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4-구미] 낙동강 물길따라<4> 김종직, 낙동강을 노래하다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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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14   |  발행일 2014-07-14 제13면   |  수정 2021-06-15 17:15
“누각 아래 배에다가 천만 꿰미 돈을 실었으니

남도 백성들이 이 가렴주구를 어이 견디어내리”

허균도 높이 평가한 詩…민초 삶 애달프게 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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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로 흘러든 낙동강 물길은 예나 지금이나 민초의 삶을 오롯이 품고 흐른다.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김종직은 낙동강을 보며 시를 짓고, 백성을 비탄에 빠뜨리는 세속의 폐단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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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한시 ‘낙동요’에 나오는 ‘관수루’. 나루터가 있었던 낙단교와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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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수루에 걸려 있는 김종직의 ‘낙동요’ 현액.

 

#1. 백성들, 이 가렴주구를 어이 견뎌내리

낙동강은 도도하게 흐른다. 저 먼 태백산 아래의 황지에서 발원해 안동을 지나 상주·구미에 이르면서 질펀해진다. 낙동 나루터만 해도 돛단배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제법 큰 배들이 온갖 물산을 풍부하게 싣고 관수루 아래로 유유하게 지나간다. 김종직은 그 물산들이 어떻게 모아져 서울로 이송이 되는지 알고 있다.

지금의 조선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과 갈등이 얼마나 많은가. 건국 후 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배층의 개혁의지는 쇠퇴했다. 부만 챙겼다. 그러니 농민층의 생활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들은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확대해 농장을 늘리고 많은 노비를 소유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늘어나는 공물의 과중한 부담과 방납의 폐단, 군포의 과중 등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농민은 소작인, 노비, 거지가 되거나 도적질을 일삼았다. 가뭄이 만연하고 전염병까지 퍼지며 굶어 죽는 이가 늘어났다.

그러니 저 물산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걷어들인 것이며, 서울 사는 고급 관리의 탐욕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도 서울서 벼슬아치 노릇을 꽤 해왔으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지 않느냐고 김종직은 뼈아프게 자문한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한 이래 정자, 교리, 감찰, 선산부사 등을 거쳐 도승지, 이조참판, 한성부윤, 공조참찬, 형조참판 등의 높은 벼슬을 지냈으니 말이다.

김종직은 질펀한 모래벌판 너머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는 나루터를 지나 언덕 위의 관수루를 올려다본다. 누각에는 양반들이 잔치를 벌이는지 풍악이 울린다. 누각 아래 차양을 친 속에는 황소를 잡아 푸짐하게 요리를 해선 연신 누각 위로 올려 보내고 있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무슨 별세상인 양 아득함을 느낀다. 자신의 자리가 누각 위도 아니고, 온갖 물산 가득 실은 배와도 상관이 없으면서 배를 기다리는 민초의 삶과도 유리되어 있는 게 아닌가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 부끄러움을 그는 시로 나타낸다. ‘낙동요(洛東謠)’다.



황지의 근원은 겨우 잔이나 넘칠 정도인데
여기까지 흘러와서는 어이 그리 번창한고
한 물이 육십 주를 가운데로 나누었으니
나루터 몇 곳이나 돛대가 연하였는고
해문까지 곧바로 사백 리를 내려가면서
순풍을 따라 왕래하는 상인들을 나눠 보내네
아침에 월파정에서 출발하여
저녁에는 관수루에서 자는데
누각 아래 배에다가 천만 꿰미 돈을 실었으니
남도 백성들이 이 가렴주구를 어이 견디어내리
쌀독이야 진작 비고 도토리와 밤마저도 떨어졌는데
강가 정자에서는 노랫소리에 살찐 소를 잡는다
나라의 사자들이 유성 같이 지나는데
길가의 해골이야 누가 이름이나 물어보랴
왕손초에 소녀풍이 불어라
아지랑이 아른아른 꽃다운 물가에 희롱하니
멀리 바라보는 눈에 나는 새가 들어오네
고향의 꽃구경할 일이 이내 새로워졌건만
흉년은 노니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구나
기둥 기대고 소리 높여 노래하니
문득 봄 흥취 인색함을 깨닫겠네
백구는 나를 비웃으려 하누나
바쁜 듯도 한가한 듯도 한 것을

(黃池之源 濫觴/ 奔流到此何湯湯/ 一水中分六十州/ 津渡幾處聯帆檣/ 海門直下四百里/ 便風分送往來商/ 朝發月波亭/ 暮宿觀水樓/ 樓下綱船千萬緡/ 南民何以堪誅求/已橡栗空/ 江干歌吹椎肥牛/ 皇華使者如流星/ 道傍誰問名/ 少女風王孫草/ 遊絲澹澹弄芳渚/ 望眼悠悠入飛鳥/ 故鄕花事轉頭新/ 凶年不屬嬉遊人/ 倚柱且高歌/ 忽覺春興/ 白鷗欲笑我/ 似忙還似閑)



‘낙동요’는 ‘점필재집’에 수록되어 있는 민요풍의 한시다. 관수루에도 현액(縣額)으로 걸려 있다. 이 시를 통해 영남 지역이 서울의 권신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고장이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시의 서두에 낙동강이라는 큰 강의 근원을 떠올리고, 그 강이 불어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뱃길을 그려낸다. 이어서 그 뱃길이 바로 서울 관원들의 가렴주구의 길임을 강조하고, 그 때문에 남도의 백성들이 큰 수난을 당하는 참상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시의 끝에는 고향을 찾는 자신의 회포를 떠올리면서, 갈매기마저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다는 자괴감을 나타낸다.

‘낙동요’는 당시의 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현실감이 생동하는 시다. 특히 서울 관원들의 가렴주구의 폐단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애민시의 한 전형으로 꼽힌다. 그러면서 자신도 서울서 벼슬아치로 살아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당대 지식인의 양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선산 태생으로 고향의 젖줄인 낙동강을 사랑해 낙동강을 노래한 시를 더러 남겼다. ‘낙동진(洛東津)’이란 시도 그중 하나다.



나루터의 아전은 농의 아전 아니고
그 관리들은 바로 읍 사람이도다.
삼장으로 임금님을 떠나와
오마로써 인자한 어머님을 위로하는구나.
흰 물새는 배 맞이하는 듯하고
푸른 산은 나그네 보내기에 익숙하도다.
맑은 강은 점 찍힌 것 전혀 없으니
그 맑음으로 내 몸을 다스리리라.

(津吏非瀧吏/ 官人卽邑人/ 三章辭聖主/ 五馬慰慈親/ 白鳥如迎棹/ 靑山慣送賓/ 澄江無點綴/ 持以律吾身)



#2.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혀

김종직(1430~92)은 우리나라 유학사의 중요 인물이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통에서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곧잘 근엄한 도학자로 인식되기 일쑤다. 더욱 무오사화의 빌미가 된 ‘조의제문’으로 절의의 인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특히 경술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자 이전에 문인으로 드러났다. 당대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고, 후대에도 학자로서보다는 문장가로 더 평가받았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재질을 드러냈다.

신흠은 그의 시를 두고 “점필재의 시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실로 과장된 말이 아니다”고 당대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꼽았다. 점필재의 처신을 혹평한 바 있는 허균조차 그의 시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그의 시적 자질은 일찍부터 잘 드러났다.



눈 속의 찬 매화, 비온 뒤의 산 모습은
보기는 쉬우나 그리기는 어려운 법
남들 눈에 못 들 줄 일찍이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 脂) 잡고 모란이나 그릴 것을

(雪裏寒梅雨後山/ 看時容易畵時難/ 早知不入時人眼/ 寧把脂寫牧丹)



열여섯 살 때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라고 한다. 젊은 김종직의 기상과 탄식이 깃들어있다. ‘눈 속의 매화’나 ‘비온 뒤의 산’은 높은 품격의 세계다. 자신은 그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란이나 그려서 시속에 영합하겠다는 푸념으로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자조감을 드러낸다. 그런 푸념을 통해 더욱더 자신의 세계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더위, 먼지, 시 짓는 일 자주 도와주어서
창랑정 한번 올라 푸른 물결 굽어보네
새끼 치는 백로 소리, 여뀌꽃 곁이고
배를 부르는 중의 그림자, 푸른 바위 사이로다
먼 길을 가려면 발 씻어도 좋으련만
우선 잠시 갓 벗고 먼산을 바라보네
술 마시고 또 마시어 어부들의 비웃음 면했으니
천 년 전 영균을 따라갈 수 있으리오

(炎塵故故助詩斑/ 一上滄浪俯碧灣/ 哺子鷺聲紅蔘側/ 喚船僧影翠岩間/ 未妨濯足驅長道/ 且要科頭看遠山/ 飽 免敎漁夫笑/ 靈均千載可能攀)



‘창랑정’이란 시다. 창랑정은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언덕에 있는 정자라 한다. 앞부분에서 창랑정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2연의 묘사는 아주 아름답다. 여뀌꽃 핀 강가에 백로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강 건너 편에서는 푸른 산 밑에서 승려가 나루를 건너려고 배를 부르고 있다. 정적인 가운데 미세한 움직임이 있고 고요한 가운데 그윽한 소리가 있다. 백로의 흰 색, 여뀌꽃의 붉은 색, 산의 푸른빛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결 고운 색감이 두드러진다.

그가 떠올리는 것은 영균, 곧 굴원이다. 정자 이름으로 인해 굴원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이 시 속의 탁족(濯足), 포(飽), 철( ), 어부 등은 굴원의 유명한 시 ‘어부사’에 있는 말들이다. 이를 통해 김종직은 어떻게 사는 삶이 진정한 삶인지를 되묻고 있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질이 잘 드러난 시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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