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23> 이하석의 '심산 김창숙 휴머니즘 스토리(성주)'

  • 입력 2011-11-16   |  발행일 2011-11-16 제11면   |  수정 2021-05-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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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은 워낙 유명한 분이라 새삼 무슨 소개가 필요하랴?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장에 능했지만, 책상물림의 선비가 아니라 “성현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할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짜 선비”라며, 분연히 현실 참여에 몸을 던졌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는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의 목을 베자’며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리고 일진회를 성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독립선언서 발표 참여자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인사가 한 명도 없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결국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를 파견시켜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곽종석 등과 의논, 137명의 유림이 연명한 ‘유교도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심산은 직접 이 문건을 전하기 위해 파리행을 감행, 중국 상하이까지 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파리와 각 우방국은 물론, 국내의 각 향교로 우송했다. 유명한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한 것. 일경은 이에 놀라 뒤늦게 유림단 검거에 나섰다.

중국 망명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국내로 돌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에는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투옥됐고, 출옥 이후 중국에 다시 건너가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맡았다. 단재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1927년 상해에서 일경에 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1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됐다. 그는 스스로 ‘벽옹’(앉은뱅이 늙은이)이란 호를 붙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김구와 뜻을 함께했으며, 성균관대학을 세워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사건으로 40일 동안 수감됐다. 이듬해에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62년 5월 노환으로 영면했다. 향년 84세. 그의 삶은 조국을 위한 불꽃 같은 저항의 삶이었다. 그의 삶을 조명하는 자료가 워낙 많은 만큼, 여기서는 그에 관한 에피소드를 떠올려 곧은 성정과 인간미를 아울러 드러내본다.

Story #1 : 일본인도 그를 ‘선생’으로 불렀다

1927년 왜경에 잡혀 대구 달성감옥에서 지낼 때다. 고문이 심했다. 심산은 “지필묵을 갖다 달라”고 했다. 왜경이 글로 설토를 하는가 싶어 붓과 종이를 주자, 그는 태연히 시 한 수를 썼다.


광복 위해 뛰어다닌 10년 세월

가정도 생명도 다 팽개쳤네.

뇌락(磊落)한 일생은 백일(白日)처럼 분명한데

괴로운 온갖 고문이 웬 말이냐



시를 읽은 일본인 과장은 심산에게 경례를 보냈다. 그 이후로는 언제나 그에게 선생이라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고문도 훨씬 덜해졌다.

재판 때 판사가 본을 묻자, “나라 잃은 백성이 본적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했다. 일본이 주선해준 변호사도 “일본 놈의 포로 신세가 된 것도 치욕인데 살려고 변호를 받다니”라며 거절했다. 이 때 쓴 시 한 편이 잘 알려져 있다.



병든 몸 구차스레 살려 안 했는데

달성감옥에서 몇 해를 묶여 있네

어머니 가시고 아이는 죽으니 집은 망했고,

아내는 흐느끼고 며느리 통곡하니 꿈결에도 놀라는구나

Story #2 : 나라 빚 갚자고 돈 모았더니

한말 국내에서 담배 끊기(斷煙) 운동이 벌어졌다. 담배를 끊는 대신 담배 살 돈을 모아서 나라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다. 심산은 성주지역을 책임지고 이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중앙단연동맹회에 참석차 서울로 갔다. 그런데 이 모금이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는 당장 이 모임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Story #3 : 며느리에게 큰절을 올리다

심산의 독립운동에 큰일을 담당한 이로 며느리 손응교 여사를 꼽아야 한다. 17세에 시집와서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 일찍 죽자, 오직 시아버지 병 구완과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그 심부름이란 게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은밀하게 소식을 전하고, 편지를 전하는 임무였던 게다.

만주 등 중국으로 세 번, 국내에는 30여 차례를 다녔다. 만주로 갈 때는 애를 업고 갔는데,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편지를 포대기 안에 꼭꼭 숨겨서 다녔다.

심산이 요양차 백양사에 가있을 때다. 일본 경시청 순사들이 성주의 집에 들이닥쳤다. 손 여사에게 다짜고짜 종이를 내밀며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심산의 도장을 며느리가 갖고 있음을 알았던 게다.

“이 도장만 찍어주면 심산 선생에게는 중추원 참의 벼슬이 내릴 거요. 돈도 300만원을 줍니다. 당연히 독립운동을 한 죄과를 묻지 않겠소.”

“…”

“우리를 못 믿소? 이미 심산 선생의 허락을 받았소. 도장을 며느리가 갖고 있으니 찍어달라면 찍어줄 것이라 하셔서 왔소. 얼른 찍으시오.”

성화가 득달같았다. 그러나 손 여사는 주저했다. 자신의 집안인 경주 안강 양동의 친가에도 독립운동을 하는 이가 있는 데다, 평소 독립운동에 열렬했던 시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모릅니다. 본인에게 직접 도장을 받으세요.”

그러자 일경은 그녀를 잡아가 모진 고문을 했다. 손가락 사이에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 꽉 눌러댔다. 전기고문도 했다. 아이를 밴 상태였으니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잘 참아냈다. 나중에 아들을 낳아 업고 할아버지를 뵈러 백양사로 갔다. 심산은 며느리를 보자 반색을 했다. 기어 나와서는 며느리에게 큰절을 했다.

“아이고, 아버님. 이 무슨 일입니까?”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불같은 성정을 아는지라 뭔진 몰라도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벌벌 떨었다. 그러자 심산은 말했다. “너 아니면 내가 없었다.”

갓 결혼해 남편과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뵈러 간 곳이 대전형무소였다. 심산은 그때 이미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간수가 업고 나왔다. 그러니까 며느리는 시집 와서 시아버지가 걷는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남편이 서른둘에 독립운동을 하다 죽고, 그 후로는 앉은뱅이 시아버지의 수발을 해야 했다. 어쨌든 그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였다. 나중에는 막내아들 집에서 지내다가 서울 중앙병원에서 타계하는 바람에 손 여사는 심산의 죽음을 보지 못했지만, 심산이 평소 며느리에게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아니면 내가 없었고, 내가 아니면 너도 없었다.” “내가 죽더라도 동강(東岡·김우옹의 호) 종가를 네가 좀 지켜 달라.”

심산이 며느리와 맞담배를 했다면 놀라리라.

광복 이후 심산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런데 담배가 궁금하면, 꼭 며느리에게 담뱃대에 불을 붙여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며느리가 질색을 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데다, 하늘같은 시아버지와 맞담배를 하는 꼴이니 용납이 되겠는가 싶었던 게다. 그래도 심산은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담뱃불을 붙였는데, 연기가 매캐해 연방 기침을 해댔다. 심산은 그런 며느리가 딱해보였는지,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 며느리에게 담배 좀 가르쳐주게.”

잠이 안 올 때는 앉은 채로 두 갑을 피울 때도 있는 심산으로서는 담배친구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으리라고 이해를 해도 참으로 고금에 없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횟수를 거듭하니 며느리도 제법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됐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에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참으로 인간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심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유교적 기질로 완강하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을 지녔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너그러우며 남을 배려할 줄 알았다. 관대하고도 개방적으로 가까운 이를 대하는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손응교 여사는 올해 95세로 여전히 심산 선생의 생가를 지키고 있다. (김순란의 ‘내 환생하면 풍운아로 태어나리-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님 손응교 여사를 찾아서’ 성주문학 2004년 제4호 참조)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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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심산기념관. 1974년 심산기념회가 건립한 곳으로, 심산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하는 전시공간과 문화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산 선생의 생가에서 약 7㎞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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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선생 생가 인근에 있는 청천서당. 동강 김우옹 선생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영조 5년(1729)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청천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지역의 중심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됐다. 그후 동강의 12세 후손인 김호림에 의해 ‘청천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지어졌다. 1910년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청천서당을 ‘성명학교’라고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활용하려고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공동기획 : Pride Gyeong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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