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14> 이하석의 '가야금 병창 명인 박귀희 스토리 (칠곡)'

  • 입력 2011-09-14   |  발행일 2011-09-14 제7면   |  수정 2021-05-29 19:51

Story Memo
칠곡군 가산면에서 태어난 박귀희(1921~93)의 본명은 오계화(吳桂花)고 아명(兒名)은 장영심이다. 소리를 하기 위해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이름까지 바꾼 그녀는 판소리 명창 유성준에게 창을 배우고, 이어 가야금 명인 강태홍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다시 국악인 오태석의 문하에 들어가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사사했다. 창극에도 조예가 깊고 무용에도 뛰어나 한때 창극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국악교육에 깊은 뜻을 두고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으며, 60년에는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88년 국악예술고등학교의 발전을 위해 전 재산을 기증하기도 했다. 호남 출신의 소리꾼이 휩쓰는 국악계에서 영남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68년 가야금병창(伽倻琴倂唱)으로 중요무형문화재(제23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73년 국민훈장 동백장, 8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안숙선·강정숙·김성녀 등에 의해 그의 가야금병창곡이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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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귀희 명인의 생전 모습(왼쪽)과 칠곡군 가산면의 박귀희 생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거의 폐가로 남아있다. 박귀희의 소리인생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 복원은 물론 제대로 된 관리가 시급해 보인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1

“그래, 성과 이름까지 바꿔서라도 기어이 소리를 하겠단 말이지?”

아버지는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딸이 소리를 하는 걸 막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다. 어쨌든 장씨 집안의 성을 그대로 달고 나갈 수는 없었다. 박귀희.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이름까지 바꿨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았다. 마음대로 소리를 하게 된 것이다. ‘소녀 명창’ 소리를 듣는 마당이다. “명창이 났다”는 소리를 벌써 들었으니, 그녀의 길이 그렇게 정해진 게다.

일찍 대구로 왔다. 봉산동에 있는 외갓집에서 대구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학교 가는 길목에서 늘 애절한 노랫소리가 났다. 소녀는 그 소리에 끌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갔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일 봉래 이 방장과 삼 영주 이 아니냐

죽장 짚고 풍월 실어 봉래산을 구경할 제

경포 동령에 명월을 구경하고

청간정 낙산사와 총석정을 구경하고

단발령 얼른 넘어 봉래산을 올라서니…



중모리 장단에 맞춰 부르는 구성진 소리가 마음에 물결이 일게 했다. 속으로 따라 불렀다. 몇달을 학교를 오가면서 그렇게 노래를 제 안으로 불러들였다. 크게 소리내어 따라 부르기도 했다. 때로 학교 가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그 소리에 젖어 있기도 했다. 그 집의 소리 선생 손광재가 그런 소녀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안으로 소녀를 불러들였다.

“노래를 할 줄 아느냐?”

“잘 모릅니다.”

“그래도 아는 데까지 해보아라.”

소녀는 귀동냥으로 들은 단가 ‘만고강산’을 불렀다. 손광재의 눈이 커졌다.

“허어, 네 소리는 3~4년 배운 이보다 낫구나. 대구에 소녀 명창이 나왔구나.”

소녀는 그의 문하에 든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손광재는 소녀를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에게 소개한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 가극단 소속으로 그녀는 비로소 사람들 앞에 선다. 데뷔를 한 것이다. 빨간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만고강산’을 노래하자, 객석에서 떠나갈 듯 갈채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쯤 되어서야, 한학을 하는 완고한 집에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이름을 박귀희로 바꾼 채 그녀는 소리의 바다로 풍덩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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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귀희 명인의 공연 모습.

#2
끝없는 공부에의 열정이 그녀의 마음을 달구었다.

두 해 동안 대동가극단 소속으로 전국은 물론, 만주와 훈춘 등지를 떠돌며 공연을 하다가 소리공부를 더해야 한다는 절실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명창이 되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오죽하면 닭고기를 먹어도 소리가 잘 나라고 닭목의 울대만 찾아 먹을까?

가극단에서 장판개와 이화중선에게 틈틈이 배웠으나, 더욱 소리를 확장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1935년 대동가극단을 떠나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병창을 사사하고, 오태석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운다. 박동실에게 판소리 ‘흥보가’ ‘심청가’를 배운다. 창악(唱樂)을 배운다.

“한 번 시작한 공부니 끝을 봐야지”라고 그녀는 마음을 다잡는다.

화원의 용연사에서 백일을 벼르고 득음을 위한 소리공부를 해낸다. 하동 쌍계사로 가서 또 백일을 버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녀는 비로소 득음의 한 소식을 얻어낸다. 류성준과 이기권의 판소리에도 빠진다.

그녀의 득음 소식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보기를 청한다. 서울로 올라갔다. 1938년, OK레코드사에서 ‘천하태평가’와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취입했다.

1939년 동일창극단에 참여하여 사극인 ‘일목장군’의 남자 주인공역을 맡아 분장하고 출연했다. 처녀무대의 여창남역(女唱男役)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인기를 독차지했다. 창극계에서 여창남역은 박귀희가 효시다. 1940년에는 조선일보사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다. 그녀는 이에 머물지 않고 다시 공부를 계속한다. 그런 공부를 바탕으로 그녀는 국악 지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해방 후 박녹주·상의·김소희·임춘앵·김경희와 함께 여성들로만 만들어진 창극단인 여성국악동우회를 창설하고, 국악원 산하에 조선창악회를 창업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판소리를 주로 닦아왔지만, 가야금 가락에 판소리 한 대목씩을 얹어서 부르는 가야금 병창에도 명인의 경지에 든다. 특히 창극단 생활을 하는 틈틈이 가야금 병창의 일인자이며, 창극계의 명배우였던 오태석에게 열심히 가야금을 익혀 나중(1971년)에 그 법통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로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부문의 인간문화재, 곧 중요무형문화재(23호) 예능보유자가 된다.


#3
‘가야금 병창 명인 박귀희가 거금 24억원을 국악계의 후진 양성을 위해, 국악예고의 이전기금으로 내놓았다’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93년이었다. 그녀가 운영하던 유명한 운당여관을 내놓은 것이다. 운당여관의 당시 시가는 16억원. 이 돈으로 국악예고의 이전기금이 모자라자, 다시 대전의 농토(당시 시가 8억원)도 내놓았다.

박귀희 만년에 해치운 가장 큰 일이기도 했다.

운당여관이 예사 여관인가?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던 ‘구름 속의 집’ 운당(雲堂)여관은 서울 풍류문화의 중심적인 위상을 유지해온 집이다. 원래 조선 후기의 양반 가옥이었던 것(일설에는 예전 내시의 궁이었던 건물이라 전하기도 한다)을 1951년 박귀희 부부가 인수, 이웃집들을 함께 사들여서 여관으로 개업했다. 450평 한옥에 객실 31개인 운당여관은 서울의 전통명소였다.

특히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머물고 싶어한 전통 숙박시설로 유명했다. 1959년 한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전이 열리면서 바둑의 명대국장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에서 각종 기전(棋戰)의 타이틀매치만도 400국 이상이나 개최됐다.

박귀희는 이 집을 30여년 간 직접 운영했다. 덕분에 그녀의 만년은 풍족했다. 그리하여 죽기 직전에 그 많은 재산을 박헌봉·박초월 명창 등과 함께 설립한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쾌척한 것이다. 이 학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남달랐다. 그 전신은 한국민속예술학원이었다.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김소희·박초월·한소희 등과 함께 설립하여 초대원장을 맡았다. 이 학원이 3년 동안 학생수가 780명으로 늘어나자, 학교를 세워도 되겠다고 확신한 그녀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경방(京紡)의 김용완 회장, 전방(全紡)의 김용주 회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해 마침내 1960년에 설립했다.

이처럼 이 학교를 통한 후진 양성 의욕이 남달랐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선뜻 내놓는 흔치 않은 일에 세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으리라. 그리고는 자신을 꽃피울 수 있었던 국악의 발전에 제 모든 걸 걸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화문석을 깐 무대에 앉아 무릎에 가야금을 올려놓고, 어깨춤을 추면서 손으로 가야금 줄을 희롱하는 그 몸짓은 너무도 화사하고 흥겹고 교태가 흘러넘쳤다”고 그녀를 아는 후배들은 기억한다.

가야금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소리를 울려냈던 악기가 아닌가. 그 가야금 줄에 전 생애를 태우고, 그녀는 멋지게 한 삶을 풀어냈던 것이다. 판소리로 닦은 목소리와 창극으로 다진 몸짓, 가야금 연주로 익은 우아함이 한 데 어우러진 자태가 참으로 볼 만했다. 그런 그녀에게 제자들이 몰려든 건 당연한 일이다. 제자 복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현 판소리계의 최고봉인 안숙선 명창을 비롯해 연극과 마당놀이와 뮤지컬 배우인 김성녀도 그녀의 제자다. 강정숙·오갑순 등도 그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운당여관을 흔쾌하게 내놓은 바로 그해 여름에 그녀는 별세, 더할나위 없는 풍류의 삶을 마감했다.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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