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선 심심책방 대표
몇 년 전 대학의 관계자와 '장례지도학과' 개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학과 개설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자문하는 자격으로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평소에 자주 듣지만 늘 적응이 안 되는 말을 또 들었다. 그 대학의 고위직에 있는 분이 그런 "혐오학과"는 안 된다고 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내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을 접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장례업체와 종사자들의 횡포를 많이 보면서 본격적으로 죽음과 장례에 관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고인의 존엄을 지켜주지 못하고 유족들에게 경제적 피해와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내가 그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내 결심을 이야기하면 다들 깜짝 놀라서 만류를 했는데 딱 한분만 내 생각을 지지했었다. "네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우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좋겠다. 너는 그 일을 참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격려해주던 선배가 있었다. 당시 그분은 십년 가까이 노모를 간병하고 계셨다. 여러 해 뒤에 어머님의 장례가 고인의 존엄을 지켜드리고 유족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의례가 되도록 조금 도왔던 기억이 있다. 나를 응원했던 단 한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해드린 것 같아서 공부한 보람을 느꼈었다.
죽음은 대체로 공포와 혐오, 회피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드러내고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죽음과 관련된 각종 사회적 약속(법, 제도, 규범)들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당히 느슨하다. 시민의 의식과 사회의 변화 속도보다 한참 느리다. 생애 말기의 돌봄에 관한 법과 제도가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를 많이 본다. 이렇게 죽음을 혐오하거나 외면하면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굴절된다. 죽음은 선정적인 소재도 혐오스러운 주제도 아니다.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는 화두다. 힘들더라도 직면해야 한다.
어느새 발밑에 성큼 가을이 당도했다. 죽음도 그러하다. "우리에게 내일이 먼저 올지 죽음이 먼저 올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인디언의 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 속으로 성큼 다가온다. 때로는 봄 처녀처럼 조붓한 오솔길로 살금살금 다가오고 때로는 마왕처럼 난폭하게 덮친다. 철학자 김진영의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 또한 나의 하류에 도착했다. 급류를 만난 듯 너무 갑자기어서 놀랍지만 생각하면 어차피 도달할 곳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의 하류는 밤비 지나간 아침처럼 고요하고 무사하다"
이 찬란한 가을에 잠시 우리의 하류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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