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7] 끈질긴 민초의 힘

  • 글=김천 박현주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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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13-05-21  |  발행일 2013-05-21 제면
班常의 잣대에 도전장 던진 대덕면사무소 유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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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대덕면 관터마을에는 조선시대 역(驛)을 드나들던 양반과 관리들의 숙소인 두의곡원(頭衣谷院)이 있었다. 관터마을 입구인 대덕중학교 주변은 1936년(병자년 대홍수) 전까지 대덕장이 섰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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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병자년) 대홍수로 인해 김천 대덕장터의 위치가 바뀐다. 갑자기 밀어닥친 급류로 웃장터 일대가 황폐화되자 시장은 현재의 대덕면사무소 인근인 아랫장터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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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팔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민초의 삶은 고단했다. 엄격한 반상(班常)의 법도가 남아 있었고, 일본인을 비롯한 대지주들의 수탈로 민초들의 삶은 피폐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민초의 힘은 분출되고 있었다. 특히 근대식 교육은 보통 사람이 세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깨웠고, 민권(民權) 쟁취에 나선 백성들의 힘을 한데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동학농민운동으로부터 싹튼 민초의 주인의식은 3·1 만세운동과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을 계기로 더욱 강해졌고, 광복 이후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김천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어닥쳤다. 천민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뭉쳐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감천 주변의 작은 마을에도 민초들의 투쟁사가 곁들여져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의 한 줄기임에 분명하다.



◆‘반상의 법도’ vs ‘줄다리기’

김천시 대덕면 소재지인 관기리에는 대덕면사무소와 관련된 스토리가 전해진다.

조선 말까지 장곡역(長谷驛)으로 불리는 역이 있었던 관기리는 전형적인 역촌(驛村)으로 면사무소가 들어서기에 적합한 입지다. 예로부터 대덕면은 경북에서 경남·전북·충청으로 향하는 우두령 고개가 인접해 교통의 요지로 꼽혔다. 지금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았다.

장곡역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출신은 다양했지만, 먹고 자는 것에서 차별이 존재했다. 관리를 비롯한 양반들은 말에서 내려 장곡역 맞은편 관터마을의 관용숙소인 두의곡원(頭衣谷院)에서 숙식을 해결했지만, 지체가 낮은 상인과 서민들은 역 인근 주막에서 머물러야 했다.

주막은 식사와 술을 팔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우두령을 넘나들던 보부상들은 주막에서 물건을 팔았고, 주막 주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소규모 금융기관의 역할도 담당했다. 신작로와 말을 대신한 철도가 깔린 후 장곡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대덕면 관기리의 시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던 차에 1936년 대덕면에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해 대덕면 일대는 ‘병자년 대홍수’로 큰 물난리를 겪게 된다. 감천이 넘쳐흘러 지금 웃장터라 불리는 관기리의 시장이 수해를 당했다. 당시 수해 탓에 아랫장터로 불리는 현재의 시장자리로 장의 위치가 바뀌는데, 면사무소 역시 웃장터에서 아랫장터로 함께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평생 대덕면에서 살아온 박봉두씨(78)는 “내가 태어날 때가 병자년(1936)이었다. 어렸을 때 웃장터 아랫장터가 있었지만, 장은 아랫장터에만 들어섰다. 경남 거창, 전북 무풍 사람들이 장을 보러 왔고, 당시 어른들 역시 (대덕장이) 오일장 치고는 매우 큰 장이라고 했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흥미를 끄는 점은 면사무소 이전과 관련된 이야기다. 김천문화원에서 발행한 ‘김천의 마을과 전설’에 따르면 “(병자년 대홍수 이후) 대덕면 사람들이 면사무소 이전을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이 대립했는데 줄다리기로 면사무소의 위치를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말을 키우는 역(驛)이 존재했던 아랫장터에는 상대적으로 천민계급이 많았다. 하지만 아랫장터 사람들은 반상의 법도에 얽매이지 않고 면사무소 유치전(?)에 뛰어들었고, 결국 줄다리기에서 승리하면서 면사무소를 자신들의 곁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면사무소 이전 스토리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지역 향토사학계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라고 추측한다. ‘면사무소 유치전’이 있기 전인 1923년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고, 이후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민초의 의지는 높아졌기 때문이다.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1920년대 인권을 보장받으려는 움직임이 김천 지례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주민들이 면사무소 유치에 애착을 가졌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14년부터 일제의 행정체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만큼, 면사무소의 이전 여부는 역사적으로 고증할 필요가 있다 는 것이 중론이기는 하다.



◆‘떡국배미’를 아시나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민초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다.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기대어 살았지만, 쌀 한 톨 구하지 못해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장리빚’을 내는 이가 부지기수였고, 자식을 머슴으로 보내는 가슴 아픈 일도 허다했다. 장리빚은 춘궁기인 봄에 곡식을 빌려 가을에 갚는 일종의 사적(私的) 대출제도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쌀이 보리 수확 전에 떨어지는 4·5월의 보릿고개는 서민들에게 ‘죽음의 고개’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대덕면을 비롯한 김천의 대부분 마을은 매년 장리빚 홍역을 치러야 했다. 보릿고개 때 벼 한 섬을 빌려 먹으면 가을에는 두 섬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100% 금리인 셈이다.

대덕면 토박이 박봉두씨도 보릿고개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우리마을에 가면 지금도 ‘떡국배미’ ‘팥죽배미’가 있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봄에 굶어죽을 지경이니 가족들이 떡국이나 팥죽 한 그릇씩 먹고 논을 넘겨준 거야. 안 먹으면 굶어 죽을 판이었고, 담보 없이도 신용으로 빌릴 수 있는 시대였지. 구두계약이었지만 약속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없었어. 어쨌던 장리빚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니…”

박씨의 보릿고개 이야기는 계속됐다.

“봄이 되면 어머니께서 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만들었어. 그나마 송기떡도 쌀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만들어 먹었지, 그냥은 못 먹어. 산에서 온갖 나물을 캐서 죽을 쒀서 먹었지”

열심히 일만 해서는 살 수 없는 시기였다.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이자를 갚지 못하는 악순환은 반복됐다. 그나마 땅이 있는 사람들은 장리빚이라도 놓고 살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세월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머슴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쌀을 얻기 위해 남의 집 머슴이라도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1년 먹고 살고 보니 떨어진 버선 한 켤레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푸념이 저절로 나왔다. ‘꼴머슴’도 있었다. 소 먹이는 풀(꼴)을 벤다 해서 꼴(애기)머슴이라 불리는데, 모두 어린아이들이었다고 박씨는 회상했다.

“한 집에 형제가 많아 못 먹고 사니, 입이라도 덜려고 어린 아들을 머슴 보낸 경우가 많았어. 그 덕에 겨울을 간신히 넘겼고, 그래도 힘들면 선세경(일종의 가불)을 당겨 먹고 살았지. 그래도 일을 잘해 쌀을 많이 받는 머슴들도 있었어.”
공동 기획: 김천시

글=김천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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