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9> 세종의 인사시스템을 확립한 명재상 허조(경산)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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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23   |  발행일 2013-09-23 제13면   |  수정 2021-06-03 15:37
간택-평론-중의 3단계로 인사검증…“일 맡겼으면 의심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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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 허조를 배향한 금호서원. 1684년(숙종 10) 지방유림들이 허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하양읍 금락동에 처음 세웠다. 그 뒤 이건과 훼철을 거듭하다가 1923년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현 위치에 복원됐다.

 

◆Story Briefing
경암 허조(敬菴 許稠·1369∼1439)는 황희와 함께 세종의 치세((治世)를 가능케 한 명재상이다. 조선초 태조·정종·태종·세종의 네 임금을 섬기며 법전을 편수하고 예악제도를 정비했다.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특히 강직한 성품을 인정받아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것은 물론, 태종 역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그를 중용할 것을 권했다. 세종 때 10여년간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천거된 인재를 철저히 검증하는 인사시스템을 확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간택-평론-중의’ 3단계 원칙을 세워 인재를 가려냈다. 그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충각이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경일대 입구의 산업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인근의 금호서원에 배향됐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9편은 조선 초기의 명재상 허조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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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후·허조 부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충각이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경일대 입구의 산업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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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금호서원의 경덕사.



#1. 황희와 더불어 손꼽히는 명재상

정치란 백성으로 하여금 그 고마움을 알게 하는 것보다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위대하다고 했다. 태평성대의 상징인 중국의 요순시대를 이끈 요(堯)임금에게는 어진 재상 순(舜)이 있었다. 재상(宰相)은 백성을 굽어 살피며 임금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돕는 존재다. 고기를 저미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재(宰)와 나무 위에 올라가 널리 세상을 굽어보며 재목을 고른다는 뜻인 상(相)의 원뜻을 풀이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인사검증과 인사정책의 공정성을 통한 인사체제 확립은 재상의 덕목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다. 세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종 때부터 세종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어그러짐이 없는 명확한 법도를 지킨 강직한 재상이 있었는데, 바로 경암 허조다. 허조는 황희와 더불어 조선조의 정치·경제적 안정과 유교적 질서체제를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명재상이다.

그는 고려말 성리학을 들여온 학자, 문성공 안향의 사위 허수(許綏)의 증손자로 안향의 외고손자다. 본관은 하양(河陽)으로 조선 초기 명문거족으로 성장한 하양 허씨(許氏)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진사시, 생원시를 거쳐 고려 공양왕 2년(139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의시승이 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봉상시승 겸 지제교로 있으면서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을 만큼 기질이 간소하면서도 청렴했다.

어릴 때부터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했지만,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매일 새벽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 관대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정에 나아갈 때면 아침 일찍 사진(仕進, 규정된 시간에 근무지로 출근함)하여 해가 진 뒤에 퇴근했다. 일찍이 청백리로 추앙받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더워했지만, 시정간의 일부 경박한 이들은 그를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마르고 어깨와 등이 굽은 것을 비꼬아 별명을 수응재상(瘦鷹宰相, 굶은 매 또는 송골매)이라 불렀다.

허조는 또한 집안의 법도를 중시했다. 자제를 가르칠 땐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극히 조심했다. 그래서 혹 자제에게 허물이 보이면 반드시 사당의 조상에게 고하고 벌을 내렸다. 노비들이 죄가 있을 때에도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렸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허공은 음양(부부 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웃으면서 “만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두 아들은 어디에서 났단 말인가”라며 되받아쳤다.



#2. 철저한 검증…세종 때의 인사정책 주도

허조는 의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시험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부르며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그런 허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이후에 은문(恩門)이었던 염정수(廉廷秀)가 사형을 당하였다. 문생(門生)과 옛 부하였던 관리들이 감히 가보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조(稠)만이 홀로 가서 그 시신을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곽(棺槨)을 마련하여 장사를 지냈다.”

태종은 그런 허조를 지극히 총애했다. 한 번은 태종이 이조에 속한 정5품 관직인 이조정랑 자리가 비어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좀체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이조정랑 자리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자리이면서 재량권이 막강했다. 이 때문에 아무에게나 그 자리를 맡길 수 없었다. 관원의 명부를 들춰보며 고심하던 태종이 “사람을 얻었다(得人矣)”면서 무릎을 탁 쳤다. ‘허조’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태종은 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특별히 그를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손으로 어깨를 짚고 세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상, 이 사람이 나의 주석(柱石, 柱石之臣, 나라를 받치는 중추적인 신하)이오.”

세종 또한 인재를 쓸 때 늘 허조의 조언을 청했다. 허조의 공적 중 으뜸이 바로 인사시스템의 정립이었다. 10여 년간을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세종의 인사정책을 주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조의 인재검정시스템은 3단계로 행해졌다.

첫째, 어떤 관직에 사람을 등용할 때 인사담당관인 이조낭관을 시켜 후보를 매우 정밀하게 간택하게 했다. 후보자의 경력과 자질, 그리고 부패혐의는 물론, 가족관계까지 꼼꼼히 살펴보도록 했다. 둘째는, 이조 내부의 관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재차 평론하여 후보자가 그 자리에 적합한지, 더 나은 적임자는 없는지에 대해서 내부 전문가들로 하여금 격렬하게 토론하게 했다. 최종단계로, 이조 밖의 여론을 듣게 했다. 특히 고위직인 경우에는 인사를 주관하는 부서의 적합판정에도 불구하고 조정 안팎의 여론이 좋지 못하면 반드시 중의(衆議)가 일치한 후에 임명하도록 했다. 인재검증 3단계(간택-평론-중의)는 허조의 신념과도 같았다.

또한 허조는 발탁한 인재를 지켜보고 보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진 인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하며,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선택하여 육조의 장을 삼으신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토록 하실 것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하여 신하의 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3. 죽기 전에도 나라를 걱정하다

허조는 사사로운 일에 말이 미치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감히 다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조정랑을 거쳐 집현전직제학, 집의, 판사섬시사, 경승부윤, 예조참판을 거쳐 세종 즉위 후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러 과거시험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함에 당시 참판과 판서로서 또는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의 지공거(知貢擧)로서 문과(文科)와 사마시(司馬試)를 여러 번 관장하였다.

또한 왕실의 의식과 일반백성의 상제(喪祭)를 법제화하였다. 현재도 새겨볼만한 경외관구임법(京外官久任法)과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등을 상소하기도 했다. 경외관구임법은 전곡(錢穀)을 맡은 사람은 3년, 군현(郡縣)은 6년으로 하여 그 직무를 오래 본 뒤에 성적을 살펴 승진이나 면직을 정하는 법을 말한다. 부민고소금지법은 백성들이 자기 고을 수령의 한 가지 흠으로 모해하려는 것을 방지해 수령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태종 때부터 세종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의례상정소제조(儀禮詳定所提調)를 겸직해 각종 예제와 의식을 개정하거나 심의함에 한결같이 공정하였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했다. 그때 다섯 살 먹은 김시습(金時習)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세종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이듬해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을 들은 세종은 크게 놀라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슬퍼하며 사흘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종(文宗) 2년에는 황희 정승과 함께 세종묘정에 배향되어, 사후 신하의 최고 영예인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이 되었다.

생을 마감하기 전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예견하기도 했다. 당시 허조는 대마도의 왜인을 국내에 발을 붙이게 했다가는 큰 낭패를 볼 것이라고 세종에게 극간(極艱)한 것을 한 번 더 다짐하기 위해, 도승지 김돈(金墩)을 청해 집으로 오게 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야인(野人)이 있고, 동쪽으로 왜(倭)가 있으니, 만약 이들이 일시에 남북으로서 함께 난리를 일으킨다면 나라가 위태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태평성대라 하지만 누가 위태하기 전에 난리를 근심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상(聖上)께서는 유념하시어 더욱 남북의 변경을 철저히 방비하십시오.”

불세출, 조선의 명재상이었던 그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나라에 대한 근심과 충정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말도 남겼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일흔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정치와 인사에 끊임없는 잡음이 이는 지금의 나라 상황에 비춰볼 때, 참으로 부러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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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글=박미영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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