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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상·하행 각각 하루 5번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전부지만 상주역은 지금도 경북선 여객 양의 절반을 차지한다. 역에서 빠져나와 슬렁슬렁 걸으며 옛 추억을 더듬어보는 것이 기차여행의 묘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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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역 공영 자전거 주차장에서는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주는데, 자전거를 타고 상주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것도 그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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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출신 자전거 선수 박상헌의 이력을 새긴 표지석. 그는 1925년 조선8도 전국 자전거대회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
상주역은 한산했다. 몇몇 사람들이 승강장을 빠져나가자 금세 텅 비어 고요했다. 철길 옆에는 몇 그루 수양벚나무가 봄만을 기다리는 듯 새초롬했고, 그늘을 드리운 승강장 지붕은 성실한 역무원처럼 몸을 곧게 세우고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 대합실로 향하는 캐노피 위로 상주역 코레일 역명판이 보인다. 그 너머로 정면 쪽 역 간판이 살짝 솟아있다. 옛 철도청 시절 사용했던 반달모양의 역명판을 재활용한 모습이다. 상주역은 크고 작은 사각형의 매스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역사는 1971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상주역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상주역
상주역은 김천에서 영주를 잇는 경북선에 속해 있다. 경북선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철도로 당시에는 김천에서 안동을 잇는 노선이었다. 1921년에 착공되어 1931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지만 태평양 전쟁기인 1944년 점촌에서 안동 사이의 철로는 전쟁 물자로 철거되었다. 현재의 경북선은 광복 이후 옛 노선을 수정하여 건설된 것으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 북부지방의 생활권 형성과 물자의 집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북선은 기능이 점점 쇠약해지고 유독 폐역과 무인역이 많은 노선이 되었다.
상주역은 여전히 유인역이다. 비둘기호와 통일호 열차는 모두 다 없어지고 이제는 상·하행 각각 하루 5번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전부지만 상주역은 지금도 경북선 여객 양의 절반을 차지한다. 주말에는 부산에서 출발해 강릉까지 이어지는 열차를 추가로 운행하고 있다.
대합실은 넉넉하다. 냉난방이 되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상주의 특산물인 상주 쌀과 누에, 곶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합실 의자에 앉으면 텔레비전과 자판기 위로 오래된 흑백 사진이 커다랗게 보인다. '1925년 조선8도 전국 자전거대회' 사진이다. 조선팔도전국자전거대회는 상주역 개통을 기념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자전거 왕 엄복동 선수와 상주 출신의 박상헌 선수가 일본인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조선인 선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사진 속 우승 깃발을 쥔 사람들과 쌀가마니를 앞에 둔 사람들의 얼굴에서 매우 옅은 미소를 느낀다. 모두 우리의 선수들이다.
#. 상주역
1924년 시작…물자수송 핵심 역할
지금은 무궁화호만 운행하는 유인역
대합실엔 세월의 흔적 흑백사진 즐비
역주변 자전거타고 구경하기 좋아
읍성·옥터 등 곶감시장 가볼 만해
역 광장이 훤하다. 아주 오래전 이곳을 가득 채웠을 팽팽한 긴장감을 상상해 본다. 역 광장 오른편에는 작은 무대가 있다. 그 옆에 상주역 공영 자전거 주차장이 있는데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도시 상주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것도 좋겠다.
슬렁슬렁 걸으며 이 도시의 길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상주역은 상주시 성동동에 위치하고 성동은 상주읍성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다. 성벽은 1912년 일제에 의해 무너졌지만 상주역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남문길, 성동길, 성하동 등과 같은 이름들은 사라진 것의 내력을 환기시킨다.
상주역 공영자전거 주차장 옆에는 철도변을 성동1길까지 따라 이어지는 숲길 산책로가 있다. 자전거에 대해 알려주는 벽화가 있고 소나무와 전나무와 이팝나무들 사이로 호젓한 소로가 나있다. 곳곳에 벤치와 파고라가 있어 어디에서 머물러도 편안하다. 상동동 제1건널목을 건너면 좁은 길을 따라 '칙칙폭폭 꼬마기차' '덜컹덜컹 기차' '바다 기차' 등과 같은 그림책 벽화가 함께하고 상주의 지명유래, 상주 읍성과 동서남북 성문들, 태평루, 상산관과 같은 옛 건물들에 대한 안내도 만날 수 있다.
산책로에서 남문2길로 빠져나가면 상주 중앙시장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가겟집들이 뜨문뜨문 있는 한적한 주택가를 조금 걷다 보면 상회나 얼음 수산물 가게, 설비집 등 다양한 점포들이 이어지면서 시장이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골목 모퉁이에 걸린 '상주옥터' 안내판을 본다. 상주옥터는 1408년 경상도 관찰영이 상주에 있을 당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 시기 동안, 경상도 서북부 지방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갇혔다가 순교했다.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도 이곳에서 대구 관덕정으로 이관되어 순교했다. 지금 옥터에는 자그마한 경당이 있고 마당에는 사라진 상주읍성의 성돌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옥터 근처에 상주 곶감시장이 있고 길을 하나 건너면 상주 중앙시장이다. 곧 상주 거리마다 주황빛 감들이 와르르 쏟아지겠다.
한편 '문경∼상주∼김천' 내륙철도 사업이 가시화되면 상주 기차여행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사업은 총사업비 1조3714억원을 들여 중부내륙철도(서울 수서∼경북 문경)와 남부내륙철도(김천∼경남 거제)의 미연결 구간(73km)을 잇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현재 예비타당성조사가 진행중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예타를 통과하면 철도를 이용한 접근성이 좋아져 기차여행은 물론 상주의 관광산업은 날개를 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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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역 남쪽에 있는 청리역의 대합실. 청리면에 위치한 의미 깊은 곳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방송에 소개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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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리역을 빠져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50년 된 공동 빨래터도 볼 수 있다. |
#2. 청리역
경북선에는 26개의 역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열차가 서는 역은 10개. 그 중 절반 정도는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상주역 남쪽에 있는 청리역도 2014년 역사 내 직원이 없는 무인역이 되었다. 상주역과 마찬가지로 1924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니 이곳에 기차가 선 지 100년이 다 되어간다. 역사는 1978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이다.
대합실에는 승객들을 위한 의자가 있고 텅 빈 매표창구가 하나 있다. 벽 위쪽에는 존애원과 체화당 등 청리면에 위치한 의미 깊은 곳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모두 역에서 근거리다. 지난 4월 MBC '손현주의 간이역'이 청리역에서 촬영되었는데 대합실 한쪽에 촬영 당시의 스냅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송 이후 청리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소소히 늘었다고 한다.
#. 청리역
2014년부터 직원없는 무인역 운영
올 4월에 '손현주의 간이역' 촬영
방송후 찾아오는 사람 소소히 늘어
통통방앗간·논두렁길·공동빨래터
사진작가들에겐 이미 유명한 장소
역 광장이라 할 만한 공간은 없다. 역을 빠져나오면 곧장 길 양쪽과 정면으로 개인택시, 역전분식, 중국집, 역전다방, 이발소 등의 역전그룹이 펼쳐진다. 간이역에 대한 아련한 기억에는 언제나 역 앞의 풍경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청리역 역시 정감 넘치는 역전 풍경을 가지고 있다. 역전그룹의 조용한 환호를 뚫고 통통 방앗간을 지나 청하 4건널목을 건너 한적한 논두렁길을 조금 걸으면 50년 된 공동 빨래터도 볼 수 있다.
사실 청리역은 사진가들에게 이미 유명한 곳이다. 들이 황금색으로 물들 무렵이면 청리교 위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기차는 황금 들녘의 가운데를 뚫고 달려오며 땡땡 땡땡 인사를 한다. 이제 들은 비워져 서늘하게 눈부신 햇살아래 깊은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그 휴식의 한가운데로, 저기 기차가 온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