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1> 북비(北扉)로 의리를 세운 이석문(성주)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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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7-29   |  발행일 2013-07-29 제13면   |  수정 2021-06-02 18:35
집의 사립문 뜯어 북쪽으로 옮겨…사도세자 향한 충절의 門 열어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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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북쪽으로 낸 사립문인 북비(北扉).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석문의 충절과 의리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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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비라고 적힌 사립문을 들어서면 북비고택이 보인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이곳은 여느 고택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의리를 지킨 이석문의 거처로 더 격에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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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한개마을의 응와종택 솟을대문에는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응와 이원조는 이석문의 증손으로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편에 북쪽으로 난 사립문인 북비가 있다.
◆ Story Briefing

호가 돈재(遯齋)였던 이석문(李碩文, 1713~73)은 북비공(北扉公)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739년(영조 15)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사도세자의 선전관(전령 겸 호위무사)으로 발탁됐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자,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영조에게 직언하지만 오히려 관직을 삭탈당해 고향 성주로 낙향했다. 성주로 내려온 이석문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사립문을 북쪽으로 내고 두문불출한다. 북쪽에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충절과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비공(北扉公)’으로 불렸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1편은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지킨 북비공 이석문에 대한 이야기다.
 

 

 

#1.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의 문

돈재 이석문의 손자 규진(奎鎭)이 성균관의 제과(制科)에 뽑힌 것에 집안은 크게 기뻐했다. 바로 정조 임금이 보자고 해서 대궐에 들었다. 정조는 그를 가까이 불러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돈재의 손자란 말이지?”

“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로군. 나는 돈재를 잘 알고 있다. 너의 조부는 의리 있는 사람이지. 그래, 그때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참으로 가상하였다.”

규진은 조부의 함자가 임금의 입에서 거론되는 것에 감격했다. 또한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경연에서의 은근한 하문도 그러했다.

“북비(北扉)가 아직 고향집에 있는가?”

규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삼 할아버지의 과거행적의 위대한 자취를 되새겼다. 그의 향리 한개에서 북비댁으로 불리는 할아버지의 거처가 이처럼 온 천지에 회자될 줄을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그 의미의 깊음을 실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돈재 이석문의 이야기는 이제 전설처럼 그의 집안에 내려오고 있었다.

이석문은 골격이 크고 우람했다. 힘이 장사였다. 그리하여 1739년(영조 15) 27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문인의 집안에서 무인이 나타난 것도 큰 복이라고 마을에서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곧바로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장수의 재목이로군.”

문무조신들이 관복을 입은 그의 풍채의 늠름함을 찬탄했다. 이후 10여년 만인 1750년(영조 26),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된 사도세자가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발탁했다. 이어서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자리에 그를 앉혔다. 사도세자를 옆에서 지키면서 보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가 침울해지면서 사도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졌다. 따라서 그의 지위도 불안한 전망을 보이는 듯했다. 무엇보다 세자를 흔드는 무리의 목불인견이 크게 눈에 거슬렸다. 권력에 연연하여 유리한 쪽으로 줄서기에 바쁜 대신들의 행태도 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래, 차제에 낙향하여 집안을 건사하고 학문에 힘써야겠다.”

그는 차츰 마음을 다잡아 갔다. 그러자 노론세력인 김상로와 홍계희가 넌지시 그의 마음을 돌릴 것을 제의해 왔다.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시의를 따르게. 그래야 자네도 제대로 설 수 있을 것이네.”

강직한 의리를 고수하는 이석문은 이 말에 역정을 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영남사람이라 시의를 살피지 못합니다. 또 천성이 남을 우러러 매달리는 구차한 짓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버렸다.

1762년, 50세에 무겸(武兼)을 제수받고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일이 비극적으로 전개됐다. 사도세자 선()은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가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노론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휩싸였다. 그를 싫어하는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병이 발작할 정도였다. 1762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했다. 영조가 크게 노해 사도세자를 죽이고자 휘녕전(徽寧殿)으로 거동,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려 했다.

그리고는 “간신을 들여보내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문지기에게 명하였다. 이에 사도세자를 살리려고 애쓴 이들이 몰려들었다. 설서(設書) 권정침(權正枕)과 사서(司書) 임성(任誠)이 세자의 아들인 세손(훗날의 정조)을 모시고 와서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문지기가 가로막았다.

“이놈들아, 아비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세손의 효심을 막지 말라.”

그래도 문지기들이 완강하게 막았다. 이에 이석문이 나섰다.

“부자가 서로 헤어지는 마당에, 어찌 임금의 교서를 기다리겠소?”

그는 세손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임금은 대로했다.

“아무도 들지 말라고 했거늘, 누가 짐의 말에 불복하는가? 어서 나가지 못할까!”

그러나 이석문은 임금 앞에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은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고 했다. 세자는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뒤주에 들어가자 ‘꽝’ 하고 임금은 뒤주 뚜껑을 덮고는 이석문에게 말했다.

“큰 돌을 들어 위를 눌러라.”

이석문은 세손을 어루만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신은 죽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정말 죽고 싶으냐? 다시 한 번 더 명을 내린다. 어서 돌을 들어 뒤주 위에 올려놓아라.”

“신은 할 수 없나이다.”

영조는 큰 소리로 이석문을 끌고 가라고 명하면서 말했다.

“내 말을 거역한 죄를 친히 물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날, 영조의 친국(親鞫) 끝에 장(杖) 50대의 벌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죽었다. 사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광무 3)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세자를 살리지 못한 원통함으로 가슴을 쳤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벽에 써 붙여 놓고 읊으며 두문불출했다. 마침내 거처하는 집의 사립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사도세자가 있는 북쪽을 향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는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와 접하고 싶지 않다”며 그 집에 은거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북비공(北扉公)으로 불렀다.

그 후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하고 있던 영조는 그를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뜻을 굳게 가져야 하는데, 뜻이 구차히 굴복된다면 무엇이 그 사람에게 귀하겠습니까? 나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무공도 세우지 못하였고 사헌부를 드나들며 간신을 베어 대의를 밝히기를 청하지도 못하였으니 저의 뜻은 끝내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초야에 묻혀 편안히 쉬면서 유유자적하겠습니다.”



#2. 경침(警枕)과 의리 지킴의 사상으로 세운 집안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한개마을은 북비고택으로 인해 그 의리의 뜻이 고양되는 곳이다.

한개마을의 서쪽 안길인 돌담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응와종택이 있다. 솟을대문에는 ‘정헌공응와이판서구택(定憲公凝窩李判書舊宅)’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석문의 증손자인 이원조가 조선 고종 때 공조판서를 지냈음을 표한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편에 북비(北扉), 즉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 있다. ‘북비’라고 적힌 사립문을 들어서면 남쪽을 향해 앉아 있는 건물이 보인다. 북비고택(北扉古宅)이다. 고택은 1774년(영조 50), 이석문이 터를 잡은 후 손자인 이규진이 1821년(순조 21)에 북비고택 뒤편으로 정침(正寢)과 사랑채를 새로 지어 확장했다. 증손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1866년(고종 3)에 사랑채를 다시 고쳐 지었다. 응와종택과 별도의 담으로 구획된 북비고택은 여느 고택에 비해 초라해 보이지만 소박한 맛이 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의리를 숭상하는 선비의 거처로 더 격에 어울리는 것 같다.

응와종택은 조선조 유학자 집안의 멋과 격이 잘 드러난다. 안대문채는 초가로 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것”이란다.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이란 현판이 걸린 아래채는 서재다. 이 현판은 원래 작은 사랑채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원조가 증조부인 이석문의 가르침을 되새겨 건 것인데, 독서를 통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사랑채의 당호도 응와 이원조가 ‘경침(警枕)’의 가르침을 내린 조부 이민겸(李敏謙)의 호를 따서 사미당(四美堂)이라 써서 걸었다. 경침이란 자식을 가르치는 엄격함이 서려 있는 말이다. 자식들을 꾸짖을 때 목침(木枕) 위에 올려 세우고 종아리를 때린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응와종가에서는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들어 나무로 만든 베개인 이 목침을 특별하게 ‘경침(警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쩌면 이 경침의 정신이야말로 이 집안을 일으킨 매서운 기운이라고 할 만하다. 이규진(李奎鎭)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그의 어머니 진주강씨는 곧장 “우리 집 경침의 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경침’의 사상과 의리지킴의 사상이야말로 한 집안을 세우는 기둥임을 응와종택과 북비고택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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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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