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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괴헌가의 전통술인 이화주는 이화곡이라는 누룩을 사용한다. 찹쌀과 멥쌀로 만든 이화곡이 분홍빛을 띠며 발효되고 있다(위). 이화주는 배꽃이 필 무렵 담가 가을쯤이면 먹을 수 있다. 항아리에 담가 놓은 누룩이 익어가고 있다(오른쪽 아래).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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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괴헌고택은 선비의 기품과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영주의 대표적인 문화재다. 사당과 사랑채, 안채가 유교사상에 입각한 위계질서에 따라 고유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9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승격 지정되기도 했다. 고택의 이름은 ‘회화나무가 가득하다’는 뜻에서 지었다. 괴헌가는 이름난 양반가이다 보니 예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안주인은 괴헌가만의 특별한 음식을 대접해야 했다. 이화주(梨花酒)가 바로 그것이다. 쌀로만 만드는 술로, 이름과 달리 배꽃이 실제 들어가지는 않는다. 배꽃이 필 때 담가야 맛이 더 좋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발효된 누룩을 그릇에 담아 물을 타서 마시는 것도 이색적이다. 괴헌가는 이화주 외에 손님상에 올리는 음식이 따로 있다. 수란, 보푸람, 육말 등은 지금도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전승음식으로 민속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1편은 영주 괴헌가의 전통주인 이화주와 전승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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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62호인 영주 이산면 두월리 괴헌고택.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이리 오너라!’
누군가 대문 밖에서 기척을 낸다. 마당 어딘가에서 제 일을 하고 있던 집안사람은 단걸음에 달려가 문을 연다. 낯익은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낯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개중에는 누추한 차림으로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과객도 있었을 것이다. 낯익은 사람이면 얼른 집안으로 모실 테고, 뜨내기 과객일지라도 단박에 내치는 법 없이 집주인에게 고한다. 주인은 그야말로 원한 사무친 이가 아니라면 문전박대하지 않고 안으로 모시도록 이른다.
사랑채, 혹은 마루에서라도 주인과 객은 공손히 맞절을 한다.
“저는 봉화 닭실에 사는 권가(權家)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만, 진작부터 괴헌가의 높은 명성을 들었던지라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명성이라니 과찬이십니다. 그저 작은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는 것을요. 어디 먼 길을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동문수학한 벗이 경상감영에 부임했다 하여 세상 소식도 들을 겸 찾아갔다가, 오는 길에 도산서원까지 들른 길입니다.”
“세상 흘러가는 소식도 그렇지만 요즘 도산서원에서는 어떤 이들이 공부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어떠했습니까?”
“감영보다 서원 소식이 더 궁금하시군요. 과연 선비십니다, 허허.”
‘선비’. 국어사전에는 ‘학식은 있되 벼슬하지 않은 사람’ ‘학문을 닦은 사람의 예스러운 말’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고 벼슬하지 않은 것이 절대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합격하거나 어느 정도 벼슬에 오른 사람이어야 더욱 선비로 여기고, 칭해져왔던 게 사실이다. 조선시대 학문을 탐구하던 선비가 지향했던 바는 ‘지극한 정치’, 즉 군왕이 왕도를 실현하는 정치였다. 그러니 결국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대부분 출사를 바라기도 한 까닭이다. 다만 출사 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도를 벗어나거나 탐관이 된다면 그로써 선비라는 영예는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선비는 학문 탐구와 함께 ‘의리(義理)’를 숭앙했는데 이는 ‘천리(天理)’, 즉 바른 하늘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선비는 벼슬의 유무와 상관없이 나라가 외침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내놓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가산을 내놓아 구제에 나서기도 한 것이다.
괴헌가도 그랬다. 괴헌고택의 주인은 괴헌(槐軒) 김영(金瑩, 1789∼1868)은 순조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병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의 6대조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 1548∼1603)은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이듬해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피신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조직,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종결된 후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기도 했지만,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림에 있어 의리로 털끝만큼의 굽힘도 없어 불우한 세상을 살았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아들 김여환(金汝煥)이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 후로는 몇 대를 거쳐 김영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벼슬을 지낸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영 또한 벼슬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순조 29년 사헌부장령에 승진했으나 기어이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고향인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에 지금의 집을 지어 은거했다. ‘괴헌’은 집 마당에 많이 자랐던 회화나무에서 딴 호로, 벼슬보다는 자연 속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코자 했던 그의 원망(願望)이 담겨진 것일 테니 과연 지고한 선비가의 전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안채와 연결된 사랑채 안쪽 문이 열리더니 작은 소반이 들어온다. 끼니때가 아니어도 집안을 찾은 손님은 반드시 입을 다시게 하는 것이 안주인의 도리다. 이른바 접빈객(接賓客)의 기본 마음. 소반 위에는 간단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안주와 함께 괴헌가만의 접빈주 ‘이화주(梨花酒)’가 올라있다. 이화주는 괴헌가에 전승되어온 접빈 및 봉제사(奉祭祀)를 위한 술로, 쌀로만 빚는다. ‘이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배꽃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배꽃 필 때 담가야 그 맛을 얻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화주는 먼저 불린 쌀을 항아리에서 발효시켜 누룩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누룩이 만들어지면 멥쌀과 찹쌀을 전래의 비율대로 섞어 쪄낸 뒤, 엿기름과 같이 반죽해 항아리에서 저절로 발효되도록 기다려야 빚어지는 술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 쌀쌀한 이른 봄부터 술이 제대로 익을 때까지, 추우면 집안으로 들이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아 내놓으며 발효에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줘야 제맛을 얻을 수 있는 까다로운 술이다.
증류주가 아니니 소주는 아니고, 탁주 계열임은 분명한데 익은 다음 마실 때는 물을 타서 먹는다. 술에 약한 여자들은 설탕을 타서 먹기도 하는데,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몇 년을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새콤달콤한 맛도 일품이지만 빚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 장기보존되는 특성은 막걸리의 세계화 바람이 주춤하는 이때, 새로운 문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다.
또한 사람마다의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데다, 일본의 경우 저들의 전통 소주는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니 이화주는 그들의 습성에 잘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대대로 영남지역은 조선 유림과 선비의 본향이었다. 특히 경북북부지역의 경우 고려 말의 회헌 안향 선생 이래로 조선조의 삼봉 정도전, 퇴계 이황으로 이어진 뚜렷한 학풍은 더욱 꼿꼿한 선비 정신을 낳았다. 영주시 이산면에 있는 이산서원이 건립되고 이듬해 지은 퇴계의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잠깐 인용해보자.
‘영천군(榮川郡:현재의 영주)은 소백산 남쪽에 자리해 신령한 기운이 넘치고 풍광이 아름다워 인재들이 많아 모이는 곳이라 일컬어졌다. 이곳의 풍속은 문예를 숭상하여 함께 모여 공부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을 거접(居接)이라 하였다. 이 고을 선비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으며 그들은 다른 지방에서 책 상자를 지고 배우러 오는 많은 선비들도 기껍게 반겼다.
퇴계 이황은 안동 사람으로 지금의 도산서원은 그의 사후에 세워진 것이다. 살아생전 퇴계는 지금의 영주, 특히 이산서원 설립에 깊이 관여하고 애정을 쏟았다. 그런 그의 말처럼, 영주는 대대로 선비의 고장이다. 그것도 출사하여 벼슬의 영예를 구하기보다는 초야에 은거하여 학문을 익히고 사람의 도를 닦았다. 또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추구하는 바가 이어지기 때문에 구차해지기 십상인 까닭이다. 그보다는 이웃과 사람에 정성을 다하고 조상을 공경하여 지극한 효를 실천함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효를 실천하는 길이 오직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소백산 자락 영남 북부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하랴, 객을 맞이하고 제사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니.
도(道)와 리(理)를 논하는 사랑채의 자리가 파할 줄 모르더니 어느새 끼니때가 돌아온다. 안채의 주인은 이미 그럴 줄 알기라도 한 듯 진작부터 준비한 괴헌가 전승음식들을 정성스레 차려 사랑채에 들였다. 부족한 물산에 마음 졸이지 않고 차려낼 수 있는 것은 제철나물이다. 제때에 뜯어 생으로 양념에 버무리거나 삶아 무쳐낸 것도 있고, 지난 계절마다 뜯어다가 삶고 말린 나물도 있다. 기본으로 올리는 몇 가지 전과 함께 산에서 따는 도토리나 밭에서 자란 메밀로 만든 ‘묵채’는 자못 화려하기까지 하다. 채 썰어 담아 놓은 묵에 멸치다시마 국물을 끼얹어 데우고, 자작자작하도록 국물을 남긴다. 그 위에 제철 야채 중 색깔 다른 몇 가지, 물기 짜낸 김치, 계란 지단, 김, 형편이 되면 잘게 썰어 볶아둔 소고기까지 각양각색의 고명을 얹으니 말이다.
육회용 소고기를 잘게 썰어 참기름, 고추장, 꿀, 잣 등과 함께 순차로 잘 볶아 수분을 없애고 몽실몽실하게 조리한 ‘육말’은 괴헌가 전승음식 중 하나로 이가 부실한 노인을 배려한 것이다. 명태, 대구포, 육포를 각각 물에 담갔다가 건져 살짝 찐 다음, 물기를 짜내고 손으로 뜯어 물에 담그면 보푸라기가 부풀어 오르는데 이것을 체에 걸러 만든 ‘보푸람’도 노인을 위한 전승음식이다. 반드시 올리는 전승음식으로 ‘수란’도 있다. 끓는 물에 계란을 깨 넣어 터지지 않도록 익힌 노른자에 흰자를 덮어 반숙으로 그릇에 담는다. 계란 삶은 물에 간장, 식초, 참기름,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하게 간하여 계란 위에 붓고 석이버섯, 실고추, 잣가루를 고명으로 얹은 그것이다.
하나같이 특별하지 않은 재료에 정성을 더한 것들이다. 아니, 사람을 향한 지극함에 자연의 재료를 더한 것이다. 접빈객과 봉제사는 다르지 않은 하나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아무런 바람 없이 사랑을 다해 기른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나아주고 길러주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바람 없는 사랑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바탕이다.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가 아니어도 사람은 지극함으로 대해야 하고, 그에 바치는 음식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물산이 풍부해지며 자연과 가장 가까운 우리 음식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기쁜 일이지만 우려되는 것은 외양에 치우치고 사람보다 먼저 잇속을 찾는 이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거창한 이름의 전통음식제 운운의 행사에 사람과 정성은 보이지 않고 요란한 빛깔과 화려한 치장만 보인다면 꽃도 피우기 전에 시들게 될 터이다. 이화주와 괴헌가 전승
음식에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지극함, 바로 선비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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