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22> 이상국의 '왜란 전쟁공신, 칼을 놓고 詩를 잡다 - 영천의 大가객 박인로 스토리'

  • 입력 2011-11-09   |  발행일 2011-11-09 제7면   |  수정 2021-05-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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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있는 도계서원 전경. 가사문학의 대가 박인로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농사철인 데도 경작을 할 소가 없어, 밤중에 이웃집에 소를 빌리러 간다. 작년에도 빌려 염치없지만 하는 수 없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이 하는 말. 어제 다른 집에서 꿩 잡아와서 대접을 해주는 바람에 그곳에 빌려준다고 이미 선약을 했다고 한다. 힘없이 헌 모자를 꾹 눌러쓰고 다 떨어진 짚신을 발에 꿰고 있는데, 이 집 개가 거지인 줄 알았는지 다가와 캥캥 짖는다. 집에 와서 밤새도록 날을 갈아놓은 쟁기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아침이 되어서는 이웃집에서 부르는 농요(농사일 하며 부르는 노래)에 또다시 피눈물을 낸다.’

이것이 박인로(朴仁老·1561~1642)가 쓴 ‘누항사’의 절정 대목이다. 고리타분한 안빈낙도, 뜬구름 잡는 충효애국만 읊었다고 누가 그를 비웃는가. 이 시는 당대의 명재상 한음 이덕형을 울린 시이기도 하다.

경기도 남양주(당시 용진(龍津)) 운길산 남쪽에 있는 송촌리(당시 사제(莎堤)). 51세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 마루에 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최고 정치인 이덕형은 천하의 지음(知音)을 다시 만난 듯 살가운 표정으로 박인로에게 물었다.

“그래, 요즘 시골생활은 어떠신지?”

그러자 이 시인은 저 ‘누항사’를 읊었다. 이덕형이 소맷자락으로 눈시울을 찍자, 그는 말했다. “내 비록 살이는 궁하여 무하옹(無何翁·대책없는 늙은이)일망정, 마음의 평정까지 팽개친 건 아니외다. 깨끗한 선비로 안분(安分)의 도를 즐기는 일은 잊지 않고 있소이다.”

“그래요. 그대 노래는 청빈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듯하오. 하지만 그 실상이 너무나 생생하고 피눈물 나는 가난이 그대로 전해져오니, 이 시는 가히 당대 현실을 품은 절창이라 할 만하오.”

10년 전 이덕형이 도체찰사(道體察使·비상시 지역을 돌며 군사와 행정을 점검하는 중앙관리)가 되어 순시할 때 박인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영남의 빼어난 학자였던 여헌(旅軒) 장현광도 있었다. 여헌은 늦깎이 제자인 박인로를 데려가면서 그의 시조 한 편을 소개했다.



반중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입니다 /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그를 설워하노라
- 조홍시가(早紅枾歌)/박인로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시조를 들으면서 갑자기 이덕형은 눈물이 핑도는 것을 느꼈다. 왜란으로 쑥밭이 된 민심을 살피는 공무를 수행하려 내려온 그였지만, 갑자기 난리통에 김포 통진에 급히 모셨던 어머니 문화유씨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생각났다. 스물 여덟살의 나이로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백암산 바위에서 뛰어내린 아내 한산이씨(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둘째딸)였다. 그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박인로에게 말했다.

“참으로 절절한 시입니다. 중국 오나라의 여섯살짜리 육적(陸績)이 어머니에게 드리겠다며 원술의 집에서 귤(유자) 세 개를 품 안에 품고 간 것 만큼이나 애틋한 효심이구려.” 장현광이 말을 이었다. “시골에서도 효행으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박인로가 말했다. “과한 말씀입니다. 어린 시절 무던히도 어머니(웅천주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권했는데, 저는 무술 놀이만 했습니다. 다행히 기억력이 쓸만 해서 그 무릎 아래 붙잡혀 읽었던 글들이 남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시조를 한 수 더 읊어줄 수 있겠소?” 이덕형의 부탁에 박인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왕상(王祥)의 잉어 잡고 맹종(孟宗)의 죽순 꺾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老萊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養志誠孝)를 증자(曾子)같이 하리이다



겨울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왕상과 눈 속에서 죽순을 찾아내 봉양한 맹종의 효도, 나이 일흔에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노래자의 고사를 언급한 데 이어 역대 최고의 효자로 치는 증자까지 거론하며 효에 대한 깔끔한 스토리텔링을 펼친다.

박인로가 문득 말한다. “대감의 시조(광주이씨) 산소가 있는 곳과 제 조부의 묘소가 지척(咫尺)입니다. 대대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요. 이런 효자를 부근에 두었으니 그 또한 좋은 인연이로다.”

이 일이 자극이 되었을까. 이덕형은 서울로 올라간 뒤 모친의 묘소를 이장하는 일을 서두르고, 그 일을 위해 조정에 벼슬을 사임하는 청원을 내기도 한다. 10년 뒤 박인로는 이 ‘잘 나가는 벗’이 정치적 좌절에 빠져 은거하고 있을 때 그를 격려하기 위해 경기도로 달려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한음 이덕형의 삶과 정신을 힘있게 돋을새긴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지었다(한음의 한시를 한글 가사로 번역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노래는 서른하나의 나이로 최연소 문형(文衡·대제학)을 지낸 천재 정치가 친구에게 바친 최고의 선물이었다.



박인로는 가사 7편과 시조 54편을 남긴 조선의 대시인이다. 가사 작품은 송강 정철보다 많고, 시조 작품은 고산 윤선도와 맞먹는다. 그런데 이런 왕성한 시작활동은 대개 쉰이 넘은 뒤에 이뤄진다. 젊은 시절에 그는 무엇을 했던가. 박인로는 직업군인, 즉 무관(武官)이었다. 이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했고, 전란 이후 서른 아홉살에 무과시험에 합격해 수문장과 선전관을 지냈다. 거제도에서는 만호(萬戶)로 부임해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무(武)의 전반전과 문(文)의 후반전이 확연하게 갈린다. 하지만 우리는 박인로의 가사나 시조만 기억하지, 그의 뜨거웠던 전쟁과 목숨을 건 애국심에 관해선 어느 새 잊어버렸다. 오늘은, 피끓는 군인 박인로를 찾아가보자. 열세살 박인로는 가도(賈島·중국 당나라 시인)와 왕건이 쓴 ‘대승음(戴勝吟·뻐꾸기 우는 소리)’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별무늬 꽃모자 도사옷, 자양궁 궁녀가 변신해 나는 듯, 하늘에 봄소식 전하러 가느냐, 봉래산 도착하면 놔주지 않으리

星點花冠道士衣 紫陽宮女化身飛 能傳上界春消息 若到蓬山莫放歸 (가도의 ‘대승음’)

뻐꾹새야 누가 네게 이름 지었니, 나무 속 둥지파고 담위에서 운다
소리소리 내게 씨뿌리라 보채지만, 밭근처 인가까지 오고선 잠들진 않는다
자줏빛 모자 곱고 베옷은 얼룩무늬, 잠자리 물고 집을 날아 지나가네
백로가 가련하다 푸른 연못 가득하지만, 농사철 아는 건 뻐꾹새만 못하리

戴勝誰與爾爲名 木中作牆上名 聲聲催我急種穀 人家向田不歸宿
紫冠采采褐衣斑 銜得飛過屋 可憐白鷺滿綠池 不如戴勝知天時 (왕건의 ‘대승음’)



소년은 생각했다. “가도의 시는 멋만 부렸지 뜻이 크지 못하군. 하지만 왕건은 달라. 농사철을 아는 건 백로가 아니라, 뻐꾹새라는 건 백성의 마음을 알아채는 왕을 노래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깜빡 낮잠에 들었다. 그런데 마침 창 밖에서 뻐꾹새 소리가 들려와 잠을 깬다. 그래서 박인로는 시를 읊는다.



낮잠 자는데 뻐꾹새가 놀래키네, 어찌 너는 촌사람한테 일하라 뻐꾹거리느냐

서울의 대갓집 지붕마루에서 울어, 사람들이 밭갈이 권하는 새 있다는 걸 알게 하지

午睡頻驚戴勝吟 如何偏促野人心 啼彼洛陽華屋角 會人知有勸耕禽 (박인로의 ‘대승음’)

소년이 쓴 시를 보고, 부친 박석이 깜짝 놀랐다. 이는 중국 시인 가도를 뛰어넘었고, 왕건의 시의(詩意)에도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뻐꾸기라는 시적 모티브는, 그의 생애 후반에 이덕형에게 들려주었던 ‘누항사’의 비극을 고조시키는 소재로 다시 등장한다.

한편 부친은 아들이 세상을 향한 큰 뜻이 있음을 보고 글공부를 독려했으나, 그는 동네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느라 쏘다닐 뿐이었다. 그가 서른 두 살이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부산 동래와 울산, 경주가 순식간에 함락됐다. 그의 마을인 영천까지 왜군이 몰려오자, 그는 의병장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부대로 들어가 별시위라는 직책을 맡고 활약했다. 정세아 부대는 박연전투, 영천성 탈환, 경주전투에서 승리해 낙동강 일대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군인 박인로는 열악한 전쟁 조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왜적을 죽이면서 군비(軍備)와 무(武)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 뒤 서른여덟 살(1598년) 때 수군절도사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갔다. 전투 때마다 빼어난 지략으로 상관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이곳에서 ‘태평사(太平詞)’를 지어 긴긴 왜란에 지친 병사들을 위로한다.

‘전쟁을 끝마치고 세류영(細柳營)에 돌아들 때 태평소 드높은 소리에 북 나팔이 어우러지니 수궁 깊은 곳의 고기떼도 웃는구나’라고 읊었던 그 가사처럼 이듬해 전쟁이 끝났다. 그는 수훈을 세운 전쟁유공자였지만, 녹다운된 나라에 그걸 기대할 순 없었다.

1599년 서른아홉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도의 한 포구인 조라포의 말단부대 지휘관(만호)을 맡는다. 월급도 없고 토지도 주어지지 않아 궁핍했던 관직이었다. 하지만 그는 희생적인 리더십으로 부하들을 감동시켜, 퇴임 때는 그곳에 그의 치적을 기리는 비석까지 섰다.

마흔다섯살 때에는 부산에 통주사로 부임한다. 이곳에서 그의 양대 전쟁가사 중의 하나인 ‘선상탄(船上嘆)’을 짓는다. 이 시에는 배를 만든 헌원씨와 일본 종족의 기원을 만들어준 진시황을 원망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전쟁의 염증을 표현한 반전(反戰)의 노래인 셈이다. 이즈음 그에게도 큰 각성이 찾아온다. 전란을 수습해가고 있던 조선정부는 다시 무(武)보다 문(文)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을 옮겨가고 있었다.

이보다 훨씬 뒤인 18세기 군인이었던 노상추는 그의 일기에서 무인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유학자들은 무부(武夫)를 비류(鄙類·천한 무리)라 칭한다. 염치도 없고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며 오직 주색만 좋아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양반(兩班)이 문과 무 양쪽을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그 대접은 사뭇 달랐다. 박인로는 전쟁을 치른 군인이자 전후의 긴장된 병영에서 복무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숭문(崇文)의 세상에선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력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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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 학당. <영남일보DB>
그는 무기를 놓고, 붓을 들기로 결심했다.

“사내의 사업이 대문장에 이르는데 있거늘 어찌 궁마(弓馬)의 일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그의 뼈저린 한마디다. 우리가 박인로를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투철한 변신이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증좌(證左)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향을 피우며 묵상하다가 어느날 꿈 속에서 옛 성현이 전해주는 충(忠)·효(孝)·성(誠)·경(經) 네 글자를 받고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쉰두살 때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를 참례하고, 쉰아홉살 땐 퇴계의 제자인 정구(鄭逑)와 함께 온천욕을 하면서 시조를 지었다.

또 경주의 회재 이언적을 흠모하여 양동마을에 들러 가사 ‘독락당’을 남겼다. 예순아홉살 땐 스승인 장현광과 입암정사에서 청담(淸談)을 나누며, 시조 29수를 읊기도 한다. 1642년 여든두살로 노계(蘆溪·그의 호가 되었다)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슴 속에 칼과 현(絃)을 함께 품었던 영남의 곧은 선비는, 음전한 시(詩) 속에 그의 깨끗한 이름을 묻었다.

<스토리텔링 전문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Story Memo
영천의 박인로를 만나는 지름길은 그의 절창(絶唱)에 있다. 가사 ‘누항사’, 시조 ‘조홍시가’ 그리고 천재적인 한시 ‘대승음’을 스토리 속에 살아숨쉬도록 하는 게 이 위대한 시인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그의 위패를 모신 도계(道溪)서원이 있다. 서원에는 선생의 문집 목판각이 보관되고 있으며(이 문집을 정리한 사람은 동학교주 최제우의 아버지 최욱이다) 사당 앞에는 ‘노계가’ 시비(詩碑, 1980년)가 세워져 있다. 독일 최고문학사전인 ‘킨들러사전’에 대한민국의 고전문학가 8명이 실렸는데, 거기 박인로의 이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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