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장사학교 설립 교육구국 시작
영동학교 등서 한글·민족정신 가르쳐
대제학교 권태원, 영해 3·18운동 주도
1921년 영덕청년회, 야학·학원 운영
삼사동청년회 역시 독립정신 북돋아
日 폐지 명령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
주학 15곳, 야학 40곳 교육열기 확산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은 일본은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이때부터 무너지는 국권을 지키려는 노력과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50년 넘게 이어졌다.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선 의병들의 항쟁이 있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하기도 했다. 먼 만주 땅에서 군인을 길러 전쟁을 통해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일무장투쟁도 있었다.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인물을 직접 응징하고자 했던 의열투쟁이 있었고, 국제정세를 활용한 외교적 노력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더욱 폭넓게는 국민 모두의 실력과 힘을 길러 강한 나라의 기초를 닦자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흐름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해 민족독립을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교육구국운동이었고 애국 계몽가들은 이를 국권회복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송천정사는 안동권씨 문중이 영동학교를 세워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친 교육구국운동의 장소다. 이곳에서 수학한 인재들은 1919년 영해 3·18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주역으로 활약했다.
◆교육구국운동
교육구국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애국계몽단체들의 활동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교육단체 설립, 학회 조직, 민족 교과서 편찬, 기관지와 강습회, 강연회 등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한편 민족의 자각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민족교육열의 고조는 전국에 사립학교의 설립을 확산시켰으며 지방 유지들이 사재를 들여 학교를 설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립학교의 교육은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국권회복의 의지를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영덕지역의 교육구국운동 역시 사립학교 설립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 출발점은 1908년 장사교회에서 설립한 장사학교라 할 수 있다. 장사학교는 지역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신학문 등을 가르치며 민족 교육을 펼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1909년 축산면의 위산학교, 1909년 병곡면의 영동학교, 1910년 영해면의 협창학교, 영덕읍의 영신학교, 지품면 낙평리의 일신의숙 등이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영덕 지역에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영덕군 병곡면 송천정사는 영동학교에서 대제학교로 이어지며 수준 높은 근대 교육으로 국권 회복의 의지를 다졌던 곳이다.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배운 청년들은 훗날 일제에 맞서 영덕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영덕군 병곡면 송천정사의 편액. 영동학교는 병곡면 송천동 송천정사에서 설립된 안동권씨의 문중학교였다.
이 가운데 영동학교는 병곡면 송천동 송천정사에서 설립된 안동권씨의 문중학교였다. 당시 기사에 '경북 영해군에 사는 권순모씨가 자기 중종과 협의하고 영동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측량과를 먼저 가르치고 심상고등과를 또 교수하기로 교섭하는 중이라 하더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영동학교는 당시 사립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실시하였던 소학교 정도의 수준을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영동학교는 1910년에 대제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영덕지역 교육구국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 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1919년 3월 18일 영해와 병곡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이끌게 되는데 그들 중 주요 인물이 구세군 참위 권태원이다. 그는 대제학교 측량과를 졸업하고 경성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지품면 낙평리 일신의숙 교사, 해주 구세군영 사관을 지냈다. 영해 3·18만세운동을 주도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에도 아이들에게 민족정신과 학문을 가르쳐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사립학교가 전국에 설립되어 민족교육을 강조하면서 국권회복의식을 높여나가자 일제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규제에 나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무단통치기에는 더욱 폭력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교육구국운동을 통해 설립된 교육기관은 1908년 '사립학교령',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8년 '서당규칙' 등과 같은 교육 법령을 통해 공립학교로 전환되거나 폐교되었다.
영덕 지역 내 대다수 학교도 같은 운명이었다. 협창학교는 1910년 영해공립보통학교로, 영신학교는 1911년 영덕공립보통학교로 전환되었으며 대제학교는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교육구국운동은 국권피탈 이후 민족항일기의 독립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어 민족사에 하나의 뚜렷한 정신적 좌표를 정립시켰으며 근대 정신사의 실질적인 주맥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흥교당(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흥교당은 일성재의 다른 이름이다. 동명학원은 축산면 도곡리 일성재에서 설립된 학원이다. 지방유지와 지방 인사들이 협찬하여 육영사업의 하나로 동명학원을 설립하였으며 당시의 교사로는 박순종과 박동진이 있었다.
◆청년운동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사에서 거대한 분수령을 이루는 전 민족적 항일투쟁이었다. 민중은 3·1운동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확인하였고 주도세력으로 활동한 청년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비조직적이고 일시적인 운동의 한계를 통감하였고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청년단체를 조직해 나갔다. 1920년대 청년단체들이 특히 주력을 기울인 분야는 교육활동이었다.
영덕지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청년단체는 영덕청년회였다. 이후 남정, 강구, 영해, 오보, 경정청년회 등 면이나 동 단위의 청년단체가 각각 결성되었다. 이들 대다수는 사설학교를 설립하거나 야학을 운영하였는데 청년 단체가 결성되지 못한 곳에서는 지역 유지가 야학을 설립하였다. 영덕청년회는 1921년 2월 20일 결성, 8월부터 일성야학을 개설하고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교사로는 회원이었던 조만술, 강문치, 김규일, 유원술, 남진달 등이 활동하였다. 1922년 4월부터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동을 위해 융덕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0월에는 여학생을 위한 야학을 열었다.
영덕청년회는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중학기성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단기간에 모인 기성회원이 5천여 명에 이르렀다. 기성 회원들은 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0년간 아침, 저녁 두 차례 식사 가운데 쌀 한 숟가락씩 저축하여 학교 설립에 보태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당시의 재정적 어려움과 맹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눈물겨운 장면이다.
동명학원은 일성재에 설립된 지역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민족주의 사상고취와 독립정신을 앙양시켜 주는 정신교육장이었다. 학생 수가 무려 수천 명에 달하였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졸업생 중에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 및 사회의 지도자로 앞장섰다고 한다.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흥교당(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흥교당은 일성재의 다른 이름이다.
삼사동청년회는 1923년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아동과 지역민의 문맹 퇴치, 근대 지식 보급에 힘썼다. 병곡면에서는 지방 유지와 청년들의 노력으로 송천야학이 설립되었다. 광덕학원은 지품면 송천2리에 설립되었던 학원으로 구세군 참위 권태원이 교사로 활동한 학원이다. 경신학원은 당시 지품면장이었던 김정헌의 주도하에 지품면사무소 내에 설치되었다. 김정헌은 광덕학원의 운영에도 관여하는 등 지역 후진들의 교육에 앞장섰다. 동명학원은 축산면 도곡리 일성재에서 설립된 학원이다. 지방유지와 지방 인사들이 협찬하여 육영사업의 하나로 동명학원을 설립하였으며 당시의 교사로는 박순종과 박동진이 있었다.
영덕 흥교당 내에 걸린 일성재 편액.
당시 이 지역에는 보통학교조차 없었으며 각 동리마다 있었던 서당마저 폐쇄되어 농촌 청소년들의 교육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따라서 동명학원의 설립은 이 지역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사상고취와 독립정신을 앙양시켜 주는 정신교육장이 되었다. 학생 수가 무려 수천 명에 달하였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고 졸업생 중에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 및 사회의 지도자로 앞장섰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강구의 영명학원, 달산면 대지동의 일신의숙, 영해의 태화학원과 홍양학원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덕지역에는 주학기관이 15개, 야학기관이 40여 개에 이르렀으며 학생은 3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청년들은 야학과 학원을 운영하며 교육활동을 펼치는 한편 각종 강연회를 열어 청년들과 영덕군민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이에 일제는 갖은 명목으로 교육기관의 인가를 취소하거나 강제로 야학과 학원을 폐쇄시켰는데, 1928년 5월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덕지역 6개 학원과 40여 개의 야학이 폐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청년들은 다시 야학과 학원의 문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청년 간부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야학 교재가 압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독립의 날까지, 민족의 수난과 일제의 침략과정에 끝없는 저항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은 대부분 이들 학교에서 길러졌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