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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비산진 전투가 벌어졌던 구미 비산동 산호대교 일대. 당시에는 비산나루가 있던 곳으로,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1950년 8월5일부터 6일까지 치열한 야간 전투가 벌어졌다. |
#1. 파국 직전의 전황
“낙동강이 관건”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전선은 긴장이 더해갔다.
북한군의 남하는 너무 빨랐다. 국군은 저지할 엄두도 못낸 채 남으로 밀리기만 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은 갑자기 남하하여, 6월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이어 금강을 건너 7월20일 대전을 장악했다.
“이런 속도라면 8월15일까지는 낙동강 선을 넘을 수 있을 거야.”
북한군은 낙동강을 빨리 건너서 그대로 부산까지 밀어붙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7월 말 북한군 제15사단 5천여 명은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주를 맹공격했다. 이를 미군 제1기병사단의 주력과 제8군 제27연대 및 국군 제15연대가 방어하는 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기세는 워낙 거세 전황은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워커 사령관은 고민에 빠졌다.
“현 상황에서 맞붙으면 우리 쪽 피해가 너무 커지겠지.”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앨먼드 참모장에게 전화했다.
“대구가 언제까지 안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가? 군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낙동강의 도하가 이루어질 것이 우려되면서 그는 결국 미군 제27연대에 낙동강으로의 철수 준비를 명령하였다.
그러자 맥아더는 긴장했다. 그는 7월27일 직접 대구에 왔다. 그리하여 각 전선을 일일이 체크한 후 강조했다.
“미 제8군은 현재의 전선을 확보해야 한다.”
맥아더는 현 전선에서 더 밀리면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 전선 사수를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난 뒤 도쿄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군 제25사단은 상주를 포기했다. 이어 미군 제1기병사단도 김천으로 철수했다. 다만 제5기병연대 제2대대는 자고산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군의 철수 소식은 즉각 전 세계에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전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도했다. 비관론이 강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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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의 도하를 막다
국군은 이런 상황에서 다급하게 낙동강 사수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국군 제15연대는 8월4일 인동국민학교에 집결했다. 연대 지휘소를 가산 소복동에 설치한 후, 이날 오후 3개 대대를 낙동강 강안에 배치했다.
한편 북한군은 낙동강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도하(渡河) 작전에 유리한 지역을 찾아라.”
바로 정탐부대가 떴다. 그들은 은밀히 낙동강 강안을 수색하면서 강을 건너기 유리한 지형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지휘소는 이내 작전을 짰다.
“지형적으로 홀소(속칭 지푼다리)와 북삼의 마진나루터가 적당하겠군.”
여러 정황상 도하 작전을 그렇게 세운 북한군은 이 소식이 국군에게 알려지는 걸 우려하여 기만작전을 썼다.
“병력 일부를 낙동강 비산진 지역으로 접근시켜 적을 교란하라.”
북한군은 일부러 소부대를 앞세워 강을 건너는 시늉을 했다. 8월5일 밤과 6일 새벽에 홀소나루터와 비산나루터에 각각 1개 중대를 투입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만작전에 국군이 말려들면 바로 이어서 마진나루터로 대거 강을 건널 작정이었다.
한편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는 인동의 구포동과 임수동에 위치한 낙동강 동쪽 강기슭인 장암산과 동락나루터 사이에 3개 중대를 배치했다. 그리하여 각 중대로 하여금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강안(江岸)을 탐색하게 하였다. 대대의 중심일선인 제5중대 정면에 비산나루터가 위치했다. 강물은 푸른빛을 띠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어서 깊어보였지만, 옷을 걷고 물을 건널 정도의 깊이에 불과했다. 강변 기슭에는 봉명이라는 높이 70m의 언덕이 있어서 도하에 더욱 유리했다.
“이 정도 지형이라면 적이 도하를 하기에 안성맞춤이겠지?”
제5중대는 지형의 특징을 감안하여 북한군이 급속하게 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판단했다.
“강변에 화기를 배치하고 병력을 은폐시켜라.”
8월5일 저녁, 강변에는 참호들이 파지고, 그 속과 강가 풀밭에는 군인들이 매복을 하면서 화기를 배치했다.
이날 밤 11시경 북한군의 요란한 사격이 시작됐다.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 저들의 상황을 정탐해야겠다.”
중대장은 안병길 이등중사를 중심으로 10명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한 후 명령했다.
“대안(對岸)에 침투하여 적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하라.”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피아의 구분이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강을 건너오는 피란민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게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전투정찰대가 출발한 얼마 뒤, 부중대장인 선임장교가 갑자기 총구를 들이대며 피란민을 정지시켰다.
“모두 손들어. 검문하겠다.”
이내 그들 속에 수상한 자가 눈에 띄었다. 피란민 속에 끼어든 북한군의 편의대였다. 두 명을 체포했다. 중대의 좌측 강안에서도 침투한 북한군 한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전투정찰대는 강 건너 낮은 언덕 일대를 정찰했다.
“쉿, 적이다!”
정찰대는 일제히 납작 엎드렸다. 기어서 가까이 가보니, 북한군 1개 중대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공격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이었다.
“어떡하지? 저들과 너무 가까워서 들키겠는데.”
“그래,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이야.”
안병길 이등중사는 결국 기습을 하면서 여차하면 뒤로 빠질 생각을 했다. 그는 부하들을 전투대형으로 배치한 후 손으로 사격신호를 했다. 10명의 부대원은 일시에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던졌다. 고요하던 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북한군은 난데없이 가해진 기습에다 국군의 규모를 알 수 없어 크게 당황했다. 한동안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지금이 기회다. 빨리 퇴각하라.”
안 중사의 퇴각명령에 모두는 뒤로 기어서 재빨리 언덕을 내려와 강 위를 달리다시피 해서 중대로 복귀했다.
“누가 뒤처지지 않았나?”
인원점검을 하니 모두 무사히 돌아온 게 확인됐다. 두 명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부대는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나 사방은 너무나 고요했다.
“이상하다. 한 시간이 지났는 데도 왜 이리 조용하지?”
중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찰대의 보고로 봐서 바로 북한군의 도발해올 것이라 여겼는데, 너무 조용하자 중대장은 긴장했다. 너무 어두워 앞이 잘 식별이 되지 않았다.
“조명탄을 발사해라.”
몇 발의 조명탄이 발사됐다. 갑자기 강안이 환해졌다.
“적이다!”
병사들이 소리치며, 강을 가리켰다. 전방 20~30m 수면에 30~40개의 대나무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뒤 40~50m에는 1개 중대 병력이 천천히 뒤따르고 있는 게 식별됐다.
중대장은 다급하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예광탄(曳光彈) 한 발을 신호로 일제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던져라!” 총알이 난무하고 화력이 집중되면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적의 대항이 동시에 나타났다. 북한군의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졌다. 교전이 10 분 만에 갑자기 북한군 쪽이 조용해졌다. 수중의 북한군이 대부분 격멸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급히 강 건너로 후퇴했기 때문이었다.
“멈추지 말고 바로 박격포를 날려라!”
중대장의 지시와 함께 박격포가 강 건너 기슭에 집중적으로 쏘아졌다. 북한군은 허둥지둥 퇴각을 거듭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중대장은 강안을 자세히 살폈다.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찰조를 급히 조직하여 강 건너편을 수색했다. 언덕들도 샅샅이 살폈으나 북한군은 보이지 않았다. 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북한의 10여 명을 잡아 중대로 복귀했다.
#3. 국군의 왕성한 전투력 입증
비산진 전투는 8월5일과 6일 사이 야간에 벌어진 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 제5중대 소속 전투정찰대는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 중대 병력을 거의 섬멸했다. 한국군의 손실은 부상자 5~6명에 불과하였으나 북한군의 사상자는 컸다. 격전을 치른 6일 새벽, 물위에 떠내려가는 시신만도 49구가 확인됐다.
비산진 전투가 끝나자 대대에서는 큰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북한군의 접근을 조기에 경보하여 기선을 잡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특공대를 편성하여 대안에 침투시키라.”
한편, 비산진의 남쪽에 위치한 홀소나루터와 약목면 덕산동 대안(對岸)에서도 8월6일 새벽 전투가 벌어져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했다. 또한 국군 제15연대 제1대대는 8월8일 마진나루터를 도하하여 석적의 남율동에 위치한 하의산 고지를 점령한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비산진 전투는 북한군 제15사단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발발하였다. 미군사령부가 부산 이동을 논의할 만큼 첨예한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비산진 전투의 승리로 인해 6·25전쟁에서 국군의 왕성한 전투력을 입증하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낙동강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북한군의 전력과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 한국전쟁 전투사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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