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 천혜의 요새 가산산성(칠곡)

  • 입력 2013-07-08   |  발행일 2013-07-08 제11면   |  수정 2021-06-02 18:10
“백성이 피곤하면 내환 먼저 싹터” 느릿느릿 외성공사는 민심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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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산산성(사적 제216호) 전경. 잇단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60여년에 걸쳐 쌓은 산성이다.


◆ Story Briefing

칠곡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잇단 외침에 대비해 축성된 산성이다. 당시 경상도 60고을의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금오·천생산성 3곳밖에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지(適地)에 천혜의 요새 역할을 할 수 있는 산성을 쌓기로 하고, 가산산성을 축성한다. 1639년(인조 17)에 성을 쌓기 시작해 1701년까지 60여년에 걸쳐 축성됐다. 국내에서 드물게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뤄진 산성이다. 처음 내성을 쌓을 때는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해 민심이 동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공사를 총괄했던 경상도관찰사 이명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반면에 외성 축성을 담당했던 관찰사 이세재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내성이 완성된 후에는 이곳에 칠곡도호부를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가산산성은 오랜 기간 힘들게 쌓았지만 성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6·25전쟁 때야 ‘요새’로의 역할을 한다. 현재 성벽 대부분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편은 칠곡 가산산성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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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축성을 지휘했던 경상도관찰사 이세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심을 헤아리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 이세재를 잊지 못한 민초들은 가산산성 한쪽에 ‘관찰사이공거사비(觀察使李公去思碑)’를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
 

#1. 인조임금의 불안 

가산(架山· 해발 901.6m)은 칠곡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시작되는 산맥의 서쪽 끝자락을 가산이라 부른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활약했던 천생산성과 낙동강전투의 최후 보루였던 유학산, 다부동이 가깝다. 꼭대기는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 요새를 만든 것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1595~1649)때 일이다.

인조는 유독 성(城)과 인연이 많은 임금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충청도 공주까지 내려가 공산성에 몸을 의지했다. 정묘년에 후금(後金)이 침입했을 때는 강화도로 가서 성문을 닫아걸었고, 후금이 청(淸)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남한산성에 있었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한 달을 넘게 버티다가 성문을 열었다.

“오직 대의(大義)를 지켜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며 외로운 성에서 포위당한 채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았다. 군졸이 부족하자 학사(學士)들에게 창칼을 쥐어주고, 콩 반쪽으로 배를 채웠으며, 지붕을 뜯어 말에게 먹이고 나무뿌리로 불을 땠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죽음을 다해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외부의 구원을 기다렸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포탄이 성벽을 때려 맞는 곳마다 부서졌고, 사람 수와 식량을 계산하니 열흘을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인조는 쪽빛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서 백마를 타고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청나라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세자를 볼모로 보내고 젊은 여인을 조공으로 바쳤다. 굴욕적인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뒷감당을 하면서 인조는 이를 갈았다.

청의 눈치를 봐가며 조선은 남한산성과 강화성을 보수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성을 축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일은 은밀하게 진행됐고, 때로 추궁을 당하면 왜(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허술한 틈을 타 왜가 임진년과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항상 불안했다.



#2. 이곳을 두고 어디에 성을 짓겠는가

1639년 4월, 이명웅(李命雄·1590∼1642)이 경상도관찰사로 내려가며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인조가 물었다.

“경상도는 왜인(倭人)이 통하는 중요한 길목임에도 부산에서부터 문경새재까지 마땅한 요새가 없다고 한다. 금오(金烏)와 천생(天生)에 대해서 아는가?”

“천생산성은 기세는 험하나 우물이 없으니 실로 지킬 만한 곳은 못되며, 금오산성은 안팎이 바위에 둘러싸여 성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뺏기지 않을 요새이긴 하지만 터가 비좁아 성을 지키는 쪽도 곤란을 겪긴 마찬가지라 들었습니다.”

인조는 새로 성을 쌓을 만한 데를 물색해보라고 주문했다. 얼마 뒤 관찰사가 가산(架山)을 추천했다.

“신이 살펴보니 가산은 본영(本營,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과 50리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동쪽으로는 40리,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두 길로 통하며, 서남쪽 40리 거리에 낙동강이 흐릅니다. 또 금오산성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응원하는 형세를 이루니, 남쪽 지방의 방비하는 곳으로는 실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인조는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대견해했다.

“만약 성을 짓는다면 이곳을 놔두고 어디에 짓겠는가? 산은 일찍 추워지니 하루라도 서둘러라.”

1639년 9월부터 이듬해 1640년 봄까지 공사가 이어졌다. 10만 장정이 동원되어 돌을 산꼭대기로 날랐다. 경상도에서 끌어 쓸 수 있는 물력과 인력이 이곳에 집중되었고, 서둘러 일을 마치려는 관찰사의 욕심에 인명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자연히 민심은 나빠졌고, 헌부(憲府)에서 관찰사를 탄핵했다.

“관찰사 이명웅은 왕명에 부응해 일처리를 신중히 해야 함에도 형장(刑杖)을 지나치게 썼습니다. 백성들은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사장에서 죽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이명웅을 파직하소서.”

인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날 최우선은 성을 짓는 것이다. 성을 만드는 일은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명웅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다.”

헌부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이 한갓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도구라면, 비록 성의 높이가 10장(丈)이고 양식 쌓인 것이 언덕과 같다 하더라도 누가 산성을 곱게 쳐다보겠습니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당했던 치욕이 떠올랐다. 장졸들은 무기를 버리고 숨기에 바빴고, 아무도 구원하러 오지 않던 그때. 그 겨울날의 처절한 공포와 외로움이 새삼 몸에 사무쳐왔다. 더욱 쓰디쓴 말이 왕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을 피곤하게 해서 완성했고 백성의 기름을 짜서 채워놓고는 또 목숨을 바쳐서 지키라고 한다면 그 누가 함께 하겠는가’ 했습니다.”

인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오로지 일을 성사시키는 것에 힘쓰고 백성의 고통은 돌아보지 않았다. 원망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으니 성이 있은들 내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왕은 관찰사를 교체했다. 공사는 이미 마무리 단계여서 1640년 5월, 가산성(架山城)에 칠곡부(漆谷府)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때는 정상 부근의 내성(內城)만 있었으며, 그 뒤로 60년에 걸쳐서 중성(中城)과 외성(外城)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관아를 산 정상에 두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전쟁에 활용하기엔 유리한 공간일지 몰라도, 이용하는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전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결국 1819년에 와서야 관아를 산 아래로 옮긴다.



#3. 또 다른 관찰사 이세재

조선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산성은 조용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적이나 오랑캐도, 화살과 포탄이 날아든 적도 없었다.

1950년 여름, 인민군 게릴라부대가 가산산성을 장악했다. 낙동강을 넘어 다부동 전선을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적군이 국군 방어선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적은 동명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1사단 사령부를 습격한 다음 산성으로 숨었다. 인민군이 천혜의 요새를 차지해 농성을 벌이고 국군이 공성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약 열흘간의 전투 끝에 성을 탈환했지만 국군에게도 많은 손실이 따랐다.

이제 총성은 멎고 산에는 정적이 감돈다. 1971년, 가산산성은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팔공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도중에 표지판을 보고 발길을 멈춘다. 산성길을 거닐다가 남문 앞에서 오래된 비석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비석은 또 한 사람의 경상도관찰사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세재(李世載·1648~1706)였다. 그는 아주 엄격한 관리였다. 일찍이 평안도관찰사로 일할 때는 그곳을 지나던 청나라 사신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조선 관찰사의 위엄이 청에도 널리 알려져 그가 연경(燕京)을 방문했을 당시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세재는 1700년 가산산성의 외성 공사를 지휘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1701년 완료했다. 그는 자신의 공을 쌓는 일에 산성과 백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노역을 감당할 장정을 뽑을 때는 공정했고, 시한을 정해놓고 몰아붙이지 않았으며, 손이 바쁜 농사철과 추운 겨울을 피했다. 성내에 항시 비축해야 할 군량미가 모자랄망정 집집마다 사정을 봐가며 거두었다. 외성을 만든다고 했을 때 고달픔을 예상하고 한숨짓던 경상도 백성들은 관찰사의 선정을 칭송했다.

조정에서 외성의 공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묻자 이세재가 대답했다.

“높은 성을 완성하지 않았는데 국고는 탕진되고 백성은 피곤하며, 외환이 있기 전에 내환이 먼저 싹튼다면, 그때에 비록 뉘우치더라도 일을 돌이키지 못할 것입니다.”

민심을 헤아리고 어루만질 줄 알아서였을까. 경상도를 떠난 뒤에도 그는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 자주 기용되었고,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했다. 형조참판으로 있던 1706년, 59세로 세상을 떠나니 모두 안타까워했다.

너그러운 경상도관찰사를 잊지 못하던 지역민들이 1708년 가산산성 한쪽에 ‘관찰사이공거사비(觀察使李公去思碑)’를 세웠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왔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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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

글=조정일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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