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6> 비운의 신라 장수 석우로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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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10   |  발행일 2015-06-10 제13면   |  수정 2021-06-16 16:54
辰韓의 읍락국가 정벌 전쟁영웅…그는 왜 倭人에 불태워 죽임 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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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락국가 감문국의 영역이었던 김천시내 전경. 서기 231년 신라의 귀족이자 장수였던 석우로는 현재의 김천지역인 감문국을 공략, 진한(辰韓)세력을 신라로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김천시 제공>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한 석우로(昔于老·?~249년)는 신라의 장수이면서 감문국과 관련된 대표적 인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조분왕 2년(231년)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석우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를 확장한 영웅이다. 반면 감문국의 입장에서는 포악한 정복자다. 입장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지만 감문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석우로에 대한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6편은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지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신라의 장수이자 귀족, 석우로에 관한 이야기다.



# 신라 지배세력의 일원

감문국 정벌에 나선 석우로는 신라 10대 임금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다. 일설에는 각간(角干·신라의 최고 관직) 수로(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석우로는 박·석·김씨 세력이 연합해 이사금(尼師今·신라에서 사용한 임금의 칭호)을 선출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석씨 세력의 일원이었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신라는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김씨와 박씨, 석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했다. 석우로가 왕성한 활동을 펼친 조분왕 시기에는 주로 석씨가 왕위를 잇고 있었다.

왕의 아들인 석우로 역시 왕위 계승 후보였다. 훗날 석우로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인 흘해(삼국유사에는 걸해)가 왕으로 즉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석우로 생존 당시의 신라는 일반적 왕위계승이 이뤄지지 않는 나라였다. 석우로 역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은 있었지만 선택받지는 못했다. 왕권은 강하지 않았고, 각 부(성씨)의 공감대를 얻는 인물이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6세기 법흥·진흥왕대에 이르러서야 강력한 왕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설에는 석우로가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사금 시대의 왕위계승을 장자 중심으로 왕위를 잇던 후대의 시기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왕의 아들이라는 지위가 왕권 계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석우로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서 비중있게 다뤄졌다. 실례로 석우로는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과 연개소문, 궁예, 견훤 등 열전에 언급된 인물이 80여명에 불과하기에 더 눈길이 간다. 물론 열전에 포함된 것이 해당 인물의 중요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다만 삼국사기 편찬 당시 사관의 선택을 받았을 만큼 중요도가 있었으며, 관련 자료가 남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석우로가 열전에 기록된 것이 삼국사기를 쓴 고려의 유학자 김부식의 출신지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부식의 가문은 경주를 세거지로 두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대에 개경(개성)의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고려시대 거란의 2차 침입 때 수많은 역사자료가 소실됐는데, 김부식이 경주에 남아있던 고자료를 활용했다는 의견이다. 이 때문에 석우로와 같은 신라계 인물이 부각될 수 있었다는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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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에는 석우로가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정황이 상세하게 나온다.
# 전투에 탁월한 장수

초기 신라의 지배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했다. 지배층이 전투의 선종에 나서는 것은 권위를 확보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성씨로 하나 된 친족공동체는 전쟁을 통해 각 세력의 위상을 드러내려 했다. 전쟁은 귀족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했다.

감문국 멸망 당시의 신라 역시 영역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석우로 또한 전쟁터에서 명성을 쌓는다. 석우로는 신라의 장수로, 석씨 지배세력의 일원으로 전장(戰場)을 누비던 영웅이었다. 진한(辰韓·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읍락국가들을 정벌해 신라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추풍령을 거느렸던 감문국은 석우로가 정복한 대표적 나라였다. 조분왕 재위 초반 감문국을 정벌한 석우로는 신라의 지배권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또한 ‘왜인이 신라에 침입하자 사도에서 싸워 화공으로 적의 전함을 불태워 승리했다’며 그의 전공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석우로는 상주지역의 읍락국가 사벌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토벌에 나섰다. 당시 사벌국은 백제와 연합해 신라에 맞서려 했지만 석우로에 의해 신라에 복속되고 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석우로의 사벌국 토벌 기록이 신라의 진한 통합과 관련한 삼국사기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점이다. 강종훈 교수는 “석우로의 활약으로 신라는 사실상 진한의 통합을 마무리지었다. 그는 진한을 대신하는 신라를 탄생시킨 영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장수 석우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열전은 석우로에 대해 “조분왕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자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다. 밤이 되어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우로는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섶에 불을 피워 따듯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기뻐하여 마치 솜을 두른 것같이 포근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전투에 패했지만 병사의 고단함을 일일이 챙기는 덕장(德將)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석우로의 군사적 능력을 묘사하려는 사관의 의도로 풀이된다.



감문국 토벌 등 신라 영토확장 혁혁한 功
왜인 격퇴‘용장’ 병사 돌보는‘덕장’ 면모
삼국사기 列傳에도 궁예 등과 함께 실려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객관서 倭 사신에 말 실수…침략 빌미줘
이후 해명하러 倭 진영 찾았다 최후 맞아

 

 


# 석우로는 과연 포악한 인물이었나

감문국 멸망의 한(恨) 때문인지 김천의 향토사학계는 신라의 영웅 석우로를 매우 포악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석우로의 성격이 매우 거칠었으며, 감문국과 신라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김천지역 구전에 따르면 80명의 감문국 결사대가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의 속문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김천 향토사학계는 왜(倭) 사신과 관련한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의 기록을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다.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신라 객관에서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에게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석우로가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며 왜의 사신을 농락했다고 전해진다. 석우로가 사신을 조롱할 정도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반면 강종훈 교수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강 교수는 “석우로는 말 실수로 파멸에까지 이른 인물이다. 성격이 거칠었다기보다는 신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관은 석우로가 죽은 원인으로 ‘말 실수’를 꼽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은 ‘(석)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 군무와 국정을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중략) 그런데 말 한마디의 잘못으로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또 두 나라(신라·왜)로 하여금 싸우게까지 했다’고 전한다.

석우로의 행동이 실수인지 성격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왕은 사신의 일을 빌미 삼아 신라에 침입했다. 갑작스러운 전란을 수습하려는 석우로는 왜군 진영으로 직접 찾아가 해명에 나섰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석우로는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 생각하였겠는가”라며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석우로는 왜인에 의해 불에 타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훗날 석우로의 부인이 왜의 사신을 죽여 남편의 복수를 했다고 전한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공동기획 :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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