경북 영주시 풍기) 출신의 안부(安孚)는 중인 출신으로 순흥 관아의 아전에 불과했다. 하지만 평소 성실하게 공부한 덕에 곧 잡과(雜科)에 합격하여 의업에 종사하다가, 나중에는 중앙 정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안사온(安士蘊, 후일의 안향) 역시 부친을 닮아 성품이 진중하면서도 착실했다. 또한 어릴 적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사리분별이 명확해 곧잘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어느 날 서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사온은 민가 담 너머로 들려오는 여인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너무 슬픔에 겨운 울음소리라 그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집안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백발의 노파와 아낙이 땅을 치며 울고 있었다.
사온이 그 사정을 물었다. 겨우 울음을 멈춘 아낙은 어제 외동아들이 출가를 해서 슬퍼하고 있다며 내막을 털어놓았다. 가뜩이나 손이 귀한 집의 외동아들인지라 앞으로 가계가 끊어지게 된 일이 가슴 아파서 그렇다고 얘기했다. 안타깝지만 사온으로선 어떻게 도움을 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사온은 할머니와 모친을 남겨두고 절을 찾아간 젊은 아들에게 은연중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를 믿고, 부처를 모시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하해 같은 은공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출가한 젊은이의 소행을 괘씸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윽고 열일곱이 된 사온은 뛰어난 실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이어 삼별초의 난으로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한 그는, 원종의 신임을 받아 감찰어사가 되었다. 이어 충렬왕 1년(1275)에는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관내를 시찰하던 그는 고을에 굿판이 열리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주의 깊게 살펴본 바, 고을 주민들은 누가 다치거나 병이 들면 대소사를 막론하고 걸핏하면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들여 굿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심지어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의원에게 데려가기는커녕 무당의 헛된 말을 좇아 굿판을 벌이다가 숨지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뿐 아니었다. 학문에 힘써야 할 선비들은 노(老), 불(佛) 사상의 지나친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불서(佛書)를 읽으며 시간을 소일했다. 아울러 무신정권 이후 무너진 윤리의식으로 사람들은 너나없이 체면과 수치심을 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 살았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일찍이 중국에선 한반도에 거주한 부족을 군자국(君子國)이라고 일컬었으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불렀다. 공자 역시 바다 건너 동부를 군자국이라고 한 바가 있다. 송(宋)나라의 영종(英宗) 역시 고려 문종에게 보낸 국서에 고려를 ‘고칭군자지국(古稱君子之國)’이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군자의 덕과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예의와 윤리가 무너져 감을 그는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곧 백성을 현혹하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 한편으로 나태와 향락에 빠진 고을의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선비들에게는 학문을 장려하고, 주민들을 모아놓고 도덕과 예절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이미 무너진 나라의 윤리도덕과 풍습을 고을 판관에 불과한 그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학문의 쇠퇴와 윤리의식의 붕괴, 유교의 침체 현상을 바라보던 그는 참담한 심정을 시로 남겼다.
香燈處處皆祈佛(향등처처개기불)
簫管家家盡祀神(소관가가진사신)
獨有數間夫子廟(독유수간부자묘)
滿庭春草寂無人(만정춘초적무인)
곳곳마다 향등(香燈)이요, 사람마다 불공이네.
집집마다 퉁소 불며 귀신에게 복을 비니
두어 칸 되는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에는
풀만 무성할 뿐 사람 없이 적막하네.
#2. 주자서를 접하고 충격을 받다
이러한 그의 백성에 대한 심려는 헛되지 않아서 조정으로부터 치적을 인정받아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와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을 거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그 후 충렬왕 16년(1289)에 그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평소 학문을 숭상하던 그는 중국의 많은 서적들을 섭렵하던 중 우연히 주자서(朱子書)를 접하게 되었다. 주자서를 읽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책에서는 그가 꿈에도 바라던 새로운 윤리와 도덕적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즉 주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치를 탐구하고, 인간 행위의 올바른 윤리로서 그 원리와 근거를 연구하고 정리한 철학서였다.
그는 곧 주자서를 손수 필사하고, 관련 서적을 수집했다. 또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이듬해 돌아왔다. 후일에 그는 주자학을 배워야 할 이유를 ‘회헌실기(晦軒實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희암(朱熹菴, 주자)의 저술들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를 배척하는 공이 공자에 필적할만 하였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회암(晦庵)을 배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학생들은 새로 들어온 주자의 서적을 읽기에 힘써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뒤 과거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거쳐서 밀직사사(密直司使)와 삼사좌사(三司左使) 벼슬에 오른 그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가일층 주자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택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신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몇 차례나 더 원나라를 왕래했다. 1303년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인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지금의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인재양성과 학교 재건에 열성을 쏟았다. 하지만 양현고(養賢庫, 오늘날의 장학재단. 관학(官學) 진흥을 위해 설치한 재단)가 빈 탓에 인재를 양성하기 힘들었다.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재부(宰府)와 중추원에 건의를 올렸다. 문무백관 중에서 6품 이상은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서 포(布)를 내게 하고, 그 이식(利息)으로 섬학전(贍學錢, 교육기금)을 조성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왕은 흔쾌히 왕실 재산과 곡식을 내어 그의 뜻을 도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금 조성에 반대하던 공신들은 물론 일반 서민까지 나서서 곡식과 재물을 형편에 따라 성심껏 쾌척했다. 이윽고 섬학전이 마련되자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로써 국가의 인재를 양성할 국자감 운영이 재정적으로 원활해졌음은 물론이다.
이어 1304년 6월에는 공자와 성현을 기리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어 흐트러진 고려 말기의 교육과 학문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주자를 추모하여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바꾼 그의 주자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성인(聖人)의 도는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주군에게 충성하고, 예(禮)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信義)로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경(敬)으로 닦고,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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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문성공묘.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主享)으로, 안축· 안보·주세붕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
#3. 안향의 업적이 집약된 소수서원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을 교육과 주자학을 통해 바로잡으려는 일념에서 평생을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을 위해 열성을 쏟던 그는 1306년 세상을 하직했고, 그를 따르던 많은 국학과 사학 12도의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나와서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왕은 장지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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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 있는 안향 향려비(鄕閭碑). 안향이 태어난 곳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
1542년에는 당시 풍기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을 추모하여 사묘를 세웠고, 이듬해엔 풍기에 있던 학사(學舍)를 안향의 본관지인 순흥으로 옮겼다. 한국의 유서 깊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탄생이었다.
명종 5년(1550)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안향의 숭고한 이념을 이어받기 위해 명종에게 청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편액을 받게 되었다. ‘소수’란 말은 ‘무너진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란 뜻으로, 한국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안향의 위대한 업적과 정신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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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섭 소설가 |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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