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근 석성장학회 이사장은 1966년 국세청에 입사해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조 이사장이 대구에서 보낸 초중고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김은경 기자

조용근 석성장학회 이사장은 1966년 국세청에 입사해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조 이사장이 공직시절 받은 각종 임명장을 배경으로 자신이 쓴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김은경기자
서울시 서초구 고등법원 검찰청사 앞에는 커다란 청동 조형물이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검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이 조형물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부조로 새겼는데, 그 중 한 명이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낸 조용근 석성장학회 이사장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굴의 신념으로 꿈을 이루고, 나눔과 섬김의 길을 개척한 그의 삶이 커다란 울림을 준다.
◆지독한 가난의 기억
"어린시절 저희 아버지는 평소 말이 없으셨는데, 막걸리를 드시면 밥상을 날리고, 가재도구도 부수고 하셨죠. 간혹 엄마와 우리들에게 손찌검도 했는데, 엄마도 고집이 있어선지 맞고는 못 살았어요. 판자촌 집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는 날엔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방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 이사장은 1946년 6월 25일, 3남 3녀 집안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 모두가 궁핍했지만 유독 어려움이 많은 가정이었다. 무학(無學)이었던 아버지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을 탔고, 혼자 남은 어머니는 살기 위해 6남매를 데리고 친정살이를 했다.
"성장기에 제대로 먹지 못해 골골거리며 자랐죠. 배 곯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는 들쥐 수십 마리를 잡아왔어요. 저는 그거라도 먹고 살 수 있었지만 2살 박이 동생은 소화를 시키지 못해 그만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사리 판단이 빨랐던 조 이사장은 서울대 진학을 꿈꿨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이 무산됐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국세청 채용공고를 발견하고 곧바로 지원했다.
"1966년 개청한 국세청이 9급 공무원을 뽑는 공고를 낸 것인데, 무려 5만 명이 몰렸어요. 100대 1이 넘는 살인적 경쟁률이었지만 최상위권으로 합격했죠."
◆마지막 공직은 대전지방국세청장
국세청에 입사한 조 이사장은 타고난 친화력과 깔끔한 업무로 입소문이 나면서 모든 과에서 탐내는 직원으로 승승장구했다. 대구서부세무서 말단으로 입사한 그는 훗날 대전지방국세청장으로 은퇴할 때까지 36년간 공직 생활을 했다.
재임 중 몸을 사리지 않는 업무스타일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관리자로도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공직 생활을 마무리할 때 일화는 오래 회자되기도 했다. 대전지방국세청장으로 재임시 관내 세무서 직원 2명이 근무시간 중에 세무사 사무실에서 화투를 하다가 본청 감찰요원에 적발돼 옷을 벗을 처지에 놓였다.
비록 그들의 행동은 잘못됐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 세금인들을 파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 회장은 자신의 목숨과 젊은 직원의 목숨을 맞바꾸기로 결심했다. 아직 정년이 2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국세청 관례에 따라 후배들을 위해 용퇴를 결정한 것이다.
그는 은퇴 후 세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한국세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천안함재단 이사장 △국세공무원교육원 명예교수 △북한 이탈주민 지원 특별위원회 위원장 △청량리 다일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 △중증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석성 1만사랑회 이사장 등으로 이름을 올렸다.
◆나눔과 섬김 중심엔 '석성장학회'
조 이사장은 지난해 뜻 깊은 상을 받았다. 국민들에게 직접 추천을 받아 진행된 '제13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국민포장' 대상으로 선정됐다. 국세청에 재직시부터 꾸준히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온 그의 노력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그가 실천한 나눔활동의 중심에는 1994년 발족한 석성장학회가 있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자그마한 한옥 한 채를 물려줬어요. 300만원에 구입한 한옥이 꾸준히 올라 5천만원이 됐더라구요. 이 돈으로 뭘할까 고민하다가 아내와 상의해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게 되었습니다."
석성장학회는 그가 국세청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에 만들었다. 월급쟁이 공무원이 장학회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적잖은 화제가 됐다. 1994년 5천만원으로 출발한 장학회는 이후 무럭무럭 성장하더니 30여년이 지난 지금 종잣돈이 100억원으로 불었다. 4천600여명의 장학생에게 35억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처음부터 기존의 장학회들과 차별화된 운영을 하기로 결심했죠. 성적이 우수한 학생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 인성이 반듯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어요. 또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이 100%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나눔과 섬김의 바이러스가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앞장서는 마음으로 임한다고 할까요."
종잣돈을 늘린 과정도 감동적이다. 그가 소속된 세무법인 석성은 매년 발생하는 매출액의 1%를 석성장학재단에 기부한다. 법인들이 이익 중 일정액을 기부하는 것은 종종 있지만 매출액의 1%를 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이 뿐만아니다. 조 이사장에서 출발한 선한 영향력이 널리 주변으로 확산 중이다. 얼굴도 모르는 세무업계 선배가 유산으로 받은 수십억대 부동산을 흔쾌히 장학회에 기부했다. 조 이사장의 딸은 사회에 나와 처음 받은 월급 전액을 기부했다. 딸과 아들은 결혼식 때 받은 축하금 5천만원과 1억원을 장학회에 기부하기도 했다.
"장학회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하고 궁리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어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한 두분은 평생을 큰소리 한번 못 쳐보고 주눅이 들어 사셨죠. 무학자였지만 제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위대했던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서 '석성장학회'로 이름을 지었죠. 석성을 통해 배출된 장학생들이 사회에서 주눅받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낼 수 있는 재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성공 비결은 '사색하며 걷기'
그는 소문난 걷기 예찬론자다. 대구 대성초등 6년, 경상중 3년, 경북대사대부고 3년을 매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서 학교에 갔다. 요즘도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왕복 1시간에서 3시간을 꼬박 길 위에서 머물렀던 것. 조퇴 한 번 없이 개근상까지 탔으니 대단한 열정이고 집념이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일상을 단정하게 하는 오랜 습관이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지 않았나 생각해요. 건강에도 좋지만 내 삶의 방향을 정하고, 바쁜 일상에 휴식을 줌으로써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에는 걷기 만한 것이 없다고 봐요."
조 이사장은 우리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적하며, 석성장학회의 할 일이 아직 무궁무진하다고도 강조했다.
"1988년 올림픽 경기할 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천500불, 지금은 3만5천불로 늘었죠. 하지만 우리 국민 상당수는 그만큼 잘사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중산층이 늘지 않고, 어느 한쪽에 부가 편중화 되었기 때문이에요. 부모가 가난해도 자식이 출세할 수 있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겠죠."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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