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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힘을 기르자, 적을 물리치자!
랑을 바라보는 홍언박의 눈빛이 그윽했다.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촉촉하고 애틋한 듯도 싶었다. 여랑은 어디에 그처럼 용맹한 여장수의 모습이 있었나 싶을 만큼 수줍은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실로 몇 해만에 보는 님의 모습인가.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그 님에게 가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지금은 나라가 위난에 처한 터라 당장 사랑을 이루지는 못하는 터. 하지만 이제부터 두 사람은 지척에서 함께 하늘을 보고 숨결을 느낄 수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네가 호위무사가 되어 이제 우리가 함께할 수 있게 되었구나. 장하고 고맙다. 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궁하면 그때는 우리 백년, 천년을 변치 않을 가약을 맺자꾸나."
"오라버니, 저는 가약이 아니어도 오라버니께서 한 하늘 아래 살아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저는 그리 염두에 두지 마시고, 왕과 나라의 일에 먼저 애쓰십시오."
"오냐. 나라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의 사랑인들 온전하랴.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부디 왕과 왕후마마의 호위에 만전을 기하여라.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만, 조정에는 아직도 원나라에 기대려는 무리들이 있어 왕후마마를 핍박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설마하니 왕후마마까지요?"
"그래, 이제 이곳 복주에서 왕실이 안정되어가니 그들인들 더는 어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방심할 일은 아니다."
여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없으면 사랑도 온전할 수 없다는 님의 말씀. 그것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따라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고려의 국모로서 의연한 노국공주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리라.
주성 밖 들판에서는 군사로 편성된 안어대동의 장정들이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정연한 대와 오와 열이 장수 무빈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을 펼치고 닫고 변하는 모습은 가히 천지를 떨게 하는 위엄이 넘쳤다. 한편에서는 칼과 창을 든 병사들이 '충(忠), 의(義), 용(勇), 무(武)! 안, 어, 대, 동!'의 구호에 맞춰 절도 있고 현란하게 움직이니 그것은 아름다운 군무처럼도 보였다.
성루에 선 왕께서 흡족한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마음 든든한 모습입니다. 이제 부원군의 수습책을 듣고 싶습니다."
곁에선 손홍량이 읍하고 입을 열었다.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미 원의 쇠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원에 빌붙은 몇몇 신하들이 왕과 왕후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줄 신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이번에 우리를 침략한 홍건의 무리들이 한인(漢人)의 후예로서 원에 대항한다고는 하나, 이미 우리에게는 적이 되었으니 철저히 토멸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고 한인들에게도 우리의 강인함을 주지시켜야 하옵니다. 우리 고려는 비록 중원의 나라들과 조공의 관계를 맺은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외교상의 방편일뿐 주종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허나 몽고인들의 원에 의한 고려의 핍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으니, 차마 태조 대왕을 비롯한 선대의 종묘에 고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에 원의 멸망 이후에도 중원의 국가에 그와 같은 수모를 다시 당해서는 아니될 것이오니 왕께서는 홍건적을 철저히 토멸하시고, 원의 마지막 준동에도 의연히 대처하실 수 있도록 무엇보다 국방을 튼튼히 하소서."
"이를 말이겠습니까.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은 저와 같이 나라를 위해 한겨울 삼베 옷차림에도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데, 정작 앞장서야 할 중신들은 국론을 분열시켜 나라를 이 지경에 빠트렸으니 어찌 백성들을 볼 낯이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어서 서둘러 국론을 가르는 신하는 내치시고, 조정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소서. 그리하면 백성들은 한겨울 삼베옷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려의 백성들, 더구나 안어대동의 백성 모두는 나라의 소중함과 왕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어 신민 모두가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면 살림의 나아짐은 불꽃과 같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오직 홍건의 무리를 격멸하고, 왕실이 부흥해 나라가 안정되도록 할 때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오늘 저 장병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를 보니 마음 든든하고 고려의 밝은 미래를 눈앞에 보는 듯합니다. 또한 흩어져 있던 장수와 병사들이 곳곳에서 모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다는 장계도 받았습니다. 이에 최영, 이방실, 정세운 등 장수로 하여금 홍건적을 격멸토록 하였으니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면 여기 안어대동의 군사들도 지원군으로 보내소서."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저들 군사는 앞으로 우리 고려의 주력군으로 삼을 것이니, 조금 더 훈련을 시킨 다음 홍건적의 주력을 격멸할 때 내보낼 생각입니다. 무빈 장군이 참으로 든든합니다."
"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 더 아뢰올 말씀은 왕후마마의 신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염려스럽습니다. 왕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어서 후사를 보셔야 할텐데……. 왕께서는 군사 훈련은 소신과 무빈 장군에게 맡겨두시고, 왕후마마를 위로하고 돌보소서."
"하하. 고맙습니다, 부원군."
은 왕후와 함께 교교한 달빛 아래를 거닐면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다. 오직 사랑하는 지아비를 따라 고려의 국모로서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그 마음 한 자락에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왜 없으랴. 하지만 굳이 그것을 다시 꺼낼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모르는 척 외면하면서 일상의 위로로 마음을 달램이 나을 터였다.
"왕후, 파천 길의 고생으로 몸이 많이 상했을텐데 좀 어떠하오?"
"아닙니다. 이곳 땅에 온 뒤부터는 참으로 편안한 기운에 아무런 탈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인정스럽고 정성스러운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그건 그렇소. 나도 이처럼 편안한 기운을 느끼고 미더운 마음이 든 적이 없었던 듯 싶소. 참으로 복되고 평안한 땅이오."
"왕께도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각지 장군들의 활약으로 홍건의 무리들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고, 복주 군사들의 용맹함은 하늘을 찌를 듯하니 왕께서도 건강을 유념하십시오."
"허허. 그렇지 않아도 오늘 복천부원군께서도 우리의 후사를 걱정하면서 왕후와 나의 건강을 염려했소."
"참으로 송구합니다."
왕후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정비로서 혼인한지 벌써 13년째이건만 여태도 태기(胎氣)가 없었던 것이다. 왕후의 그 기색에 왕은 얼른 그녀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공주,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려. 하지만 걱정마시오. 그간은 원국과의 일이나 조정의 일로 왕후의 마음이 편치 않아 그리되었을 것이오. 이제 여기 안어대동의 땅에서 좋은 기운을 얻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오. 더구나 우리의 사랑이 이처럼 두터운데 어찌 하늘인들 무심하시겠소."
"그리 말씀해주시니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저도 이곳에 온 뒤부터 알 수 없는 좋은 기운에 공연히 마음이 설렙니다."
"하하, 좋은 일이오. 참으로 좋은 기운의 땅이오."
행궁 밖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지면서 하늘 가득 오색의 불꽃을 수놓았다. 성 안의 백성들이 왕과 왕후의 마음을 알아 축복해주는 듯 싶었다.
"보시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구려. 저것이야말로 우리 사랑의 꽃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아름다운 사랑의 땅에 오색 꽃비가 내리네.
하늘의 비가 만물을 적시듯 오늘 꽃비는 왕후를 적시소서.
저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면서 왕과 왕후는 천천히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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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 정 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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