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 프롤로그 - 왜 감문국인가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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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06   |  발행일 2015-05-06 제13면   |  수정 2021-06-16 16:38
김천의 모든 歷史엔 2천년 前 감문국의 숨결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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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의 금효왕릉은 감문국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천 최대의 고분이다.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이 이 고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영남일보는 ‘감문국(甘文國)의 흔적을 찾아서’ 시리즈를 매주 연재한다.

삼한시대 김천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감문국을 중심으로 그 스토리를 풀어낸다. 

감문국은 기원전 2~3세기 경 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일원에서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각 세력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여느 부족국가와 다른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서기 231년(신라 조분왕 2)에 신라 이찬 우로에 의해 정벌 당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감문국은 경북의 여타 부족국가처럼 그동안 관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고대국가 성립 전 태동한 부족국가의 존재는 역사의 승자인 고구려·백제·신라에 의해 가려졌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존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영남일보는 감문국의 흔적을 다시 더듬어보고, 김천의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 보고자 한다.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단을 구성해 심층 취재에 나선다. 향토의 역사와 뿌리를 재조명하고 지역의 새로운 역사·문화 콘텐츠도 발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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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문국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이찬 우로가 감문국을 토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다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 유라시아 대륙을 떠돌던 인류는 어느덧 한반도에 이르렀다. 대륙의 중심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사람들은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퍼져나갔고, 강과 하천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며 문명을 일구어냈다.

특히 한반도 남부권의 정중앙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가진 김천 일원은 우리나라의 고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여느 국가의 고도(古都)처럼 화려한 유산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선조의 삶을 엿보기에 충분한 공간적 배경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한반도에 정착한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천은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우리 역사의 조각들을 품고 있다.

감문국은 다양한 문화를 빠르게 흡수했다. 백두대간을 병풍으로 삼고, 어머니의 젖줄과 같은 감천(甘川)에 기대어 수준급의 문화를 꽃피웠다. 경북 서북부에 자리한 김천은 남한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는 금오산, 서쪽에는 황악산이 백두대간 준령들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소백산맥의 지맥인 삼도봉(해발 1천178m)은 지금도 경북·충북·전북의 3도를 모두 접하고 있다. 이러한 김천의 지리적 입지는 감문국이 발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김천을 가로지르는 감천도 감문국의 형성·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감천 유역에서는 일찍이 인류가 정착해 살아온 흔적들이 남아있다. 감문국이 터를 잡은 감천유역에서는 다양한 세력이 집단을 형성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의 신석기 유적에 남아있는 옛 취락지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개령면에 3개의 정치집단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감문국 외의 다른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중에서도 김천시 개령면 일원에서 흥망성쇠의 역사를 써내려간 고대 부족국가 감문국의 유산은 주목할 만하다. 감문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는 토기와 고분 벽화를 비롯해 진귀한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현재 경북대·계명대 등 지역 대학의 박물관에 다수의 유물이 보관 및 전시되고 있다. 또한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과 신석기 취락 등 선사시대 유적은 김천이 감문국의 건국 이전부터 인류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감문국을 둘러싼 김천시 감문면의 속문산성·고소산성 등의 군사 유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적은 감문국의 영역이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각 세력집단이 한반도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차지해야 할 지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탄탄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전까지, 감문국은 한반도 지배 세력의 접점으로 독특한 문화를 향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부권 정중앙’ 고대역사 중심지
삼한·삼국의 주도권 쟁탈 요충지 주목
각 지배세력의 접점…독특한 문화 발원

기원전 2∼3세기경 개령면 일원서 건국
삼국사기 “서기231년 신라에 정벌”기록
김천 옛지명 금릉‘금효왕릉서 유래’說




#2.‘금릉(金陵)’의 땅 감문국

어느 시대나 ‘역사(歷史)’는 ‘신화(神話)’를 밑거름으로 삼아 성장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와, 인류를 창조했다는 중국 복희씨(伏羲氏) 신화처럼 구술로 전해오던 인류의 문화유산은 문명시대로 접어들며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김천에서 일어난 부족국가 감문국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기원 전후의 아득한 옛 일임에도 불구, 감문국과 관련한 문헌과 유적은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감문국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다. 지금까지도 김천지역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감문국이라는 국명(國名)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는 ‘금릉(金陵)’이라는 김천의 옛 지명으로 알 수 있다.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에 위치한 감문국 왕의 무덤 금효왕릉(金孝王陵)에서 ‘금릉’이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감문국 왕릉으로 전해지는 금효왕릉은 높이 6m, 지름15m의 규모로 김천 최대의 고분으로 꼽힌다. 원래 현재보다 더 큰 규모였지만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는 못했고, 인근 경작지로 인해 침식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수차례 도굴된 것으로 의심되고 있지만 여전히 김천을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 중 하나다.

지리서 조선환여승람에서는 “(김천시 감문면) 삼성동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1995년 1월1일, 금릉군이 김천시에 통합되기 전까지 감문국을 상징하는 ‘금릉’이 김천의 옛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감문국과 김천의 역사가 여전히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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