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0> 목은 이색과 그의 고향 괴시리(영덕)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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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30   |  발행일 2013-09-30 제13면   |  수정 2021-06-0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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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있는 목은 이색 선생 유적지. 왼쪽은 목은 기념관이고 오른쪽은 복원한 생가이다.

 

◆ Story Briefing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96)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에 충절을 지킨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죽부인전’으로 유명한 이곡(李穀)이 그의 아버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8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으로 성리학 공부에 주력했다. 1351년 부친상으로 귀국한 후 공민왕에게 국방 강화를 비롯해 교육 진흥, 불교 억제 등 당면 정책을 건의했다. 1367년에는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과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이 때문에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그를 불러들였지만 사양하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목은이 태어난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는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원래 마을 이름이 호지촌(濠池村)이었지만, 원나라에서 보았던 한림학사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槐市, 회나무가 많은 마을)와 지형지세가 비슷해 목은이 직접 괴시리라고 고쳐 부르도록 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0편은 목은 이색과 그의 고향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대한 이야기다.



#1. 원나라에서도 감탄한 문장력

해송이 듬성한 언덕배기에 몇 명의 관노를 거느린 벼슬아치가 서성이고 있다. 관복차림의 그는 영해(寧海) 부사였다. 목을 빼고 바라보던 그의 눈길에 저만치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단풍 드는 산길을 따라 두 명의 종복을 대동하고 말을 타고 오는 이는 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기품 있는 노인이다.

“대감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부사가 공손하게 나아가 노인을 맞이했다. 학자 특유의 고아(古雅)한 인상에 눈빛이 깊고 지혜로운 노인은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한산부원군으로 봉해진 목은 이색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의 절조를 지켜 삼은(三隱)으로 이름을 떨친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자가 영숙(潁叔)인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있어 배우지 않고도 글을 읽을 줄 알았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모두 외웠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런 그의 학문적 성취는 부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후일에 ‘죽부인전’으로 널리 알려진 찬성사(贊成事) 이곡은 항상 그에게 학문을 열심히 닦을 것을 신신당부했다. 당시 원나라에 머물던 이곡은 이색이 성균시에 합격한 소식을 들은 뒤에도 ‘서른 전에 독서를 게을리 한다면 늙어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항상 시간을 아껴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독려서신을 보내 왔을 정도였다.

마중 나온 부사 일행과 함께 얼마쯤 길을 돌아 나가자 산자락이 열리면서 수백 호 남짓한 촌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는 은빛 가을 햇살 아래 푸른 동해가 넉넉한 생명의 품을 열고 있다. 마을과 바다를 바라보는 이색의 눈길에 불현듯 짙은 그리움의 빛이 떠올랐다. 20여 년 전인가 잠깐 다녀간 후로 처음 방문하는, 그의 출생지이자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마음의 고향이 영원한 고향이라고 했던가. 언제나 원초적 그리움처럼 목은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던 마을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넓고 푸른 동해와 경치가 아름다운 해송 숲길 사이를 홀로 거닐며 사색했고, 자신의 꿈과 세상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키웠다. 자연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다. 바다는 그에게 관용과 지혜를 가르쳤고, 산은 절개와 용기를 갖게 했다.

이색이 외가가 있는 괴시리를 떠난 시기는 부친 이곡이 원나라의 조정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란 벼슬아치로 임명된 다음이었다. 조정 관원의 아들이라 하여 그는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으로 임명되어 원나라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중국의 학문을 깊이 공부하여 큰 성취를 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성리학에 관한 글을 즐겨 탐독했다.

원나라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였던 구양현(歐陽玄)과 학자적 교분을 가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당시 부친상(喪)을 입어 고국에 들렀던 이색은 1353년(공민왕 2) 향시에 1등으로 급제하여 서장관이 되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색은 뛰어난 실력으로 원 조정에서 개최하는 회시(會試)와 전시(殿試)에도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구양현이 젊은 이색을 변방사람으로 여기어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까지 왕래하느냐(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그 말을 들은 이색이 응답했다.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이색의 대답을 들은 구양현이 놀라서 낯빛을 고쳤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다니느냐’는 말은 ‘너희 하찮은 것들이 어찌 여기 중국에까지 왔느냐’는 멸시를 담은 것이었고, 이색의 대답은 ‘우리 고려인을 짐승이나 새처럼 여기는 당신네 중국 역시 개와 닭처럼 미개하지 않느냐’는 풍자가 깃든 대구(對句)였기 때문이었다. 이색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긴 구양현이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도다(持盃入海 知多海).”

이에 이색이 즉시로 화답했다.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坐井觀天 曰小天).”

목은의 뛰어난 문장력에 크게 감복한 구양현은 그날부터 목은과 학문을 논하는 친구가 되었다. 당과 송, 원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인 한유, 주돈이, 허형의 학문에 접하게 된 것도 구양현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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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에 있는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 목은과 부친 가정 이곡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이다.
 

#2. 공민왕의 총애, 그리고 영원한 고향 괴시리
 

“대감께서 오래전에 마을 이름을 고쳤다지요. 그래선지 마을 사람들도 이제 옛 지명 대신에 괴시리로 부른답니다.”

마을길을 걸으며 부사가 말을 건넸다. 그랬다. 원래 마을 이름은 호지촌(濠池村)이었다. 마을 옆으로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이 있었고, 그 주위로 늪이 많았으며, 북쪽에 호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색이 중국에서 문명을 떨치고 돌아와 이곳 영해의 고향마을을 찾았을 때, 원나라에서 보았던 한림학사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槐市, 회나무가 많은 마을)와 호지촌의 지형지세와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한 것을 알고서 괴시리라고 고쳐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

고향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이색은 감개 어린 눈길로 마을과 주변을 살폈다. 언제 보아도 아늑하고 풍광이 아름다웠다. 멀리서 이명처럼 아련히 동해의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부친 이곡이 관동의 아름다움을 찬한 ‘관동유기’라는 책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산책 좀 하려는데 어떠하오?”

간단한 주안상을 물린 다음이었다. 목은은 부사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유년시절에 즐겨 찾았던 산길을 걸으며 지난 일들을 반추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하시(何時)라도 나라 걱정을 잊은 날이 없었다. 부친상을 입었을 무렵에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개혁안을 올렸다. 전제(田制)의 개혁과 국방계획, 정방의 혁파,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이었다. 당시엔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첨예하고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조정의 모든 대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듬해에 원나라에서 한림원을 지내다가 귀국한 다음에는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을 관장하였다.

그 후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이색의 관직생활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역경도 없지 않았다. 한번은 간관들이 간언을 올린 것이 권세가의 비위를 거슬려 한꺼번에 좌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색 역시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상주(尙州)로 가게 되었으나, 당일 밤에 왕이 명령을 내려 그를 추밀원우부승선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목은은 재능과 덕망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에 비할 수 없으며, 관리의 임명을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인심을 복속시킬 수 없다’며 재상에게 일렀던 것이다. 그 뒤로 이색은 7년여를 국가의 기밀(機密)한 일을 관장하며 국정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궁이 함락되어 왕이 몽진을 떠나게 되었을 때였다. 다른 신료들이 허둥대며 스스로의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칠 적에도 이색은 왕의 곁을 지키며 신하 된 도리를 다하였다. 그 일로 그는 일등공신으로 책훈되었다. 그 이후로 왕은 이색을 아껴 늘 곁에 두려 했으며, 비록 파직되어 한가할 적에도 큰 일이 있으면 이색을 찾아 해결책을 물었다. 이색에 대한 왕의 신임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다시 짓자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등 다른 교관들과 함께 경전에 대한 강의와 토론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로써 정도전, 하륜, 권근, 윤소종 등 많은 학자들이 성균관에 모여들게 되었다. 가히 정주(程朱) 성리학(性理學)의 흥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색이 고려말 유학계의 구심점이 된 것은 이 당시 성균관을 통해 많은 학자를 양성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 얼마쯤 걷다 보니 솔숲 사이로 해안절벽과 그 아래로 바다가 푸르게 펼쳐진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색은 걸음을 멈췄다. 고향을 떠난 뒤로 항시 마음속에 그리던 경치였다.

“소문에 듣자니 저곳에서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를 쓰셨다지요.”

부사가 손을 들어 해안으로 돌출된 바위를 가리켰다. 이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어대소부는 해안 절벽에서 바다에 노니는 고기를 내려다보며 지은 시였다.

“이 풍경, 이 바다야말로 내 진정한 문학의 모태이자 스승인 셈이지.”

바다를 바라보며 목은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부사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짠 내음이 섞인 시원한 가을 해풍이 두 사람 얼굴을 스쳐갔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당시 나이 69세였다. 저서로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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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섭

글=박희섭<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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