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 이종학(울릉)

  • 정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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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14   |  발행일 2013-10-14 제13면   |  수정 2021-06-03 15:49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울릉)
이종학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 스토리 브리핑
독도박물관의 초대관장을 지낸 사운 이종학(史芸 李鍾學, 1927~2002)은 독도의 영유권 확립에 평생을 바친 서지학자(書誌學者)다. 1957년 서울 신촌의 연세대 인근에 고서점(古書店) ‘연세서림’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독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 독도에 관한 일본 측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수십 차례 일본을 다녀왔고, 이 과정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다양한 독도 관련 자료를 모았다.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일본 시마네현 관계자에게 독도가 한국 땅임을 주장한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생전에 그는 “내 평생 가장 기쁘고 통쾌한 일을 꼽으라면 1990년 7월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관계자로부터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항복을 받고 온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7년 독도박물관에 그가 평생 모았던 독도와 관련된 자료들을 기증하며, 초대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2000년 5월 ‘지키지 못한 독도, 독도박물관 문 닫습니다’라는 현수막과 함께 독도박물관을 폐관시켜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굴욕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행정·입법·사법부를 총동원해 독도에 관심을 가졌지만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며 열정을 쏟았다. 그의 뜻을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 울릉군 독도박물관 옆 언덕에 세워져 있다. 그의 유해는 송덕비 옆에 안장되어 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편은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울릉)
독도박물관은 이종학의 눈물과 땀으로 채워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수십 년간 국내외에서 수집해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는 지금도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1. 책방에서 길을 찾다

1997년. 서울 신촌.

‘연, 세, 서, 림’. 큼지막하게 써진 네 글자가 이종학의 가슴속으로 가득 차올랐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었다. 이종학은 온몸의 근육을 움직여 깊게 호흡했다.

“여기는 이제, 나의 모든 곳이자, 모든 것이야.”

‘연세서림’은 그의 두 번째 책방이었다. 첫 책방은 서울 종로5가에 열었던 ‘권독서당’이었다. 1955년 제대하고 열었던 그곳에서 그는 세상을 어렵게 익혔다. 그리고 신촌으로 옮겨온 지금,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주곡리. 그 작은 마을에서 그의 나이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극진했고, 할아버지의 보살핌은 단단했다. 서당에서 공부도 했다. 그때 그 공부가 그의 한문학적 소양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후 삼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삼괴고등공민학교에 진학했고, 광복 직후에는 건국전문학교에서 법률 공부도 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해 나갈 수 없었다. 이종학은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전장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고,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더 배우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다시 책 곁에 서 있는 이유였다.

이종학은 종이 냄새를 들이마시며 책들을 어루만졌다.

“책만큼은 이제 원없이 실컷 읽을 수 있겠구나.”

‘연세서림’은 1957년 연세대 인근 철길 옆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방보다 유흥거리가 압도적으로 더 많던 대학가였지만, 그의 서점은 용케 잘 버티어 갔다. 선비정신과 학구열로 견딘 시간이었다.

1971년 6월23일자 경향신문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대학가엔 서점을 몰아내고 다방 술집 양장점이 들어앉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대학가에서 경영주가 바뀐 서점들은 1백여 개. 10년 이상을 버티어온 책방이라야 延世(연세)서림(연대 앞), 梨花(이화)서림(이대 앞), 東明(동명)서관(성균관대 앞), 東洋(동양)서림(성균관대 앞) 등 손꼽을 정도.’

이종학의 연세서림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이종학은 서지학(書誌學)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 서지학이란, 책을 대상으로 하여 그 형태와 재료·용도·내용·변천 등을 과학적이며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좁게 보면 책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책, 그리고 또 책. 이종학은 아낌없이, 진심을 다하여, 책을 모으고, 책을 읽고, 책을 관찰하고, 책을 탐구하고, 책을 사랑했다. 그런 그의 인생은 1967년 서인달(徐仁達)을 만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서인달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유명한 고서 수집가였다. 그의 발이 연세서림의 문지방을 넘은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짙은 우정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서인달은 책과 학문에 대한 이종학의 애정과 열정에 감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인달은 언젠가부터 품기 시작했던 생각을 굳히고, 이종학을 찾아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물건에겐 제 임자가 있는 법입니다. 주인을 제대로 만나야 빛을 발하지요. 아무래도 이것들의 자리는 제가 아니라 이 선생 곁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다 드릴 터이니 귀하게 쓰십시오.”

그것은 그동안 서인달이 수집해온 고서와 고문서 등의 사료들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진 이종학이 감탄했다.

“눈이 다 부십니다.”

특히 이종학의 가슴을 순식간에 사로잡은 것은 임진왜란과 충무공 이순신장군에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이종학은 장군에게 무섭도록 몰두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는 막힘없이 죽죽 외울 정도였다. 백 번 이상 읽었으니 당연했다. 충무공의 백의종군 길을 따라 전국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종학에게 충무공은 단순한 연구대상이 아니었다. 거의 신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는 점점 넓어져, 독도문제와 일제침략사를 아우르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2. 가슴 가득 독도를 품다

1990년 7월2일. 일본 시마네현.

방 안 가득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마네현 관계자는 더 이상의 논리도, 그 이상의 해명도 찾지 못했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증거가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종학이 일본 시마네현까지 찾아가 그들에게 제시한 자료들은 명명백백했다.

우선 지도를 보면 1894년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일본해륙전도’와 1936년 육군성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지도, 그리고 동해를 일본해가 아닌 ‘조선해’ ‘대한해’ 등으로 표기한 1882년 3국(한·일·중)지도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10년대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및 문부성의 지리교과서와 일본해군성 발행 수로지, 러일전쟁 중 동해에서 벌어졌던 해전 관련 기사와 독도 관련 관보 등이 또 있었다. 이 자료들은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독도가 한국령임을 일본인 스스로 간접 인정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 부록 한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라는 문건까지 들이밀자 상황은 끝이었다. 그 안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 점거한 것이 명백한 불법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이종학은 영토문제와 한일관계를 통틀어, 사료를 수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서명운동이나 일회성 시위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바로 국제법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적인 자료를 발굴하고 논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종학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엄연히 우리 영토였다는 자료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갔다. 일본 현지조사도 수십 차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모인 자료들의 양은 실로 방대했다. 지도, 전적, 문서, 신문, 마이크로필름 등 351종에 걸친 512점이었다. 이종학은 이 모든 것을 독도박물관에 기증했다. 1997년 8월8일 개관한 독도박물관은 이종학의 눈물과 땀으로 채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 독도박물관의 첫 관장이 되다

2000년 5월23일.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약수터길 90-17번지, 독도박물관.

전화가 빗발쳤다.

“○○신문사입니다. 정말 휴관하실 겁니까?”

“○○○방송국입니다. 관장님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소동의 원인은 이종학이 울릉군에 전달한 내용 때문이었다.

“오는 31일 바다의 날과 일본 총리 방한에 맞춰 독도박물관을 휴관해 통치권, 정치권, 언론, 학회 등 국민 모두가 독도를 수호하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박물관 밖에는 현수막도 걸렸다.

‘지키지 못하는 독도, 독도박물관 문 닫았습니다’

이종학의 뜻은 확실했다.

“독도에 대한 무관심에 항의하는 겁니다. 개관 3년 만에 이런 일이 벌어져 안타까우나, 정부가 독도를 지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는 한 문을 열지 않겠습니다.”

당시 독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일본이 행정·입법·사법부를 총동원하여 대내외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것이 그때 우리나라의 처지이자, 수준이었다. 이종학은 그것을 굴욕이라고 받아들였고, 박물관 폐관이라는 강수를 둔 것이었다.

이후로도 이종학은 끈질기게 자료 전쟁을 이어나갔다. 일본이 무슨 논리를 들고 나와도 반박할 수 있는 논거와 자료를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발품을 들이고, 샅샅이 뒤졌다. 성과는 놀라웠다. 2002년 별세할 즈음까지 그가 확보한 자료는 박물관 개관 때보다 더 늘어나 무려 1천300여 점에 이르렀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울릉)
울릉군 독도박물관 옆 언덕에 세워져 있는 사운 이종학 송덕비(史芸李鍾學頌德碑). 독도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송덕비 옆에 그의 유해가 안장돼있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22] “한줌의 재가 되어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겠다” 독도박물관 초대관장 이종학(울릉)
김진규


#4. 역사 정신의 문을 열다

2002년 11월23일. 수원, 아주대병원.

이종학이 떠났다. 향년 75세였고, 아내와 딸이 남았다. 그리고 이틀 뒤 독도박물관 앞에 누웠다. 그랬기에 그는 떠난 것이 아니다. 독도가 있는 한 그도 영원히 산 것이다.

그는 늘 말했다.

“사료는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장되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움직였다. 사료의 성격에 따라 기증을 달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사료는 독립기념관에, 이순신 장군 자료는 현충사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에, 독도 관련 자료는 독도박물관에, 동학 관련 자료는 천도교에 나누어 기증했다. 그리고 화성 축성 2백주년 되던 해에 특별 전시된 ‘정조대왕 충효자료전’ 자료는 모두 수원시에 기증했다.

이종학은 독도 외에도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일본 궁내성의 문서를 발굴한 것은 단연 돋보이는 업적이었다. 그것을 통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 밝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북관대첩비가 우리나라 북쪽 회령 지방에 서있던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화성’의 명칭을 회복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불리던 ‘수원성’이란 이름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성을 폄훼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대왕 충효자료전’을 개최하고 ‘화성성역의궤’를 원형대로 복간하여 국내외 연구자와 기관에 기증했다. 이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여 수원에서는 수원박물관 내에 그의 사료관을 따로 두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사운(史芸)은 이종학의 아호다. 문자 그대로 보면 역사를 김매준다는 뜻이다. 김매기가 무엇인가. 작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잡초를 없애주는 일이다. 그렇듯이 역사가 대대로 누릴 정신의 땅이라면 온전히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역사가 제대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 제대로 자라게 하겠다는 의지, 그 모든 신념이 바로 그 호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김을 맬 차례다.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울릉 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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