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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후리실마을에는 아직도 묵을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옛 맛’을 이어오고 있다. 여름철에는 서늘한 기운을 취하려는 손님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30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후리실마을 ‘할매묵집’의 메밀묵채가 먹음직스럽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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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Memo
금수면 후곡리. 성주 서쪽 지방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후곡리’라는 규격화된 이름보다 아직도 ‘후리실 마을’로 불리는 마음속의 고향 같은 곳이다. 기온이 낮은 고원지대여서 참외농사조차 변변히 짓지 못하는, 그래서 주민은 평생 가난을 업으로 삼고 살아야 했다. 이 마을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대가천이 흐른다. 대가천 상류에는 ‘장들’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십리 떨어진 아랫마을은 ‘챙기’라고 불렀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 하다’는 부부의 연을 맺은 장들마을 사내와 챙기마을 색시에 대한 이야기다. 결혼 후 두 사람은 후리실마을에 신방을 차린다. 남편은 대가천에서 고기를 잡고, 아내는 메밀밭을 가꿔 묵을 만들어 팔았다. 묵을 팔아 사는 형편이 변변치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남편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챙기마을 색시는 조용히 남편의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도 후리실마을 한편에 아련한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챙기마을 색시가 만들어 팔던 ‘후리실 묵’도 낡고 희미한 이야기처럼 여전히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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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째 묵을 팔아온 할매묵집. 후리실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이 식당은 노부부가 거처하는 집 한쪽에 있다. 박관영기자zone5@yeongnam.com |
바람이 분다. 대가천(大伽川)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가 은색 물이랑을 만든다. 물에서 자지러지던 달빛은 천변을 달려 금수면 후리실마을의 메밀꽃밭 위를 까치걸음으로 밟고 지나간다. 달빛이 디딘 곳마다 꽃들은 일렁이며 은색 물결을 만든다. 하얗게 웃으며 여인이 달린다. 꽃밭 저편으로 머리에 메밀꽃 꺾어 꽂은 그녀가 맨발로 달린다. 여인의 웃음이 메밀꽃 물결을 타고 이편으로 건너온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묻혔다 한다.
몇 달째 메밀꽃밭을 헤매는 그녀를 사람들은 ‘챙기색시’라 불렀다. 대가천 아랫마을인 챙기에 살았던 여인은 이십리 상류에 살던 장들마을 총각을 사랑했다. 같은 해에 태어나 소꿉동무로 자란 두 사람은 서로의 반쪽처럼 붙어다녔다. 챙기여인은 그곳 일대에서 뭇 총각의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그 마음엔 오직 장들청년뿐이었다. 두 사람이 혼인하던 날 메밀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대가천변의 떠들썩한 소리에 온 동네 개들도 소란스럽게 컹컹거렸다.
첫날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돈다.
챙기색시는 옷고름을 푸는 장들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사랑하려면 세 편의 시를 내놓으시오.” 그 말에 신랑은 먼저 이 고장 성주 사람인 고려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시조를 읊었다. 유명한 다정가(多情歌)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배꽃에 달이 밝고 은하수는 자정 무렵을 흐르는데 한 줄기 봄의 마음을 두견새야 알랴마는 그리운 생각이 많아 병난 것처럼 잠이 오지 않는구나)
이 시를 듣고 난 챙기색시. “그러면 나는 그 어른의 ‘백화헌(百花軒)’이란 시를 읊으리.
‘됐소, 꽃은 이제 더 심지 마오/ 숫자가 백을 채웠으니 넘지는 마오/ 눈 속의 매화와 서리 국화에 정표를 두었으니/ 그 밖에 알록달록은 번다한 것일 뿐(爲報栽花更莫加(위보재화경막가) 數盈於百不須過(수영어백불수과) 雪梅霜菊情標外(설매상국정표외) 浪紫浮紅也多(낭자부홍야만다).’그대도 설매상국처럼 내게 정표를 주기를. 그 밖의 알록달록엔 눈 돌리지 말고요. 호호. 그 다음은 무엇이오?”
신랑이 이번엔, 역시 성주의 큰 학자인 조선시대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회연초당에 부쳐(題檜淵草堂)’를 읊는다.
“작디작은 산 앞에 작디작은 집/ 뜨락에 매화 국화가 가득 찼는데 해마다 더 피어나네/ 여기에 구름과 물이 그림처럼 화장을 하여 보여주니/ 세상에 내 인생보다 사치스런 이가 있으랴(小小山前小小家(소소산전소소가) 滿園梅菊逐年加(만원매국축년가) 更敎雲水粧如畵(경교운수장여화) 擧世生涯最奢者(거세생애최사자)).”
신부는 웃으며 말했다. “욕심 없이 사는 그 마음이 참으로 눈부시오. 나도 한강이 읊은 ‘회연에서 우연히 지음(檜淵偶吟)’을 낭송하리라.
‘대가천은 내게 깊은 인연이 있어서/ 찬 언덕(寒岡)과 전나무 연못(檜淵)을 얻었도다/ 흰 바위와 맑은 물을 종일 즐기니/ 세상 어떤 일이 내 맘에 들어오리(伽川於我有深緣(가천어아유심연) 占得寒岡又檜淵(점득한강우회연) 白石淸川終日翫(백석청천종일완) 世間何事入丹田(세간하사입단전)).’ 선생이 한강이란 호를 쓴 것은 주자가 기거한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했기 때문이라 하오. 선생은 참으로 대가천을 사랑한 것 같아요. 우리와 똑같이 말이오. 마지막 시는 무엇을 읊으려오?”
“들어보시오. ‘챙기땅의 흰 꽃잎아/ 팔월바람 얼마나 좋아/ 장들땅의 나비두고/ 대가천 건너서서/ 조선천지 가을 오는데/ 한눈팔이 웬말이냐’.”
신랑이 이렇게 자작노래를 읊자 챙기색시는 그만 까르르 웃고 말았다.
“정말 그대는 멋진 사람이네요. 오늘 챙기꽃이 낸 시험은 만점이에요. 장난꾸러기 장들나비님.”
그때 등촉이 꺼지며 달아오른 화접(花蝶)은 첫날의 단꿈에 들었다.
두 사람은 후리실마을에 신방을 차렸다. 남편은 대가천에서 고기를 잡고, 아내는 메밀밭을 가꿔 묵을 만들어 팔았다. 물에서 일하고 온 남편이 은어처럼 휘어져 마루에서 곤히 낮잠을 잘 때, 밭에서 일하고 온 아내는 그 옆에 호미같이 몸을 오그려 함께 잠들었다. 벌이는 많지 않았고 일제 말의 궁핍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그저 행복했다. 장들남편이 불쑥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녁에 책을 읽던 신랑은 말했다.
“여보, 아무래도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소. 세상엔 먹고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법이오.”
“땡전 한 푼 없는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그곳에 간단 말이오? 그 무서운 땅에 가서 험한 꼴이나 당하면 후리실에서 기다리는 이 몸은 어찌하라고?”
“대가천 은어도 넓은 바다로 가서 큰 헤엄을 치다가 돌아오지 않소? 나 또한 꼭 돌아올 터이니 당신도 큰 맘 먹고 묵장사를 잘 하시오.”
이렇게 달래고 떠난 사람이었다. 손수 베껴 쓴 ‘한강집(寒岡集)’ 한 권을 품에 넣은 채 뒤에 울먹이고 선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고 또 흔들며 신랑은 떠나갔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도 소식이 없다. 몇 번이나 8월이 지나고 메밀꽃이 활짝 피었는데도 장들땅의 낭군은 돌아오지 않는다. 매화 피고, 메밀꽃 피고, 국화 피고, 다시 매화가 피었을 때에도 책 읽던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운동을 하다가 그곳 감옥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 그곳의 신여성과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는 서러운 풍설도 들렸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장들남편은 기별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었다 하였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챙기아내도 묵장사를 접었다. 대신 입에 침묵의 묵(默) 하나를 붙인 듯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메밀밭을 맨발로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날밤 남편이 불러준 바로 그 가락의 노래.
장들땅의 범나비야 일본 땅이 얼마나 좋아
챙기땅의 꽃을 두고 현해탄을 건너더니
조선천지 해방돼도 불귀객이 웬말이냐
어느 날 밤, 챙기아내는 들마소(沼)의 물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말했다.
“내가 돌아온다 그랬지? 꼭 돌아온다 그랬지?”
아내는 저벅저벅 물속으로 들어가 남편을 품에 안고 펑펑 울었다. 바람이 불어 메밀꽃들이 심란하게 흔들리던 밤이었다. 그날 밤 이후로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 소(沼)가 있는 둔덕 위에 그녀가 꽂고 다니던 메밀꽃 한 송이가 가만히 말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시절과 인연은 끊어진 듯 이어지며 물고 도는가. 후리실마을에는 십여 년 전부터 메밀밭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이 마을 중심으로 금수면 일대를 메밀재배단지로 키우려는 당국의 계획이 발표됐다. 구석구석에 묵밥식당들이 생겨났고, 여름철 특미로 서늘한 기운을 취하려는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성인병의 원인이라는 활성산소가 형성되지 못하도록 막아줘서 콜레스테롤 수치를 확실하게 낮춘다는 정평이 나 있는 ‘동의보감’ 권장 음식인데다, 후리실 특유의 손맛이 있다. 이곳을 드나드는 길손들은 메밀밭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젓가락으로 묵만 건져올리다 갈 것이다.
아직 스토리는 끝나지 않았다. 후리실마을의 저 이야기를 공개한 이는 수필가 배철이다. 그는 해방 무렵에 돌아간 셋째누나의 이야기를 한다. 누나는 해방이 되기 1년 전인 1944년 소학교 교사와 결혼했다. 2년간을 행복한 원앙으로 살았던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불운이 닥쳐온다. 누나가 장티푸스에 걸렸다. 자형이 극진히 치료하여 다행히 나았으나 이번에는 자형에게 병이 옮겨갔다. 온 힘을 다해 돌봤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남편의 죽음에 누나는 그만 실성하고 말았다. 뒷동산에 올라가 남편 묘가 있는 동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누나 나이는 24살, 배철의 나이는 13살이었다고 한다. 어린 동생은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울고 새로 시집가란 말야”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누나는 가만히 다가와 동생을 꼬옥 껴안더니, 이 고장에 구전(口傳)하는 ‘장들땅의 범나비’ 노래를 불러준다. 사흘 뒤 누나는 자진(自盡)하여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이하석 시인의 시 중에는 대가천에 관한 작품이 있다.
나는 은어를 본다.
물의 힘줄 속에 그것들의 길이 있다.
물의 힘줄을 은어들이 당겨 강이 탱탱해진다.
나는 은어를 본다.
강의 힘줄이 내 늑간근에도 느껴진다.(‘대가천2-은어낚시’ 중에서)
이 시를 읽노라면 물고기를 잡던 장들남편이 떠오른다. 그도 저 대가천에서 은어를 잡으며 강물의 힘줄을 느꼈을까. 은어들이 물을 당겨 강이 탱탱해지듯 그 또한 삶의 한쪽을 급히 당겨 긴장에 찬 애화(哀話)를 남겼다. 메밀묵 아내를 두고 떠난 그 무심한 뒷모습만으로 그의 면모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대가천의 물고기 남편과 대가천변의 묵밥 여인이 키워내던 사랑이 소담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이야기의 절반이 허리 꺾여 있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메밀묵을 후루룩 들이켜노라면 이 서늘함은 비련(悲戀)의 한 자락 같다. 슬픔을 가만히 곱씹으며 삶의 겸허를 회복하는 여정도 아름답다. 장들남편과 챙기아내의 스토리가 숨어 흔들리는 메밀꽃밭 거닐며, 그리고 그 부부가 서로 쳐다보고 바라보며 함께 먹던 묵밥을 먹으며, 못 다 이룬 순정의 오롯한 기운을 새겨보는 일, 이건 몸의 웰빙을 넘어선 마음의 웰빙이 아닌가.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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