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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평양. 영남일보 종군기자로 취재하던 장덕조가 군복 차림으로 야전침대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딸 박영애씨 제공 |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9분. UN군과 북한군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3년여 동안 이어진 지루한 전쟁의 막을 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평소 회담은 몇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지만, 이날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시작한 지 9분 만에 사인을 마쳤다.
이날 조인식을 취재한 한국 기자는 50여명. 그중에는 야무지고 당찬 얼굴을 한 여기자가 한 명 끼어 있었다. 이미 빼어난 미모와 단정한 매무새로 전장에서 뭇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그녀였다. 경북 최초의 여기자이자, 6·25전쟁을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인 영남일보 문화부장 출신 장덕조였다.
장씨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나는 유일한 여성기자로 전선에 나가 취재를 했다. 입고 있던 군복에 종군기자라는 완장을 차고, 모자도 특별한 것을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나는 극성스럽게 전투 중에 대대까지 나가 많은 기사를 썼고, 내외국을 향해 기사를 송고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6·25전쟁때 대구로 내려와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서울 배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장씨가 영남일보 종군기자가 된 것은 6·25전쟁 때문이었다. 젊어서 소설가로 관심을 받던 장덕조는 전쟁이 발발하자 홀로 어린 7남매를 이끌고 피란길에 나섰다. 정치활동을 하던 남편은 부산으로 내려간 후였으며, 막내는 생후 6개월이 된 때였다.
막상 대구로 왔지만, 살 길은 막막했다. 두부행상이라도 하려던 참에 함께 피란 내려온 문우 한 사람이 장덕조를 찾는 광고를 '영남일보'에서 봤다고 했다. 그즈음 영남일보에는 사람찾는 광고가 매일같이 실렸다. 변변한 옷 한 벌이 없던 장덕조는 소설가 최정희에게 새 저고리를 빌려 입고 영남일보로 향했다. 김영보 사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김 사장은 장덕조가 피란왔다는 말을 듣고 문화부장 자리를 맡기려고 찾아다녔는데 있는 곳을 몰라서 며칠째 신문광고를 냈다고 했다. 이날부터 장덕조는 전쟁통에서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던 영남일보의 문화부 기자가 됐다. 이때 나이 36세였다.
장덕조의 3녀인 소설가 박영애씨는 "어머니는 영남일보 기자였다는 것을 평생 자랑스러워했다. 즐겁고 화려했던 것보다 가열차고 처절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면서도, 신문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던 너무나 많은 사실을 보고 체험할 수 있었음을 평생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영남일보 기자가 된 장덕조는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인 5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화부장이면서 사회면 기사도 썼다. 사설도 썼다. 지방신문의 사투리를 바로잡겠다면서 정치면과 사회면의 교정까지 보았다. 문화면 조판을 하러 공장에 내려가면 '여자도 판을 짤 줄 압니꺼?'라며 조판공들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헌신적인 기자 생활을 이어간 것이다. 장덕조는 "당시 문화면 조판을 직접한다는 것은 문화부장으로서의 책임이요, 긍지였다"고 말했다.
영남일보와의 끈끈한 인연은 그녀의 아들에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영남일보는 피란 문인의 자녀에게 학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당일 신문을 나눠주어 가판을 하게 했다. 9세 된 차남 우형은 매일 신문사까지 걸어와 신문을 받아들고 "오늘 날짜 영남일보 나왔습니다"라고 소리치며 신문을 팔았다. 신문을 안고 달려나가는 우형의 모습을 엄마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묵묵히 신문을 돌리던 우형은 훗날 원자력 박사가 돼 미국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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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최초의 여기자이자 6·25전쟁을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인 장덕조(오른쪽)와 3녀 박영애의 단란했던 모습. <딸 박영애씨 제공> |
불 같은 성정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장덕조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정열적이고 기개가 있는 여성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존심을 팔지 않았다. 후배 문인에게 술도 잘 샀다. 대구 중앙통의 상록다방에서 '여자삼대' 출판기념회가 열렸을 때였다. 많은 축하객 앞에서 소설집을 출간해 준 영웅출판사 한병용 사장이 사정이 어려웠던 피란 문인과 장덕조를 동정하는 발언을 한 게 화근이었다. 장덕조는 벌떡 일어나 상을 뒤엎으며 "굶어 죽을지언정 동정 따위는 필요없다"고 일갈했다.
가난하고, 팍팍했지만 영남일보 기자 시절은 장덕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했다. 장덕조는 훗날 한 회고록에서 "나는 영남일보 시절을 한평생 잊을 수 없다. 그 좋은 인심, 그 같은 세상이 다시 이 지상에 구현될 날이 있을까"라며 솟구치는 그리움을 고백했다.
이처럼 치열한 기자정신으로 영남일보 지면을 빛냈던 장덕조는 전쟁이 끝나면서 대구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다른 여성 작가보다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2003년 타계한 그녀는 생전에 200여 편의 장·단편소설, 수필, 라디오 극본 등을 남겼다. 그리고 14권에 이르는 장편 역사소설 '고려왕조 5백년'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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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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