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스토리텔링 대가야의 魂 가얏고 .6] 나라는 망해도 가얏고는 길이 전해야하지 않겠나

  • 입력 2011-11-17  |  수정 2025-10-14 09:57  |  발행일 2011-11-17 제9면
“고맙네, 그나저나 나는 조국을 배신하고 말았네…”
20111117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에 있는 우륵박물관. 박물관 내부 전시실에는 우륵이 살았던 대가야의 주변 정세와 문화를 소개한 ‘악성 우륵을 찾아서’를 비롯해 ‘가야의 혼을 지킨 우륵’ ‘민족의 악기 가야금’ ‘우륵의 후예들’ 등 다양한 주제로 꾸며져 있다.

#1

가얏고, 가얏고! 가실왕이 우리 강토의 소리를 담을 가장 아름다운 기운의 형상으로 만들어낸 게 가얏고 아닌가? 그것이 부정될 수 없다고 우륵은 강조한다. 오랫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비로소 정밀하게 조율해낸 가얏고 소리는 우리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울려질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얏고는 이제 정치적인 희생물로 내쳐지고 있다. 나라의 의례와 제례악의 중심이던 가얏고가 차츰 밀려나 과거의 잡스러운 소리에 묻혀 잦아지려 한다. 더구나 예악의 중심으로 신성하게 울려지면서 대가야국의 강건하던 모습을 떠올리던 소리가 왕의 음탐을 북돋우는 지경으로 전락되고 있다. 우륵은 몇번이나 그 점을 들어 가얏고의 가치를 납득시키고 가얏고를 통한 예악 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하지만, 번번이 무시를 당한다. 이미 조정은 친백제계가 장악하여 과거 가실왕의 개혁을 희석시키는 정책이 계속 나오는 마당이니, 그 개혁의 선두에서 울려 퍼졌던 가얏고 소리는 그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 화살이 우륵에게 집중된다.

“전하, 악제의 개편이 시급하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지금의 악제는 억지로 만들어진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가얏고에 편중되어 보편성을 잃고 있습니다. 더구나 의례나 제례악이 우륵의 마음대로 편성됨으로써 가야 제국들의 실정을 무시했다는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우륵을 내치고 악제를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우륵을 내친다?”

“그러하옵니다. 돌아가신 왕의 측근으로 국정을 농간하여 왕의 귀와 눈을 어지럽힌 일이 많고,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지금의 악제이옵니다. 나라의 소리를 어지럽힌 장본인을 축출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옵니다. 거기에다 우륵은 신라와 친하며, 신라의 첩자들과 친분이 두텁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래전 포구에서 젓대를 불던 판수와 그 제자 보희가 신라 첩자로 문제되자, 판수는 달아나고 보희는 옥에 갇혔다가 탈옥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륵과 아주 막역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보희는 우륵의 제자로 들어와 궁성으로 잠입, 국가의 기밀을 탐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륵을 신라의 첩자와 내통한 자로 지목한다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보희를 탈옥시킨 게 우륵의 측근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허, 보통 문제가 아니군. 아직 소문을 내지는 말고 은밀하게 우륵의 범죄사실을 조사해보게.”


#2

이문이 우륵에게 말한다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번지고 있습니다.”

“무슨 얘긴가?”

“스승님을 신라의 첩자로 지목하여 은밀하게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말이 궁성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는 데요.”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야? 말이 되지 않잖은가?”

“판수와 보희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전혀 몰랐던 일이네. 전왕에 의해 그 혐의가 벗겨진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말이 다시 나온단 말이냐? 그래, 누가 조사를 한다고?”

“왕명이 떨어져 조정의 일각에서 은밀히 내사 중이라는 말이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단순히 스승님의 문제만 내사하는 게 아니라, 친신라계는 물론 개혁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내사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허, 낭패로군.” 그러잖아도 이상한 조짐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긴장하고 있던 터다. 악공들의 사무실에 수상한 이들의 기웃거림이 잦고, 더러 물건과 서류가 없어지는 일이 생겨 경계하고 있기도 하다. 때로 자신이 미행 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자주 든다. 가뜩이나 친백제계의 득세가 두드러져 친신라계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라, 이 일로 인해 친신라계의 축출이 가시화되는 게 아닌지 조정의 대신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친백제계의 내사가 상당히 이루어져 조만간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나리라는 말도 나온다.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되어 가는 듯합니다. 온갖 말들이 무성해 일일이 대응하여 해명하기가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문은 아주 불안해한다.

“우리 쪽의 사람들을 두루 만나봐야겠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쪽의 동태를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는 듯하니, 들키지 않게 하십시오.”

우륵은 은밀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가실왕과 함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은 작금의 사태에 심히 불안해 한다. 이미 개혁의 실패를 논하는 일이 조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그 논의 여하에 따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큰 옥사를 면치 못하는 것은 물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함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일에는 백제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설도 들리고, 이에 따라 친백제계의 움직임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이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륵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가실왕이 그를 찾아 가얏고 제작을 의논할 때가 떠오른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악기를 만들고, 그 악기로 연주할 곡을 작곡했다. 그것은 대가야의 장래를 위한 큰일이었다. 대가야의 음률을 가지런히 하여 가야 제국의 힘을 결속해 강대한 대제국으로 우뚝 서게 하는 초석이 되는 일이었다. 우륵은 그렇게 믿고 온몸을 그 일에 던졌다. 그야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우륵의 가얏고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얏고 만드는 일을 성사시키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예악의 미래를 열어갈 꿈을 꾼 것은 그것이 대가야의 꿈을 실현시키는 일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왕의 죽음으로 깨져버렸다. 이제는 가얏고를 지키는 일마저 힘들어지고 있다. 우륵은 가얏고를 쓰다듬으며 불면의 밤을 새운다.

“이문아, 가얏고를 아주 먼 미래에까지 천세 만세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륵은 이문에게 말한다. “가얏고는 그만한 가치를 지닌 뛰어난 악기다. 아울러 나라가 망하더라도 가얏고만은 지켜 고스란히 후세에 넘겨주는 일이야말로 대가야의 음률과 정신을 영원히 지켜내는 일이 되기도 함을 잊지 마라.”


#3

큰 강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포구의 불빛이 멀리 가물거린다.

판수는 강가 모래밭에 앉아 있다. 우륵과 이문은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강가로 접근한다.

“어서 오게.” 판수는 우륵의 손을 잡는다. 같이 구석진 바위 아래 매어둔 뱃전 가까이 가서 앉는다. 목선이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많이 불어 바위를 치는 파도 소리가 제법 크게 난다. 우선 갖고 온 가얏고를 배에 싣는다. 서라벌에 싣고 갈 것들이다.

“그 쪽 분위기는 어떤가?” 우륵이 묻는다.

“서라벌에서는 자네가 온다면 반색을 할 것이네. 어쨌든 잘 결심했네. 자네는 특별한 망명자가 될 것이네. 이미 조정의 핵심과는 얘기가 다 끝났으니 오면 되네. 몇 명이나 건너올 수 있나?”

“나와 이문의 가족, 일부 개혁에 관여한 대신들의 가족이 될 것이네. 적은 인원은 아니네.”

“배가 몇 대 더 필요하겠군. 실행이 결정되면 건너갈 인원과 날짜와 시간을 바로 알려주게. 나는 강 건너편에서 준비하면서 머물고 있겠네.”

“신라 첩자의 도움을 받을 줄 예전에 몰랐네.” 우륵이 짐짓 농처럼 말한다. 판수는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 내가 첩자인 걸 알고도 자넨 날 원망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자네를 돕는 일이 나의 큰일이 되고 말았네.”

“고맙네. 그나저나 나는 조국을 배신하고 말았네.”

“무슨 소리? 이미 대가야를 지킬 명분은 없어져 버렸네. 대가야는 이미 풍전등화의 처지 아닌가? 곧 신라의 대군이 이 강을 건널 걸세. 그리 되면 모든 건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거지. 대가야가 망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다 망하는 건 아닐세. 그러니 지킬 건 지키면서, 또 다른 삶을 도모해 봐야지. 대가야는 망하지만, 그 정신의 핵인 가얏고는 길이 전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불안하네.”

“나도 마찬가지네. 어쨌든 힘을 잃지 말게나.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 걸세.” <계속> 글=이하석

<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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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 전시실에 마련된 우륵의 부조 조각. 대가야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우륵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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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에는 가야금뿐만 아니라 장구, 아쟁, 피리 등 다양한 국악기 자료를 전시, 국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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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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