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15> 조정일의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 스토리 (울릉)'

  • 입력 2011-09-21   |  발행일 2011-09-21 제7면   |  수정 2021-05-29 19:54

Story Memo
울릉군에서 태어난 홍순칠(1929~86)은 민간의용대였던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장으로 유명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입대했지만, 부상을 당해 1952년 특무상사로 전역한다. 전역한 뒤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온 그는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 다케시마(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 표목’ 사건을 계기로 53년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 독도로 들어간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는 모두 45명으로, 홍순칠이 대장을 맡았다. 이후 홍순칠의 독도의용수비대는 53년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의 귀향조치를 시작으로 일본 순시선의 독도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특히 54년 11월에는 1천t급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함이 비행기 한 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 접근했지만, 독도의용수비대와 경찰경비대의 항전으로 독도를 지켜내기도 했다. 무기 조달이 어려워졌을 때는 포구 직경 20㎝ 크기의 나무대포를 설치, 일본 함정을 위협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53년에는 독도의 동도 바위 벽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알리는 ‘한국령(韓國領)’이란 글씨를 새겨넣었다. 56년 12월 정부에 독도 수비를 인계하고, 3년8개월 만에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은 86년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독도사랑을 실천했다. 영남일보의 홍순칠 스토리는 그가 보낸 3년8개월간의 독도수비대 생활을 모티브로 재구성됐다. 

 

 

20110921
홍순칠 대장(가운데)이 대원들과 함께 독도 관측소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1 1952년 여름, 홍순칠(洪淳七)은 4년 만에 고향 울릉도에 돌아왔다. 원산에서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 명예제대를 했다. 병원에 누워있는 긴 시간 동안 스물셋 청년 홍순칠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봄이 되면 상처도 아물 테고, 그때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절뚝거리고는 있지만, 그는 살아왔다. 지팡이를 잡은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잠시 서서 심호흡을 해봤다. 화약 냄새를 맡고 총성을 들은 것도 까마득한 일이 됐다. 아직 바다 저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육지와 아득히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또 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200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경찰서 앞마당에 모여 항의 중이었다. 울릉도에서 이만한 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라면 예삿일이 아닌데, 경찰서장은 쩔쩔매고만 있었다. 홍 순칠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봤더니 커다란 푯말 하나가 담벼락에 기대어 있었다.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 다케시마(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

일본 함정이 독도에 꽂아놓은 것을 어민이 신고해 경찰이 가서 뽑아 왔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일본에 대응한다며 군청에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大韓民國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라고 쓴 푯말을 세우면,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일본 함정이 나타나 뽑아버리고 또 저들의 푯말을 꽂아두고 간다는 것이다. 독도 가까이서 조업하다가 일본 함정에 쫓겨나는 일도 빈번했다. 어민들의 민원이 빗발치는 것이 괴이한 일이 아니었다. 생활전선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섬사람들이다. 하지만 경찰서장과 군수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정부에 요청해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일본의 횡포와 정부의 무력함에 사람들은 격앙돼 있었지만, 당장 경찰서 앞마당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홍순칠은 경찰서에서 봤던 일을 조부 홍재현(洪在現)에게 이야기했다. 조부는 혀를 찼다. 

 

 

20110921
독도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홍순칠 대장.


“이 땅이 뉘 땅인데… 육지 사람들이 땅을 아끼듯이 우리 울릉도 사람은 바다가 문전옥답인 것을. 가을에 참새떼가 설치면, 농가에서는 참새떼를 쫓으려고 교대로 논밭을 지킨다. 하물며 도둑이 들어와서 곡식을 마구 걷어 가면 누가 보고만 있겠어? 독도를 뺏겼다 하는 것은 바로 내 논밭을 뺏긴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지.”

조부는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 개척령으로 바뀌면서 강릉에서 울릉도로 이주해 왔다. 개척민 1세대로서 독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할아버지, 아무도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가 독도를 지키면 되지 않을까요?”

홍순칠은 십리 길을 걸어오면서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아흔 살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잡았다.

“순칠아, 네 이름의 칠자(七字). 네 어미가 일곱 달 만에 너를 낳았어. 너를 그냥 뒀다면 죽어 호박밭 밑거름에나 쓸 걸 내가 살렸다. 그 뜻에서 칠자를 붙인 거야. 그러니 너는 멋진 일을 해야 돼.”

한 달 뒤, 제대군인과 상이용사로 구성된 재향군인회 울릉연합분회가 결성된 자리에서 홍순칠은 결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우리는 개척민의 후예들입니다. 정부가 전쟁으로 독도에 손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서 일본놈들이 독도를 삼키려 합니다. 비록 성한 몸은 아니지만,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킵시다.”


#2
각오는 했으나 독도에서의 생활은 고역이었다. 독도를 지키러 간다고 할 때 울릉도 사람 전부가 응원한 것도 아니었다. ‘저런 미친 놈들이 있나. 거기 가서 뭐하겠다는 짓이야?’ ‘나라에서 책임져야 할 일을 저희가 왜 나서?’ ‘그냥 놔두면 섬 뿌리가 뽑혀서 일본놈들이 독도를 주워가기라도 한대?’ 홍순칠이 장정들을 꾀어 제 잇속을 차리려 그런다는 말도 나돌았다.

53년 봄, 독도의용수비대는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독도에 도착했다. 경찰이 빌려준 총기 몇 점과 홍순칠이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구해온 무기를 들고, 서쪽섬(西島)에 진지를 처음 만들었다. 물이 나는 샘이 있어서였는데, 정작 식수로 적합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일본을 접한 바다 동쪽이 잘 보이지 않아 동쪽섬(東島)으로 이동했다. 동도 정상에는 일본 해군이 러·일전쟁 때 망루로 쓰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진지를 만들고, 바다로 내려가는 통로를 파괴했다. 대원들이 내려가기도 힘들게 됐지만, 침입자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대원들은 줄사다리를 걸고 절벽을 오르내리기로 했다. 수비대는 2개조를 운영하면서 독도에서 20일씩 교대로 근무를 섰다. 10여명의 대원이 나무판자로 만든 숙소에서 담요 만 깔고 잠을 잤다. 먹을 물도 모자란 판이라 몸을 씻는 것은 꿈이었다. 일기가 불순해 보급이나 교대가 늦어지면 미역을 채취해 멀건 죽을 쑤어 먹으며 버텼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고, 바닷물을 끓여 증류수를 얻는 요령도 생겼다.

그해 여름, 새벽안개 속에서 일본의 1천t급 함정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홍순칠은 두 명의 대원과 함께 1t짜리 배에 기관총을 걸고 결사대가 되어 함정으로 돌진했다. 다른 대원들은 진지에서 엄호사격을 했다. 일본 함정은 총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라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함정의 반격은 없었지만, 거대한 스크류가 뿜어낸 집채 같은 파도에 하마터면 결사대가 타고 있는 배가 뒤집힐 뻔 했다. 함정이 영 가버린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오자, 진지에 있던 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승리에 감격한 수비대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자축파티를 미룰 수 없었다.

그 무렵, 동족간의 전쟁은 완결되지 못한 채 휴전에 들어갔다. 일본 함정은 한 달에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 멀리 모습을 보이고 사라졌다. 그들은 독도 어느 곳에도 다케시마(竹島)라는 푯말을 세우지 못했다. 이듬해 6월, 수비대는 동도 암벽에 ‘한국령(韓國領)’이란 글씨를 새겨 넣었다.

20110921
독도의용수비대원들과 함께 동도와 서도 사이 해안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3
54년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 함정이 자주 출몰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가까이 와서 정탐을 했다. 경고사격으로 몇 차례 물리쳤지만, 이상한 긴장감이 돌았다. 수비대는 그들 나름의 방어술로 대포를 배치했다. 진짜 대포가 아니라, 막사를 짓고 남은 소나무로 가짜 0대포를 만들었다. 포구 직경 200㎜, 국방색을 칠한 소나무 대포는 포신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곁에서 봐도 대포로 착각할 만큼 진짜와 비슷했다. 결국 이 대포가 실전에 사용되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놀랍게도, 진지의 정면과 좌우에서 일본 함정이 동시에 다가왔다. 함정이 세 척이나 동원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정찰기 두 대가 독도 상공으로 날아들었다. 날개에 매달린 폭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독도수비대는 함정을 향해 박격포를 날리고, 총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저공비행을 하면서 위협하는 정찰기를 향해 소나무 대포를 겨누었다. 수비대의 총격과 비행기의 굉음으로 동도 정상의 대원들은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일본 함정 한 대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멀어져 갔다.

일본 NHK방송은 이날 충돌로 일본 함정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일본의 한 월간지에는 ‘독도에 거포 설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20110921
동도 경비초소로 올라가기 전에 위치한 바위.‘한국령’이라고 새겨져 있어 대한민국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4
봄이 되면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 왔다. 3개월 동안 머물며 미역을 따고 전복을 줍는다. 미역을 내어 말리는 통에 동도와 서도 가릴 것 없이 독도는 미역으로 새까맣게 변했다. 맑은 물속을 물개처럼 싱싱하게 잠수하는 해녀 구경하는 것은 수비대원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개중에는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온 해녀도 있었다. 홍순칠은 돌보는 이 없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이 자꾸 마음에 쓰여 쌍안경으로 지켜보았다. 해녀는 물질을 하고 나와 물가에서 기다리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는 다시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역을 따고 전복을 줍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지 또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한 아이는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다. ‘왜 안 나오지? 내려가 볼까’ 홍순칠이 망설일 때, 다시 해녀가 나타나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젖을 빨다가 스르르 잠드는 아이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사라진 해녀와 너른 바위에 앉아 노는 아이, 잠든 아이. 바닷물에 젖지 않는 돌이 아이들에겐 가장 편안한 자리로 보였다. ‘독도를 지키는 것은 우리들 만의 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돌섬이 어미를 기다리는 저 아이들을 품고 있어. 독도가 저 사람들을 지키고 있구나.’ 홍순칠은 동도의 깎아지른 바위절벽 위에 가슴을 대고 그렇게 생각했다.

“대장,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한 대원이 얼마전부터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제 이름만 간신히 기억했다가 적을 줄 알던 사람이 ‘독도’ ‘의용수비대’부터 배워 나갔다. 방금 근무교대를 했는데, 웬일인지 막사로 가서 쉬질 않고 근무일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내가 적었는데, 안 틀리고 제대로 썼나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자기가 직접 쓴 글자를 들춰보고, 또 들춰보는 모양이었다. 근무일지에 무슨 고백이라도 써놨을까.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홍순칠은 짐짓 태연하게 대답했다.

“근무 중, 이상 없음! 이렇게 써 있군.”

“정말입니까? 홍 대장, 내가 맞게 쓴 겁니까?”

검게 탄 얼굴에 비로소 두 눈이 하얗게 커지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을 보고는 홍순칠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56년 겨울이 깊어갈 무렵,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는 국립경찰에 독도 수호임무를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왔다. <극작가>

공동기획 : pride GyeongBuk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