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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화양읍에 있는 성황사 창문 사이로 ‘김지대 수호신상’이 보인다. 성황사는 고려후기 명신인 영헌공 김지대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Story Memo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인 김지대(1190∼1266년)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문신이다. 특히 1217년(고종 4년) 3만명의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했다. 당시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시를 지어붙였다. 원수 조충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그를 중용했다. 장대한 체구에다 음악을 사랑하는 역동적인 그의 모습은 특히 시에서 빛을 발했다. 1218년 전주사록에 임명됐을 때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해 백성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했다. 현재 그의 무덤은 청도에 있으며,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청도 김지대 스토리’는 시와 함께한 그의 생애를 모티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 1
“아버지에게 군역이 떨어졌구나.”
어머니의 말에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거란군의 침입으로 전쟁 기운이 돌아 어수선할 때였다. 군역을 치러야 할 곳은 강동(江東). 거란군을 막아내야 할 일선이어서 참으로 위험한 곳이었다. 설령 전쟁이 나지 않더라도 군역은 피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바로 전쟁터로 가야 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의연했다.
“떠들지 마라. 내가 가면 되는 게 아니냐. 나라를 위한 일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이미 결심을 굳혀 입대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짓고, 친지들을 만나 당부할 것을 당부해 놓은 터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이때 지대가 결연하게 나섰다.
“제가 아버지 대신 군역을 치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너는 앞날이 창창하다. 혹 잘못 되면 집안이 거덜날 지도 모르는 일.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러니 나이 많은 내가 가는 게 옳다. 나는 살 만큼 살았고, 너 같은 자식들이 있으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아버지의 말은 결연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스물여덟의 청년입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라는 효의 원리를 뼈 속 깊이 새긴 접니다. 아버지를 전쟁터에 내몰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이 일은 제가 맡는 게 도리입니다. 저를 불효자로 만들지 마십시오.”
지대의 결심은 너무나 강해서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가족들도 울었다.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고 모두 기원하면서 붙든 손을 놓을 줄 몰랐다.
그렇게 입대한 그였다. 그는 풍채가 거대한 늠름한 군인의 모습으로 일신했다. 거란 토벌군의 총사령관격인 원수(元帥) 조충(趙沖)의 휘하에 들어 있었다. 짧은 훈련기간을 거쳐 바로 전장에 투입됐다.
당시 대부분의 군사들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 방패에다 호신용으로 기이한 동물을 그려넣기 일쑤였다. 용이나 호랑이, 또는 기린같은 것들이었다. 도깨비의 얼굴을 그려넣기도 했다. 전장에서 이들 수호신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부적같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지대는 그런 짓을 경멸했다. 그 대신 방패에다 시를 써놓았다.
國患臣之患 /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 忠孝可雙修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으리
이처럼 전쟁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이런 비범한 모습은 대번에 눈길을 끌었다. 마침 조충이 군사들을 점검하다 그의 방패를 보았다. 결연한 태도를 드러내는 힘이 넘치는 글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대는 누군가?”
조충이 물었다.
“김 여자(字) 홍자(字)의 아들 지대라 하옵니다.”
“그래, 그대가 바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온 그 청년이로군.”
조충은 그의 비범함을 바로 간파했다. 그리하여 언제나 그의 곁에 있게 했다. 덕분에 전쟁에서 그는 큰 역할을 해냈다. 공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에 무사히 집에 개선했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은 문재를 날리는 일에서도 쉬 드러났다. 그해 5월(고종 5년·1218년) 문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것이다.
# 2
그의 관직생활도 옳고그름을 확실하게 구분지으면서 당당했다.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있으면서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이들을 구휼했다. 또한 토호세력의 준동을 억제하고, 잘못을 제때 확실하게 적발해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했다. 약자에 대한 부드러움과 강자에 대한 단호함을 아울러 가진 뛰어난 목민관의 모습이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으면서 당대의 대학자인 최자 등과 교유했다.
1243년 전라도 안찰사로 임명됐다. 마침 진도에는 당시 최씨 정권의 집권자 최이(崔怡·최우와 동일인물)의 아들 만전(萬全)이 승려생활을 하고 있었다. 만전은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전횡을 일삼으며, 수하에 못된 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 통지(通知)라는 이가 특히 패악이 심했다. 통지는 자주 지대를 찾아와선 거만하게 청탁을 넣기 일쑤였다. 그 청탁을 지대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러니 만전에게는 지대가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한 번은 만전이 있는 절에 갔다. 그러나 만전은 거만하게 딴전을 피우며 아예 나와보지도 않았다. 지대가 마루에 올라서니, 마침 악기들이 눈에 띄었다. 그는 횡적(橫笛)으로 몇 곡조를 불었다. 능청스러운 가락을 뽑아내는 솜씨가 대단했다. 이어 거문고를 뜯고 두드리니, 그 흥청대는 소리가 자못 비장했다. 이 뛰어난 연주 솜씨에 만전이 절로 흥이 나서 나왔다. 그러고는 지대에게 “마침 사소한 병이 있어서 공(公)이 오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서 적의 마음마저 감복시킬 정도였던 게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대작했다. 취흥이 오르자 만전이 기회다 싶은지 은근하게 지대에게 말했다.
“마침 잘 만났습니다. 이 기회에 제가 몇 가지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만전은 열 가지가 넘는 청탁을 늘어놓았다. 지대는 그 중 몇 가지는 만전의 말대로 바로 시행했다. 들어줄 만한 것이니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일은 보류했다.
“나머지는 행영(行營)에 가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니, 통지를 보내주면 같이 살펴보도록 하지요.”
행영에 돌아온 지 며칠 후 통지가 왔다. 그러자 지대는 통지에게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을 당장 묶어라.”
“이보시오. 만전 어른의 심부름을 온 나를 이렇게 취급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소?”라며 통지는 바둥거렸다.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지대는 통지의 불법행위를 하나 하나 꼽았다. 통지가 계속 그의 말을 부정하며 뻗댔다. 그러자 지대는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을 강물 속에다 던져버려라!”
통지는 강물에 던져진 채 허우적댔다.
만전은 나중에 최씨 무인정권의 핵심으로 권력을 잡는 최항(崔沆)이다. 그가 집권한 뒤 지대는 계속 벼슬살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쩌지 못했다. 워낙 청렴한데다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관리로서 일관했기에 감히 꼬투리를 잡지 못한 게다. 지대는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북쪽 변방을 나가 군기를 세우고 민심을 토닥여서 몽고 군대의 침입으로부터 40여 성을 지켜냈다. 이후 정당문학이부상서(正堂文學吏部尙書)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날 때 조정에서는 그를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던 일. 당상관으로서 치사하는 경우에는 중앙의 예조나 해당 고을에서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었다)하고, 오산군(鰲山君·오산은 지금의 청도군)에 봉하였다. 1266년(원종 7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 3
앞서 보았듯,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호방한 성품으로 부도덕한 권력에 유연하면서도 오연하게 대응했다. 장대한 체구에다 음악을 사랑하는 역동적인 그의 모습은 특히 시에서 빛을 발했다.
절은 안개와 노을, 일 없는 가운데 있는데
겹겹산엔 푸른 물 듣고 가을빛 짙어가네
구름 사이 끊어진 돌길 육칠리나 이어지고
하늘 끝 먼 봉우리 천만으로 겹쳐 있네
차 다 마신 솥 처마에 조각달 걸려 있고
강(講) 끝난 바람 자리 종소리의 여운이 흔들리네
개울물은 틀림없이 벼슬아치를 비웃겠지
씻으려도 홍진의 자취 씻을 수가 없다고
비슬산 유가사를 읊은 시다. 격렬한 어조와 장중한 소리들이 어울려 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일품이다. 이런 그의 이채로운 시에 대한 평가는 일찍부터 컸다.
서거정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김지대를 고려 전기 및 무신정권기를 대표하는 시인 15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고 있다. 조선조 들어 나온 여러 사화집에도 그의 작품들이 빈번하게 소개되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는다. (참고 : 이종문 교수의 논문 ‘김지대의 생애와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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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사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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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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