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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며 지은 가운루. 기둥이 계곡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마치 떠있는 배와 같은 형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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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루와 함께 지은 우화루.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와 꽃비가 내린다는 불교적 의미의 우화루(雨花樓),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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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는 고운사 전경. 최치원을 비롯해 공민왕, 사명대사, 고종 등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Story Briefing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있는 고운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지금은 조계종 16교구의 본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의성을 비롯해 인근 안동, 영주, 봉화, 영양 등에 있는 60여 곳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다. 원래 이름은 ‘높이 뜬 구름’이라는 뜻의 고운사(高雲寺)였지만, 최치원이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151호)와 우화루를 지은 후 그의 자인 고운(孤雲)을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게 됐다. 특히 가운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노국공주가 죽자 전국을 유람하던 공민왕이 고운사에 들려 글씨를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고운사는 또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병기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밖에 현재의 연수전은 1902년 왕실의 요청으로,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3편은 최치원을 비롯해 공민왕, 사명대사, 고종 등 고운사와 관련이 있는 인물과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1. 최치원, 산중선계(山中仙界)를 실현하다
“이곳은 능히 구름 끝에서 해와 달의 기운을 마시고, 휘어진 무지개를 건너 북두성을 밟을 수 있는 곳이로다.”
고운사(高雲寺) 산문 앞에서 초로에 접어든 최치원은 탄복했다. 지난 몇 해 어둠의 근원 속을 배회하고 다닌 터라, 천하의 길지에 자리잡은 절을 보자 그는 환희에 사로잡혔다. 등운산(騰雲山) 자락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 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지세는 명당임이 분명했다. 더욱이 화엄종주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내 옛일이 몽환인 양 떠올랐다.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아버지 견일은 득난(得難, 6두품)이었다. 생애가 늘 서늘하고 적막했다. 개운포에서 열두 살 된 아들 치원을 당나라 장삿배에 태워 유학을 보낸 것은 신라의 철저한 골품제가 명민한 아들의 앞날을 막을 것임을 예견한 조처였다.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공부하거라.”
아들 치원은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6년 후인 874년(신라 경문왕 14) 빈공과(賓貢科, 당(唐)의 외국인 과거제)에 급제해 고변의 회남종사가 되었다. 이후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명을 떨치고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사륙집(四六集)’을 펴내는 등 이른바 세계적인 지식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그에게 매료된 헌강왕은 신라로 돌아올 것을 간청했고, 조국에 대한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던 그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 직을 제수받아 서라벌(경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그러나 당나라와 달리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신라는 헌강왕에 이어 정강왕, 진성여왕대를 거치며 쇠망해가는 중이었다. 특히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진골출신 왕족과 귀족들이 포진한 주류사회는 육두품인 그를 태생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귀국 10년째인 894년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을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나 무능하고 부패한 그들에 의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으로, 애오라지 뜻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삶과 죽음의 영역을 한 가지로 하여 가슴 속에 슬픔이 없는 존재로 살리라.”
세속에 환멸을 느낀 그는 자청해 외직을 떠돌다가 급기야 관직을 버리고 지리산과 가야산 등지로 소요자적(進遙自適)했다. 그러던 중 고운사에 이른 것이었다.
일세를 풍미하는 천재로 불리던 그는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통합사상가였다.
“나라에 오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그것은 실로 세 가지 가르침을 다 포함하고 있어 뭇 사람을 교화시킨다. 예컨대 집에 들어와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취지이고, 작위(作爲)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주장이다. 모든 악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실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최치원, ‘난랑비서(鸞郞碑序’)”
고운사에 머물면서 그는 곧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허루(駕虛樓)를 지었다. 기둥이 계곡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몸체를 떠받치고 있어 마치 양쪽 언덕에 걸친 다리나 떠있는 배와 같은 형상이었다. 백두와 한라에 버금가는 천하의 명당에 어울리는 누각이었다. 가허루와 함께 우화루(羽化樓)도 지었다. 흐르는 계곡물에 벚꽃이 흩날릴 때면 마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 나는 누각이었다.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 같다’는 옛 기록대로 최치원은 고운사에 산중선계(山中仙界)를 실현한 것이었다. 후에 절은 최치원의 자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라 불리게 되었고, 세월이 더 흘러 가허루는 가운루(駕雲樓)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우화루라고 적힌 현판은 특이하게 두 개가 있다.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누각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 의미의 우화루(羽化樓)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꽃비가 내린다는 불교적 의미를 담은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있다.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는 해인사에서 은거하던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밖에 나간 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그가 신던 신발과 쓰던 갓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다. 선계를 꿈꾸던 최치원이었기에, 옛 사람들의 믿음처럼 신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공민왕, 공허한 마음을 현판에 남기다
솔숲을 지나 마사토가 깔린 산문을 들어서자 왕은 더욱 공주가 그리웠다. 돌이켜 보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와 함께 이 지방으로 피신했을 때, 몸은 고단하였으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고운사 가운루의 청명한 바람(駕虛淸風)은 여전하였다.
‘기묘일에 지진이 있었다. 2월 정유일에 공주가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으므로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를 사하였다. 갑진일에 공주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또 1죄(참형)의 죄수를 사하였다. 이날 공주가 죽었다.(고려사 제41권, 세가 제41 공민왕 을사 14년, 1365년)’
왕은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그날 이후 웃지 않았다. 웃어도 웃음이 아닌 것을 모두 알았다. 다만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미뤄둔 채 생전의 공주와 다녔던 길을 더듬고 다녔다. 그런 왕을 신하들은 저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왕은 또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노국대장공주진(魯國大長公主眞),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현존),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등은 화공들의 진심 어린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은 당대의 명필이었다. 보수파였던 이제현도 ‘익제난고(益劑亂藁)’에서 ‘천 년이나 곧게 자란 나무를 찍어서 지은 집같이 필력이 굳세고 웅후하여 그 기품이 천지를 비추어 가득하게 한다’고 평했다.
왕은 새벽예불을 드린 뒤 가운루에 올라 새벽달을 바라보았다. 한 점 구름이 달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고운사에서 공주의 명복마저 빌고 나니 왕은 더욱더 만사를 잊고 저 구름에 몸을 싣고만 싶었다. 허(虛)하고 허(虛)하니 모든 것이 허(虛)하도다. 왕은 지필묵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가운루(駕雲樓)’라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바람은 청명했다.
지금 고운사에 있는 가운루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하던 중 고운사를 찾게 된다. 당시 만사를 잊고 선인으로 살고자 하는 공민왕의 염원이 현판의 글씨에 담겨있다.
#3. 사명대사, 임진왜란 때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다
우화루(雨花樓) 옆으로 꽃이 떨어졌다. 부상당한 승병들이 신음을 참으며 들것에 실려 오갔다. 문득 상동암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꽃들을 보고 느꼈던 무상과 불살생(不殺生)의 불교계율을 유정(惟政, 사명대사의 법명)은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새가 없다. 스승 휴정(休靜)께서도 ‘중생을 대신해 고통받는 것이 곧 보살이 할 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극악무도한 적도가 하늘의 이치를 거슬러 함선 수천 척으로 바다를 건너오니 그 독기가 조선 천지에 가득하다.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우리 선조들이 누천년 이룬 바가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 저 악귀들이 조국을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광란을 벌이니 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랴.’
스승께서는 이런 격문을 띄우셨고 조선의 승려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 국가는 어려움 많고 파도도 거센데, 나라생각에 유(儒)나 선(禪)이 다를 수 있으랴. 유정은 다시 우화루 서쪽 벽면에 그려진 형형한 눈빛의 호랑이가 되어 옆에 두었던 칼을 들고 일어나 외쳤다.
“이곳 고운사는 천혜의 요충지로 극악한 무리들이 근접하지 못할 곳이다. 하여 우리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았으니, 이기기에 가장 중요한 식량을 이곳에 비축하여 전장으로 후송하고, 부상당한 승병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치료케 하라.” 우화루의 호랑이도 함께 크르릉 포효하고 있었다. 현재 고운사 우화루 서쪽 벽면에는 실제 호랑이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진품은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4.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다
고운사 연수전(延壽殿) 터는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달싹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곳으로 유명하다. 풍수사가들도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입을 모은다. 연수전은 영조 갑자년에 어첩(御牒,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적은 책)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왕실의 요청으로 1902년(고종 39)에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다시 지은 것이다. 왕실의 원당(願堂)인 셈이다.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듯 ‘만세문’ 현판을 단 솟을대문과 목가구를 짜듯 정교한 가구식(架構式) 석재 기단(基壇) 위에 팔작지붕인 연수전 사방 천장은 운룡도(雲龍圖), 봉황도(鳳凰圖) 등으로 장식되어있다. 부귀장수를 기원하는 글귀(富似海百千秋 龍樓萬歲, 壽如山長不老 鳳閣千秋 등)와 내부 천장에는 해와 달을 중심으로 용과 봉황, 거북, 기린 등도 그려져 있다. 연수전 현판의 힘 있는 행서체는 당대의 명필가였던 해사(海士) 김성근(1835∼1919)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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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
글=박미영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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