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 주막 주인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여인의 숲(포항)

  • 손동욱
  • |
  • 입력 2013-08-19   |  발행일 2013-08-19 제13면   |  수정 2021-06-03 14:53
비만 오면 흘리는 마을의 눈물, 그녀의 손길이 닦아내다
20130819
20130819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 있는 ‘여인의 숲’은 조선말기 주막을 운영하던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곳이다. 당시 김설보의 식수헌금으로 조성된 숲 덕택에 마을은 홍수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도 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후반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헐리게 된 여인의 숲은 2003년 지역 노거수회의 노력으로 다시 태어나 현재 3만㎡(9천평) 면적에 상수리나무 위주로 되어 있다.

 

◆ Story Briefing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에는 ‘여인의 숲’이라 불리는 어여쁜 숲이 있다. 조선 말기인 1897년, 김설보(金薛甫, 1841~1900)가 조성한 숲이다. 당시 김설보는 역촌(驛村) 하송리에서 큰 주막을 운영하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하송리는 해마다 침수 피해가 잦았다. 상습적인 재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김설보는 수구(水口)막이용 숲을 만들 수 있도록 식수헌금을 마을에 기부했다. 실제로 숲이 들어선 후 홍수 피해는 물론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 숲은 ‘식생이수(食生而藪)’라고도 불린다. 숲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가, 2003년 6월 ‘여인의 숲’으로 재탄생했다. 김설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숲을 지켜내자는 지역 노거수회(회장 이삼우)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2011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편은 김설보의 숭고한 뜻이 담겨 있는 포항 여인의 숲에 대한 이야기다.



#1. 나무와 여인

“어떤 사람의 인격이 정말로 비범한지 알려면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이 따라야만 합니다. 만약 그 행동이 어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더없이 고결한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으며, 게다가 이 세상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 나오는 말이다. 책의 주인공은 양치기 부피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 알프스 고원 지대의 헐벗고 황폐해진 땅을 오랜 시간 공들여 숲으로 가꾸어 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실화이며 실존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도 있다.

조선 조, 포항시 북구 송라면 하송리는 봉수대를 머리에 인 역촌(驛村)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당시 하송리는 홍수에 취약한 지역이었다. 장마가 지거나 태풍이 닥치면 지류들이 넘쳐 마을을 휩쓸었다. 해마다 피해가 극심했다. 풍수적으로도 수해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하송리가 속한 삼송리(三松里, 상·중·하송리) 일대는 마을의 생김새가 배 모양이었다. 즉 바다를 향해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어느 날, 초로의 한 여인이 나섰다.

“숲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설보였다.

“동편 바다쪽을 숲으로 가리면 됩니다. 마을이 제아무리 배 모양을 하고 있다 해도 바다만 만나지 않으면 떠내려 갈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숲이 수구막이가 되어줄 겁니다.”

수구(水口)란 마을 공간을 흐른 물길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곳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막는 것을 두고 수구막이라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수구막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넓은 곳에서는 비록 좋은 밭이 만 이랑이 있고, 집이 천간이 있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을 때는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 구할 것이다.”

집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마을임에야, 두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경비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김설보는 큰 주막의 운영자로 재력가였다. 당시의 주막은 식당, 술집, 여관을 겸했다. 특히 하송리는 역촌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마련이어서, 그녀는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부(富)를 마을의 덕이라고 여겼다.

김설보는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금을 들여 관아로부터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느티나무, 쉬나무, 이팝나무 등이 땅을 채워갔다. 돈도 돈이지만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사대부 여성조차도 홀대받던 시절, 한낱 주막집 여인이 마을을 위해 정성과 성의를 다하자 마을은 술렁였다.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습니다.”

“장하고 장한 여인이오. 어지간한 사내도 못하는 일 아니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닙니다.”

“숲을 꾸리는 일이 어찌 여인만의 일이겠는가. 마을과 우리들의 삶, 전부가 걸린 문제인 것을….”

마을사람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들도 말에서 끝내지 않았다. 십시일반 성금을 거두어 숲 한 모퉁이에 작은 송덕비를 세워 그녀의 뜻을 기렸다. (당시 세워진 비석은 지금 여인의 숲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씁쓸하다. 이 송덕비에는 ‘김설보’가 아니라 ‘윤기석 공의 처’로 돼 있다.)



재물을 희사하여 임년에 조성한 우리 숲을 백대로 송덕하노니 보기 드믄 그 분이 거의 사라질 것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매 옥돌을 캐어다 여기에 새겨두노라

出義捐財(출의연재)/壬年我藪(임년아수)/百堵頌德(백도송덕)/罕覩基人(한도기인)/幾滅更新(기멸경신)/銘此采隣(명차채린)


#2. 나무와 생명

비가 그치지 않았다. 결국 북서쪽 안청계리(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호룡골(虎龍谷) 저수지가 붕괴됐다. 그러자 소하천이 범람해 마을을 덮쳤다. 물은 빠르고 무거웠다. 집이 무너졌고, 가구며 살림살이가 떠내려갔으며, 볏단도 쓸려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가축에 이어 사람까지 휩쓸리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바다로 떠내려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숲이 막아섰다. 바로 김설보가 가꾼 그 숲이었다. 울창하게 버티고 선 숲에 사람이며 물건이며 곡식더미가 걸렸다. 숲이 재산과 생명을 구한 것이었다. 숲의 효험을 두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고마워했다. 이때부터 숲은 ‘식생이수(食生而藪)’‘식생이숲’이라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여인의 숲은 활엽수림으로 일종의 방풍림이자 방수림이다. 방풍림, 방수림이란 강풍이나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하는 숲의 이름이다. 김설보가 가꾼 숲은 이후로도 바다 쪽으로 뚫린 마을의 해문(海門)을 막고, 동편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토를 보호해주었다. 진정한 수구막이였다.


#3. 나무와 세월

사람들은 탄식했다. 그날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통째로 베어져 나갔다. 일제가 총대와 개머리판, 가미카제용 항공기 프로펠러와 날개를 만든다며 나무를 건드리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째였다. 숲은 나날이 비어갔다.

일본이 떠나고 전쟁도 끝이 나자 사람들은 숲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모았다. 하여 1960년대 들면서 상수리나무 위주로 다시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나무는 잘 자라주었고 곧 울창해졌다. 단오 때면 숲에서 그네뛰기며 씨름판이 열렸다. 어른을 따라나섰던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맬 정도로 숲이 벅적거렸다. 하지만 그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숲의 상황은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취락구조 개선사업이라는 명분하에 숲이 다시 헐리게 되었다. 나무가 밀려난 자리에 수십여 채의 주택과 논이 생겨났다. 숲은 또 비어졌다. 언제나 사람의 욕심이 화근이었다. 하물며 그 사람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미욱한 존재임에야 재앙은 불을 보듯 뻔했다.


20130819
김설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세운 송덕비.
 

#4. 나무와 우리 

자연보호단체 ‘노거수회’ 회장이자 기청산식물원(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을 운영하는 이삼우 원장은 안타까웠다. 김설보의 숲에 대한 사랑, 기부 정신 그리고 숲을 아끼고 지켜온 마을의 공동체 정신 등은 기념해야 마땅할 자산이었다. 그는 발 벗고 나섰다. 결국 숲의 의미를 알렸고, 포항시의 지원도 얻어냈다.

2003년 6월, 많은 사람의 참여와 축하 속에 숲은 ‘여인의 숲’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가 숲을 만들어 희사한 해가 1897년이니, 어언 100년 하고도 6년이 더 흐른 뒤였다. 현재 이 숲은 3만㎡(9천평)의 면적에 상수리나무 위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수난과 고난의 과정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느티나무도 십여 그루 섞여 자라고 있다. 그밖에 소나무 20여 그루와 더불어, 쉬나무며 말채나무며 느릅나무와 같은 활엽수들도 보기좋게 어우러져 있다.

송덕비도 새로 세워졌다. 숲의 무궁한 생명력과 번창을 기원하는 뜻에서 합장한 손으로 도토리를 감싼 모습을 형상화했다. 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여기 한 여인이 숲 사랑의 씨를 뿌려 전설 같은 향토 사랑의 미담으로 피어나게 하였더라. 이 숲 있으매 뭇 생명들 수마에서 건져지고 이 숲 무성하매 이 고을 또한 흥왕하였으니 여인의 고운 손이 이렇게 고귀한 업을 일구어 후세를 가르치는 도다. 그 뜻 기리며 뒤쫓아 가려는 의지를 함께 이 비에 새겨두노라.’

▨ 참고문헌=이정옥·김명화·박은미 연구보고서 ‘경북 여성상 정립을 위한 경북여성인물사 연구 및 활용’,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 ‘창조의 멘토 33인’
 

20130819
김진규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