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3> 김정현의 '부석사 용이 된 사랑의 여인 선묘낭자 (영주)'

  • 입력 2011-06-29   |  발행일 2011-06-29 제7면   |  수정 2021-05-29 19:14

#Story Memo

영주 부석사는 중국에서 유학한 의상 대사가 신라통일기인 676년 세운 한국의 화엄종찰이다.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이면서 ‘가장 웅장한 절집’으로 알려진 1300년 고찰이기도 하다. 부석사에는 의상 대사와 중국 여인 선묘 낭자에 얽힌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유명하다. 선묘는 당나라로 유학 온 의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불법을 공부하는 의상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의상은 선묘의 사랑을 거부하고 공부를 마친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다. 이때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진후 용이 되고, 의상 대사가 험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이 지역에 있던 500여명의 유민이 절 창건을 방해하자, 용이 된 선묘가 커다란 너럭바위를 들어올려 유민을 물리치고 절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 뒤쪽에는 당시 선묘가 유민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는 너럭바위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부석사의 용이 된 사랑의 여인 선묘낭자’ 스토리는 의상과 선묘낭자의 설화를 모티브로 재구성한 것이다.



서기 676년. 서라벌 남산 동쪽 기슭의 황복사(皇福寺)에 주석하여 화엄계를 강론하고 있던 의상(義湘)대사는 문무대왕으로부터 사찰 창건을 명받았다. 의상은 이미 문무왕 원년인 661년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672년 귀국하여 동해 바닷가에 낙산사를 창건한 바 있다. 왕명을 받은 의상이 향한 곳은 소백산맥 자락의 봉황산(鳳凰山)이었으니,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이 그곳이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격멸하고, 668년에는 평양성마저 함락시키면서 고구려를 멸하였다. 그러나 군사적 연합에 그쳐야 할 당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면서 지배권을 행사하려 들었으니, 신라는 진정한 통일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그들을 몰아내야 했다. 이에 문무왕은 명장 김유신에게 당을 몰아낼 것을 명하여 그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신라는 거대 중원세력인 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당나라 군사의 배면을 괴롭히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한편 소백산 자락 봉황산 인근의 땅은 죽령을 축으로 오랫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영주 땅이 본디 고구려 내이군(奈已郡)으로 시작되었다가 신라의 내령군(奈靈郡)이 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소백산맥 자락으로 들어선 의상은 비로소 왕의 깊은 내심을 깨달았다. 그저 명산에 대찰을 세우고자 하는 불심(佛心)만이 아니었다. 산속에서 마주치는 눈빛 번뜩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이 애달프고 받아들일 수 없어, 그 재건의 꿈을 꾸며 소백산맥 깊은 골짜기로 숨어든 유민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신라의 전략에 따른 것이든, 자발적이든 이미 당나라 군사와의 전투에도 이골난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당과의 전쟁도 막바지에 이른 즈음, 왕께서는 이들 유민을 불심으로 껴안으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봉황산에 이른 의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아서는 깊지도 않은 산중에 그저 민숭한 터인 듯 싶지만, 조금만 눈여겨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다. 멀리 서남쪽 하늘 아래로 소백산맥 연봉들이 우람하게 늘어선 모습이며, 그 안으로 봉황산을 포근하게 껴안은 듯 겹겹이 둘러싼 작은 봉우리들은 참으로 웅혼(雄渾)하고 수려(秀麗)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과연 이 땅에 자비로운 부처님의 뜻을 전할 화엄도량으로, 천년왕국 신라를 지켜나갈 호국사찰의 터전으로 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풍광이었다.

하지만 천년을 지키고, 만년을 이어갈 천생의 터전은 수월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신도 승려라면서 이미 터전으로 삼았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또 다른 무리들은 당장에 해코지라도 할 듯 시퍼렇게 날이 선 무기를 흔들면서 핏발선 두 눈을 부라렸다. 딴은 그들의 말도 그르지 않았다. 본디 땅의 주인이 없거늘 불 터전이라고 주인으로 정해진 승려는 없을 터. 그러나 그들은 부처의 자비심으로 불사를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恨)이 서려 있었다. 망국의 한, 님을 잃어버린 한…. 그 또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라 탓할 수 없는 일이니 왕명을 들어 군사의 힘으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은 통일대업을 눈앞에 두고 삼한의 민족 모두를 껴안고자 하는 왕의 본뜻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부처님의 자비심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고뇌 속에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하던 의상이 설핏 눈을 감았나 싶은데 화사한 옥색비단 당의(唐衣) 차림의 여인이 나타났다. 의상은 금방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 선묘낭자! 당나라에 계셔야 할 낭자께서 이곳 신라 땅에 어쩐 일이시오?”

“대사님. 저는 이미 대사님께서 등주(登州)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실으시던 그날, 용이 되었습니다.”

“용이 되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영문 모르는 의상의 물음에 선묘낭자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661년. 여러 난관 끝에 마침내 당으로 유학을 떠나 산동반도 등주에 상륙한 의상은 양주(楊州)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이때 먼 나라에서 화엄학을 배우러온 맑고 기품 있는 스님을 유지인의 딸이 연모했으니, 그녀가 선묘(善妙)였다. 하지만 아리따운 여인의 마음과 달리 의상은 오직 깊은 불심으로 화엄 수학에만 전념코자 했으니, 선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스스로 헤아렸다. 오래지 않아 의상은 장안(長安)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삼장(智嚴三藏) 문하로 들어가니, 선묘는 자신 역시 일생과 내생을 불법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상스님에게 귀의하기로 맹서했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스승 지엄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귀국길에 오른 의상은 등주에 들른 길에 유지인의 집을 찾았다. 전날의 은혜에 사례라도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불단 앞에 합장하고 염불삼매에 빠진 선묘의 뒷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두려워 등을 돌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그동안 의상에게 드리기 위해 한땀 한땀 정성들여 기운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넣어둔 상자를 들고 황급히 등주항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스님을 태운 배는 항구를 떠난 뒤였다. 망연히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그녀는 가사장삼이 든 상자를 스님이 탄 배에 전해지기를 바라며 힘껏 던진 뒤,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을 호위하리라’고 서원하면서 자신의 몸을 바다로 던졌다. 과연 그녀는 서원대로 용이 되었다. 그리고 황색바다 거친 뱃길은 물론 지금껏 의상의 길을 호위해 왔던 것이다.

뒤늦게 선묘낭자의 애절한 마음과 그간의 처연한 사연을 들은 의상은 이미 세속의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벗어난 법력에도 가슴이 아린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대사님. 저는 화엄의 세계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는 천배 만배 큰 것임은 어렴풋이나마 짐작합니다. 대사님의 뜻을 거스르고, 나아가실 길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벗어던질 수 없는 이 애착 또한 그만한 인연이 쌓인 까닭일 테니, 이 생애에서 대사님께 귀의하여 불법으로 구원받으려 합니다. 부디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어찌 소승이 낭자의 뜻을 탓하겠소. 오히려 그 깊은 불심에 합장할 뿐이오. 그러니 이제 그만 인연의 고리를 잊고, 부처님의 품으로 돌아가시오.”

“아직은 아닙니다. 대사님이 이곳 봉황산에서 이루시려는 큰일을 마무리지으시도록 도우려 합니다. 세속의 한이 깊은 사람들이라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되오. 이들은 나라 잃은 설움, 새 세상에 대한 의구심이 깊은 사람들이오. 특히 외세인 당과의 연합에 대한 노여움으로 부처님의 뜻마저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소. 이런 이들을 피로써 억누른다면 그것은 잠시 불씨를 잠재우는 거짓에 불과하오. 대왕께서 특별히 절을 세우시라 명하신 뜻도 그것이오. 나는 부처님의 자비심과 화엄세상의 뜻으로 이들을 위무할 것이오.”

“그처럼 깊은 뜻인 줄 모르고 하마터면 용력만 휘두를 뻔했습니다. 이제 대사님의 자비심을 깨우쳤으니 마땅히 용을 던지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홀연히 사라지는 선묘의 모습에 의상은 번쩍 정신을 차렸으나,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날이 밝자 다시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봉황산 중턱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날 벼린 칼이며 낫 따위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아니, 여느때보다 더욱 사나운 눈빛과 거친 고함으로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듯 보였다. 의상을 수행하는 관리와 시종들은 잔뜩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관리 중의 책임자는 당장 군사를 지원받자고 청했지만, 의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은 억누르면 그만큼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정히 사단이 벌어진다면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들 스스로 불법에 귀의하여 한을 삭이게 할 것이었다.

“앗, 대사님을 보호하라!”

한 순간 책임자의 다급한 고함이 들리더니 관리들 모두가 칼을 뽑아들었다. 무리의 사람들이 거칠게 짓쳐들어오는 것이었다. 의상은 몸을 던져 관리들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물러나시오, 칼을 거두시오!”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스님!”

그러나 순간, 실랑이를 벌이던 의상과 관리는 물론이고 무리를 지은 사람들까지 모두 기함하여 땅바닥에 몸을 엎드려야 했다. 천지를 가를 듯한 굉음과 함께 본존(本尊) 법당터로 염두에 둔 산자락의 집터 만한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바위는 귀를 찢을 듯 ‘윙∼ 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곧바로 무리 지은 사람들 위로 날아가 금방이라도 짓누를 듯 허공을 오르내렸다. 무리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산 아래로 도망치자, 바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받침돌 위에 내려앉았다. 관리와 시종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의상은 그것이 용이 된 선묘낭자의 신변(神變)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날이 밝자 사람들은 또 무리를 지어 올라왔지만, 그때마다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떠오르기를 며칠. 마침내 사람들은 불법의 신묘함과 지엄함에 감복하여 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위협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심열성복(心悅誠服)이었고 부처님을 향한 귀의였다.

의상은 귀의한 그들과 함께 불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 충심으로 힘을 모은 불사는 이내 산을 깎아 땅을 다졌고, 마침내 법당의 터를 잡게 되자 다시 너럭바위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금방 제 자리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받침이 되는 바위와의 틈에서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나타나 머리는 법당 터에 두고, 꼬리는 그 아래로 둔 채 숨을 거두었다. 이에 의상은 용의 머리 위에는 본존의 대좌(臺座)를 두게 하고, 꼬리 위에는 석등(石燈)을 세우라 하였다. 놀란 사람들이 의상에게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담담한 낯빛으로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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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화엄세상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도량을 수호하고자 용이 승천하지 않고 땅에 몸을 내렸으니, 먼저 사람들 마음 속의 원망과 한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오. 또 나는 이 도량을 부석사(浮石寺)로 이름하고, 화엄종찰로 삼을 것이오. 나무아미타불….”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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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창건을 방해하는 유민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 용이 된 선묘낭자가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는 너럭바위. 부석(浮石)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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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묘각. ‘이루지 못한’ 애틋한 러브스토리 때문인지 처연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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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묘각 안에는 선묘낭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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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법당 부처님쪽으로 두고, 꼬리는 마당 석등쪽으로 둔 채 묻혀 있는 석룡. 용으로 변한 선묘낭자가 죽어서도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부석사 석축공사 당시 발견됐는데, 현재 땅에 묻혀 있어 볼 수는 없다. <영주시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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