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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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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세계 홀리는 'K-라면' (2) 중국서 밀가루 늘여 만든 납면, 일본 인스턴트 라멘 거쳐 한국의 라면으로
도약기중일전쟁 비상식량이던 납면日사업가 치킨라멘으로 개발삼양식품이 제조기술 배워와1963년 한국 최초 라면 선보여황금기1980년대 신라면·너구리 등장사발면·짜파게티 출시 다양화전성기유튜브 '매운맛 챌린지' 열풍한류 타고 수출 효자품목 등극 ◆中→日→韓…삼양의 '치킨라면'이 시초라면은 중국의 '납면'(拉麵· 라미엔)이 일본으로 전해져 라멘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라면이 됐다. 납면은 '끌어당겨 만든 면'이라는 뜻이다. 1930년대 중일전쟁 당시 중국 북방에서 손으로 밀가루 반죽을 잡아 늘여 만든 납면이 중국군의 비상 식량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레 일본으로 전파됐다.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인 안도모모후쿠가 1958년 미군이 구호품으로 지급한 밀가루를 활용해 개발한 '치킨라멘'이 오늘날 인스턴트 라면의 시작이다.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생산된 것은 1963년 9월15일이다.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삼양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초 전중윤 회장은 남대문 시장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패전 후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봤고, 일본에서 라면을 시식한 경험이 있던 그는 라면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5만달러를 정부로부터 빌려 일본 묘조식품의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했다. 당시 라면 가격은 100g에 10원이었는데, 커피 한 잔이 35원, 김치찌개가 3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저렴했다. 그러나 밥과 국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은 초기에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1965년 나온 정부의 혼분식(混粉食) 장려 정책은 '가뭄 속 단비'였다. 이 정책은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를 줄이고 혼식과 분식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이때부터 라면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음식으로 다가왔고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식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해 롯데공업(현 농심)에서도 롯데라면을 생산했다. 1966년 연 240만개 팔리던 라면은 1969년 1500만개로 늘어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베트남전 파병 장병들의 보급품으로 납품되기도 했다. 삼양식품은 1963년 총 42명의 종업원만이 몸담고 있었지만, 약 10년 후인 1970년 중반엔 무려 5천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거대 제조사로 성장했다.◆황금기 도약…신라면·짜파게티의 등장1970년대가 라면의 도약기였다면 1980년대는 황금기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찾는 상품 다수가 이때 나왔기 때문이다. 절대빈곤 해소를 위한 기업인들의 의지, 급속한 경제발전 등으로 라면 수요 증가에 탄력이 더해지면서 제조사들은 새로운 상품을 계속 출시하며 제품의 다종화에 주력했다. 삼양라면은 1980년대 초반에만 '뽀빠이면' '귀빈면' '떡라면' '라면1번지' 등을 선보였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의 '라면의 기원과 국내 보급의 역사'에 따르면, 이에 대항하는 농심은 기념비적인 제품을 출시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981년에 시판되기 시작한 '사발면'으로, 이는 용기를 개봉한 이후 물을 넣어 즉석라면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조된 제품이다. 이어 1982년에는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 1983년엔 '안성탕면', 1984년엔 '짜파게티', 1986년엔 '신라면'을 출시했다. 특히 신라면은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을 받는 제품으로 2020년 국내 라면시장 전체 매출의 15.97% 규모로 1위다.스포츠는 한국인의 라면 사랑에 더욱 불을 붙였다. 1984년 LA올림픽 1호 금메달리스트 레슬링의 김원기는 "조금이라도 양을 늘리려고 일부러 라면을 불려서 먹었다"라고 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 사상 최초의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회자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관중석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도 세계에 중계되며 한국 컵라면이 널리 알려졌다. 한국형 컵라면은 1972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봉지라면보다 두 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는 부진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 이후 컵라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한류 열풍…미디어 통해 세계 각지로 쏙쏙21세기 들어 세계화가 본격화된 가운데 한국의 라면은 'K-푸드'가 되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난 12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우리나라 농식품 수출액은 22억달러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라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30.1% 증가해 2억740만달러로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농심의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경우 2021년 처음으로 해외 매출(5천억원)이 국내 매출(4천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신라면 국내 매출은 5천억원(41%), 해외 매출은 7천100억원(59%)에 달한다.수출의 일등공신은 K-콘텐츠다. 전 세계 사람들이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 등의 OTT를 통해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접하면서 라면의 인기도 뜨거워졌다. K-라면은 단순히 제품만 알려지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레시피와 재미있게 먹는 법까지 더해져 널리 퍼졌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원 안〉는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라면에 채끝살 등을 얹은 요리인데, 인스턴트 라면도 고급 음식의 식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이를 통해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K-라면 레시피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에는 '라면땅'(끓이지 않은 라면 면을 양념 스프에 묻힌 것)을 먹는 장면이 등장해 라면 과자에 대한 외국인들의 궁금증도 유발했다. '먹거리 경험 소비' 문화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SNS, 유튜브 등에서 매운 음식 먹기에 도전하는 소위 '매운맛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매운 라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삼양식품이 2012년 출시한 불닭볶음면은 국내외 매운 라면 열풍을 선풍적으로 일으킨 상품인데, 신라면보다 매워 매운 음식에 익숙한 한국인이 먹어도 땀을 흘릴 맛이다. 구독자 59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는 영국인 유튜버다. 2014년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 반응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는데, 외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불닭볶음면에 대한 궁금증, 시식 후기 등이 줄이었다. 이후 '불닭볶음면 먹기 챌린지'도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불닭볶음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출시 해인 2012년 1억원이 되지 않던 불닭브랜드 수출액은 꾸준히 상승해 지난해 6천800억원을 달성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올해도 해외법인을 중심으로 현지 영업마케팅을 강화하며 해외사업 성장세를 이어갈 계획"이라며 "수출 시장 다변화와 소스, 냉동식품 등으로의 수출 품목 확대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삼양식품 초기 광고. 창업주인 전중윤 회장은 국내 식량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생각해 라면을 출시했다. 지난 12일 서울 성동구 플랜트란스에서 농심 짜파게티 출시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짜파게티 분식점' 팝업스토어에서 라면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스위스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컵라면을 구입한 관광객들. 591만 유튜버 '영국남자'가 2014년 올린 '런던의 불닭볶음면 도전' 영상.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세계 홀리는 'K-라면' (1)'꿀꿀이죽' 충격이 만든 라면, 이젠 전세계 홀리는 K-푸드
지난해 12월, BGF리테일은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KT&G 상상마당에 라면을 직접 제조해 먹을 수 있는 CU 편의점을 열었다. 일명 '라면 라이브러리'로 불리는 이곳은 외국 관광객을 포함해 2030세대가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유럽의 지붕, 만년설이 쌓인 스위스 융프라우산 정상에서 자주 보이는 라면이 있다. 농심 '신라면'의 컵라면이다. 한국인은 익숙한 냄새에, 외국인들은 매콤한 맛에 끌려 현지 매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신라면 컵라면은 이제 융프라우 관광객에게 필수 먹거리가 됐다.구독자 59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콘텐츠를 다루는 영국인 유튜버다. 2014년 삼양의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의 반응을 편집한 영상을 올렸는데, 외국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 1천125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한국인에게 간식이면서 주식 같은 음식. 라면의 매력은 대단하다. 간편하고 싼데 맛까지 있다. 그래서 꾸준한 사랑을 받는 음식 중 하나다. 2022년 한국인의 연간 평균 라면 소비량은 77개라고 한다. 한 달에 평균 6개는 먹는 셈이다.한때 라면은 몸에 나쁜 음식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들의 수요 증가로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져 나쁜 이미지로만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좋은 재료와 영양소를 강조하는 제품도 출시되고 있다. 비건 라면인 애터미의 '감자라면'이 그 예다. 매운 음식 열풍으로 맵다고 유명한 삼양의 불닭볶음면에서 더 매워진 '핵불닭볶음면'도 나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출시 초기엔 '이걸 누가 먹나' 하는 소비자들의 궁금증이 있었지만, 이제는 '매운맛 덕후'면 너도나도 한 번씩 도전하고 있다.이런 라면은 중국에서 일본,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한국에선 1963년 삼양식품이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치킨라면'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기존에 라면은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소비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하지만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K-푸드인 라면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K-라면은 미국, 유럽, 중동, 남미 등 여러 지역 편의점, 슈퍼마켓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1분기 우리나라 농식품 수출액은 22억달러를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는데, 라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라면 수출액은 작년 동기보다 30.1% 증가해 2억740만달러로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농심의 대표 제품인 신라면의 경우 2021년 처음으로 해외 매출(5천억원)이 국내 매출(4천3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기준 신라면 국내 매출은 5천억원(41%), 해외 매출은 7천100억원(59%)에 달한다.국내 식품기업들의 '라면 경쟁'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 각지를 사로잡기 위해서다. K-라면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을 방증한다. 이에 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K-라면이 이토록 성장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주역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라면을 먹으면서 읽으면 재미는 배가 될 듯하다.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최은지기자
[사람의 서재] 서머싯 몸
소설가로 더 유명하지만 극작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많은 명작을 남기고 간 작가가 있다. 인생관을 강하고 명석한 문체로 묘사하고,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풍자 희극을 써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서머싯 몸이다.몸은 1874년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고문변호사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자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숙부 밑에서 자랐다. 한동안 독일에 유학한 뒤 런던의 한 의대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1897년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했다. 1897년 의대를 졸업하고는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해 소설, 희곡을 계속 썼다. 1907~1908년 그의 희곡 4편이 런던 4곳의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되면서 이름을 떨쳤다.한국에서도 많이 읽히는 '인간의 굴레'는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성한 장편소설이다. 몸이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이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후 1919년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모티프를 따온 소설 '달과 6펜스'〈사진〉를 펴내면서 호평을 받고 작가로서 지위를 확립했다.그는 91세라는 나이까지 장수해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소설은 '케이크와 맥주'(1930), '면도날'(1944), 희곡은 '순환'(1921 초연), '높은 사람들'(1923), '서밍업'(1938)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네이버 지식백과 제공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2) "까칠하고 강인한 모습 선인장, 나와 비슷해 자주 그리죠"
"사실 제 그림은 한풀이 같은 거예요. 갑자기 제게 닥친 불행이 제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으니까요.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세상은 봄꽃으로 환한데 마음은 우울하다. 대구 대명동 한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이환상(47)씨를 만났다. 손목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 힘겹게 휠체어를 끌고 면회실로 왔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장기 입원 환자다.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이씨는 계명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술을 가까이하며 살았다. 개인전도 열고, 대학 졸업 후에는 달서구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도란도란 어울려 지냈다. 그런 건강한 청년에게 2018년 불행의 그림자가 덮쳤다. 누나들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착한 막내아들에게 세계는 야속했다. 어느 날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일어서는데, 방 안에 있던 서랍장 손잡이에 몸이 부딪히면서 목뼈가 부러졌다. 수술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스스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그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는 5년째 병상에 누워 있다."원래 오른손잡이인데…왼쪽 팔로 그리고 있죠."감금 아닌 감금 생활은 그를 무료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병상 생활 중 한 번도 그린 적 없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라도 그려야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나에게 갤럭시탭을 사달라 부탁해 하나씩 그렸다.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지만, 왼쪽 어깨와 팔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어 손등에 펜을 고정해 그리고 있다. 원래 그는 오른손잡이다. 불편한 팔을 움직이다 보니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8시간을 꼬박 그려야 한 개를 완성할 수 있다.그가 들고 온 갤럭시탭으로 이씨의 그림을 함께 봤다. 폴더에는 벌써 300개가 넘는 작품들이 있었다. 한(恨)과 동시에 삶에 대한 집념이 느껴졌다. 소재도 가족의 얼굴, 자화상, 가수, 사물, 풍경화 등 다양하다. 재미있게 본 방송 프로그램, 자주 듣는 음악 등이 모티프가 되기도 한다. 그는 '싱어게인'을 즐겨 보는데, 방송을 보면서 '안개'라는 노래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원곡 가수인 정훈희를 그린 적이 있다. 이씨는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리는데, 많게는 하루에 5개가 올라올 때도 있다. 이제 그의 일상은 다시 그림 그리기가 된 것이다.송두리째 바뀐 일상서양화 전공한 후 개인전도서랍장 부딪혀 목뼈 부러져수술 받았지만 5년째 병상다시 화업이 생활로거동 가능한 왼팔에 펜 고정 태블릿 피시 사용 그림 그려그림으로 찾은 자유떠나고 싶어서… 욕하려고…기존 화풍 벗어나 소재 선택누나 "작은 전시 열어주고파""예전에 개인전을 준비할 때는 일관된 스타일, 화풍(畵風)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 그게 조금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있어요. 몸은 자유롭지 못 하지만 머리는 자유로워진 거죠."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유난히 선인장 그림이 많아 이유를 물어보니 선인장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제가 좀 까칠해요.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을 쓰죠. 선인장도 마찬가지잖아요. 가시만 있을 뿐이지, 사막에서도 오래 버티고 살아가니까. 그 모습이 제 모습 같아요." 신발, 발가락, 캐리어, 자동차 등도 자주 등장한다. 그는 무의식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발과 발가락은 움직일 수 없는 하반신에 대한 답답함, 캐리어와 자동차는 어디로 자유롭게 떠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제가 태국을 안 가봤거든요. 유튜브에서 여행 영상을 많이 봤는데 태국이 정말 가고 싶더라고요. 슬리퍼 신고 캐리어 몰고 태국에 가고 싶다, 이런 마음을 표현한 거죠."음식이 나오는 그림들도 있어 대뜸 물었다. "그림에 음식이 등장하는 시기가 있네요. 이 가지는 뭔가요?"그는 욕하기 위해 그린 거라고 답했다. 설마 '가지가지' 한다는 뜻이냐며 다시 물으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조금 짜증 나는 일이 있었는데, 속으로 저 사람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며 그린 거〈원 안〉예요. 그래서 가지도 두 개죠." 그림을 하나씩 설명해주는 그의 눈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본인만의 철학이 보였다. "정말 단순하죠. 그림 그리고, 예술 한다고 해서 특별한 게 없어요. 억지로 특별하게 그리려 하다 보면 스트레스 받고 어렵기만 하죠. 가장 일상적인 게 특별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면회 시간이 끝나가 이씨의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씨는 "아직은 다른 계획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몸은 움직일 순 없지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데 작은 희망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이씨의 누나 이정임씨는 "동생만 생각하면 늘 안타까워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지지만 늘 마음이 아프죠. 지난해 갤럭시탭을 구입해 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불편한 몸으로 누워서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동생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기회가 되면 작은 전시회라도 열어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그림. 선인장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의 신발 그림. 무의식 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이환상 작가가 노래 '안개'를 듣고 감명 받아 그린 원곡 가수 정훈희.
[위클리 키워드] 성인 10명 중 3명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 가장 고려"
사교육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위기 속에 학군, 학원가 등과 인접한 소위 '학세권' 단지에 대한 선호 현상이 높아지고 있다. 성인 10명 중 3명은 내 집 마련 시 '교육환경'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부동산R114는 지난달 21∼31일 전국 성인남녀 5천4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내 집 마련에 대한 수요자 인식' 설문조사 결과를 지난 8일 밝혔다. 그 결과 거주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지 요건으로 응답자의 29.7%가 '교육환경'을 꼽았다. 이어 교통(25.1%), 주거 쾌적성(21.2%), 편의시설(15.2%) 순으로 나타났다.아파트를 구입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는 40.6%가 브랜드를 꼽았다. 상위권 브랜드 아파트가 품질, 설계, 안전성 등의 측면에서 하위권 브랜드 아파트보다 신뢰도가 높고 향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뒤로는 조경 및 커뮤니티 시설(20.8%), 단지 규모(19.9%), 실내 평면 구조(18.0%) 순으로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그래픽=최은지기자
[동 추 거문고 이야기] 〈7〉줄 없는 거문고(상) 전원시인 도연명 '줄 없는 거문고' 뜯으며 마음의 소리 읊다
거문고(琴)는 도연명에서 유래한 '줄 없는 거문고', 즉 무현금(無絃琴)의 정신이 부각되면서 선비들로부터 더욱더 사랑을 받게 되었다. 관리 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의 생애를 초야에 묻혀 절개를 지키며 전원시인으로 살았던 도연명(365~427)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선비 시인이다. 도연명은 거문고를 사랑하고 연주하기도 했는데, 무현금도 곁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거래사'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남긴 도연명에 대해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은 '시품(詩品)'에서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했다.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었다.대표작 '귀거래사' 남긴 中 대문호관직 내려놓고 전원에 묻혀 낭만 즐겨이백 등 후대 시인 그의 문장 추종'무현금' 바람직한 선비 표상으로◆도연명과 무현금이런 도연명의 삶을 기록한 양(梁)나라 소통(蕭統·501~531)의 '도연명전'은 '도연명은 음률을 몰랐지만, 줄 없는 거문고를 늘 곁에 두고 술이 적당하게 되면 금(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마음을 기탁하곤 했다(淵明不解音律, 而畜無絃琴一張, 每酒適, 輒撫弄以寄其意)'라고 적고 있다.그리고 소통은 도연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인격과 문학을 높게 평가했다. '연명의 문장은 일반 수준을 뛰어넘어 정채롭다. 적절하게 그리는 듯 현실을 비판하고 참된 경지에서 회포를 풀며, 아울러 굳은 정절로써 도에 안주하고 절개를 지켰으며, 스스로 농사짓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재산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다.'이보다 앞서 도연명 사후 60년 정도 지나서 심약(沈約)이 지은 '송서(宋書)' 중 '은일열전(隱逸列傳)'에서도 도연명의 무현금에 대해 거의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도연명은 그의 작품이나 기록을 보면, 거문고를 전혀 연주할 줄 몰랐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연명의 고고한 삶을 표현하면서 이와 같이 표현한 후 무현금의 세계는 바람직한 선비를 표상하는 경지를 상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돌아가리라. 교제를 그만두고 어울림을 끊어야겠다. 세상이 나와는 서로 어긋나니, 다시 수레를 메고 나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친척들과의 정다운 대화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잊으리라.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리면, 장차 서쪽 밭에서 농사일을 해야겠다. 혹은 천을 두른 수레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숙하게 물고랑을 찾아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길의 언덕을 지난다.'그리고 51세에 자식들을 위해 쓴 글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는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뜨기도 했단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거문고 연주를 배워 연주할 줄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며 즐기는 것보다는 그 너머의 세계에 더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도연명은 줄 없는 거문고를 지니고 수시로 거기에 마음을 실어 달래면서, 스스로도 '다만 거문고가 지닌 아취를 알면 그뿐이지, 어찌 수고롭게 줄을 튕겨 소리를 낼 것인가(但識琴中趣 何勞絃上聲)'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거문고를 곁에 두고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그 소리를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며 깨달음을 얻는 데 있었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은 도연명을 사모하는 친구를 위해 지어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한(漢)나라 제갈후(諸葛侯)가 은거할 때에는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을 불고 칠현금(七絃琴)을 연주하며 평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다가, 고기가 물을 만나듯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나자 우뚝이 삼분천하(三分天下) 하는 공업을 이루었다. ~ 저 도연명 또한 제갈량을 사모한 자였기에 깊이 좋아하는 뜻을 자신의 이름에 드러내고서 마침내 무현금(無絃琴)을 두고 그에 회포를 부쳤으니, 아마도 제갈량과 같은 체(體)를 가지고 있었으나 쓰임이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 그대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도연명이 제갈량을 좋아했던 이유이니, 이것으로 충분히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벗은 힘쓸지어다.'◆'무현금'에 대한 중국인들의 찬사도연명 별세 후 많은 이들이 그의 무현금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중 먼저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0)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栗陽)'이다.'도연명은 날마다 취해서/ 다섯 그루 버드나무에 봄이 온 줄 모르네/ 꾸미지 않은 거문고엔 본래 줄이 없고/ 술을 거를 때는 칡베 두건을 쓰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쪽 창문 아래에서/ 스스로 복희 황제 때의 사람이라 말하네/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 가까이 했던 벗을 한번 만나 볼는지' 도령(陶令)은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 벼슬을 지냈다 하여 칭한 말이다. 오류(五柳)는 도연명이 자신의 집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컬었던 데서 유래한다.그리고 도연명은 여름철 한가로울 때에 북쪽 창 아래에 눕고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스스로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희황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이자 상고 시대의 제왕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중국인들은 복희씨가 살던 상고 시대야말로 이상적인 정치가 행해지던 때라 믿어서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율리(栗里)는 도연명이 살던 마을로, 여기서는 시인의 친구가 현령으로 있는 율양을 이야기한다. 백거이(772~846)는 '구중유일사(丘中有一士)'라는 시를 남겼다. '산 속에 사는 한 선비(丘中有一士)/ 도를 지키며 오랜 세월 보냈네(守道歲月深)/ 걸을 때는 새끼로 맨 옷을 입고(行披帶索衣)/ 앉아서는 줄 없는 거문고 타네(坐拍無絃琴)/ 흐린 샘물은 마시지 않고(不飮濁泉水)/ 굽은 나무 그늘에는 쉬지를 않네(不息曲木陰)/ 티끌만큼이라도 의에 맞지 않으며(所逢苟非義)/ 천 냥의 황금도 흙보다 못하게 여기네(糞土千黃金)/ 마을 사람들 그 기풍 따르니(鄕人化其風)/ 난초 숲에 있는 듯 향기가 나네(薰如蘭在林)/ 지혜롭든 어리석든 강하든 약하든(智愚與强弱)/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일 없었네(不忍相欺侵)/ 그 선비 찾아가 보고 싶어(我欲訪其人)/ 만나러 가려 하다 다시 생각하네(將行復沈吟)/ 그 얼굴 꼭 봐야만 하겠는가(何必見其面)/ 그 마음 제대로 배우면 될 일이지(但在學其心)'이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도연명 이후 많은 중국 선비들이 그의 무현금의 정신세계를 인용하는 가운데, 도연명의 삶을 사랑하며 이상적인 선비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선비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그래픽=장수현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신 마비 화가 이환상씨 (1) "손등으로 그린 그림, 내게 다시 자유 주네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눈다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이 중 무엇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모두 우리의 일부다. 이 감정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항상 함께한다.하지만 야속하게도 기쁨보단 슬픔이, 즐거움보단 노여움의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 법이다.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진다. 때론 그 슬픔과 고통,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말도 위로가 안 되는 일을 겪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결코 간결하고 명쾌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이처럼 우리는 누구나 한 번씩은 겪어본 감정, 슬픔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또한 슬픔이다. 왜일까. 자신의 슬픔에는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는 그토록 무심하기 때문이다.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잘 우는 우리가, 소설 속 비극의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떠올리면서 복수를 기획하기도 하는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는 무감각하다. 자신 말고 다른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사실이지만 인간이 그렇다.그래서 우리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슬픔에 대한 공부다.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라고 썼다.그러면서 말한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고.최근 재활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한 작가를 만났다. 그는 어깨 아래 전신이 마비된 채 5년째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만나기 전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괜한 질문으로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아닐지, 내 시선이 과하게 동정 어린 시선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중에도 상처를 다시 쑤시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그림에 신발과 발이 자주 등장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봤다가 금방 후회했다. 조금만 생각했다면 답을 알 수 있었을 텐데.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슬픔을 공부한다. 이 공부는 어렵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한평생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우리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도 하니까.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이야기를 전한다. 봄이 왔는데 병원에 있는 그의 세상이 너무 외롭고 차갑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 나의 죄를 벌하며 그의 건강도 속히 회복되길 바라본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천윤자 시민기자 kscyj83@hanmail.net이환상 작가의 자화상. 침대에 앉아 손등에 펜을 고정시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환상 작가의 갤럭시탭 그림 폴더. 300개가 넘는 그림이 들어 있다. 천윤자 시민기자
[사람의 서재] 프랑수아즈 사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극한의 자유 즐겼던 문학계 거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김영하의 소설 제목으로도 인용된 이 문장은 프랑스 여성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복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한 말이다. 오늘날까지 회자될 만큼 파격적인 발언인데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사강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다운 말이다.사강은 1935년 남프랑스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에 진학했지만 첫 시험에서 낙제했다.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위스키와 재즈를 즐기다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요트 사고를 당해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6주 만에 소설 '슬픔이여 안녕'〈사진〉을 쓰고 출간하는데, 18세의 나이였다. 남녀 간의 심리 전개를 세심한 관찰력을 통해 단단한 문체로 묘사해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해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문단 데뷔와 함께 '사강 신드롬'을 쏘아 올린 것.1957년에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 "사강, 교통사고로 즉사하다"라는 뉴스가 전 세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소생해 3개월간의 병상 생활에서 삶과 죽음,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하게 된다.23세 때 20세 연상의 남성과 결혼하지만 2년 만에 헤어졌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7세에 한때 패션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젊은 미국인과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시 이혼했다.이후 사강은 신경 쇠약, 정신병원 입원, 폭음과 마약, 도박에 탐닉했다. 도박으로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된 그녀는 '도박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적인 정열'이라고 하며 '돈이란 본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다.1995년에는 두 번씩이나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됐다. 이때 한 말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다.2002년엔 탈세범으로 기소돼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옹플레르에서 노년을 보내던 사강은 심장과 폐 질환으로 수년간 투병하다 2004년 숨을 거뒀다.대표 작품으로는 '슬픔이여 안녕'을 비롯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패배의 신호', 희곡은 '스웨덴의 성(城)' 등이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시집 '마카다' 펴낸 김계희씨(2)음식하다 깃든 사색, 詩로 풀어…"마카다 잘 사는 세상 만들고 싶어서예"
"중학교 졸업 이후 글을 따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신 젊을 때부터 편지 쓰기를 좋아했어요.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편지를 참 많이 썼습니다."40년간 공사현장 식당(일본어 '함바')에서 일한 할머니가 첫 시집을 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계희씨는 칠순을 맞아 지난달 23일 시집 '마카다'를 출판했는데, 1970년대 중학교 졸업 이후 시(詩)는 물론 글공부도 특별히 한 적이 없다. 그런 김씨가 시를 쓰게 된 건 글쓰기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젊을 적부터 가족과 지인들에게 편지를 즐겨 썼는데, 이런 습관이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도 이어졌다고 한다.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나서부터는 휴대전화에 여러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했다. 어릴 적 추억부터 최근 있었던 일, 사물과 자연을 보며 든 생각까지. 소재가 다양하다며 운을 떼니 그는 남들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라며 살갑게 웃었다. "원래 사색을 즐겨 해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는 건가…이런 생각을 특히 많이 해요. 함바집에서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음식 하나를 봐도 인생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글로 옮겼죠."김씨의 시집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건 주변인들의 칭찬으로 시작됐다. 휴대전화에 기록해둔 글들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낼 때마다 '재밌다' '울컥했다' '구수하다' 등의 답장이 이어지면서 시 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기존에 쓴 짧은 구절들을 다듬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장문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그때부터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후 언어유희 등 시적 요소를 추가해 글을 쓰면서 내 글들을 시집으로 내보자 생각했죠."김씨의 시집 '마카다'는 그의 한평생 추억이 담긴 이야기다. 총 99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집은 가족, 음식, 고향, 인생, 자화상으로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는데, 어릴 적 가족과의 추억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대다수다. 그런 만큼 1950~1970년대 살아온 사람들이 공감할 요소가 많다. 김씨는 안동 길안면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가족에 대한 시들은 궁핍한 시절 시골에서의 정겨운 생활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 등엔 언제나/ 찌든 땀 냄새/ 풀 냄새/ 볏짚 냄새'(지게) '허겁지겁 산길 내려와/ 풀숲에 주저앉아 펼쳤더니/ 고추 된장에 버무린 주먹밥 서너 덩이/ 군침이 마중물이 되어/ 게 눈 감추듯 먹었다'(나무꾼과 도시락).김씨의 에너지 넘치는 성격이 시에도 고스란히 담겨 신선하고 구수한 표현도 많다. 김씨는 매년 봄이면 고향으로 봄나물인 두릅을 따러 가는데, 몇 년 전 무리하게 채취를 시도하다 손목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일화를 추억하며 나물을 면밀히 관찰한 작품이 '두릅'이다. '독한 놈/ 몸뚱이에 가시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며/ 봄볕 따사로운 날/ 전투에 나섰다'. 대표 시이자 표제인 '마카다'는 '모두'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김씨가 대표 시를 '마카다'로 정한 이유는 타인에 대한 애정에서부터다.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상이지만 혼자 잘 사는 것보다 가족, 친구, 지인들과 어울려 모두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이 담겨 있다. 실제 김씨는 모임에 나가면 '분위기 메이커'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별명이다.김씨가 '함께'의 가치를 배우게 된 건 그의 언니로부터다. 김씨의 언니는 칠남매의 맏이로서 어릴 적부터 그의 동생들을 반듯하게 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빈자리까지 채울 만큼 넉넉함을 실천했다고 한다. '마카다'도 그런 언니에 대한 김씨의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한 시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 집은 어릴 때부터 형제들 간 우애가 남달랐는데 언니의 역할이 컸어요. 동생들과 돈독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 동생들을 잘 챙겨줬죠. 그랬던 언니가 지금 아픈 상황이에요. 옛날 일은 기억하지만 당장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요. 언니에게 이렇게 고마움이 큰데…." 그는 인터뷰 중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김씨의 향후 계획은 경상도 방언이 담긴 시집을 내는 것이다. 그는 "마카다로 시집을 내고 나서 경상도 방언으로 시집을 구성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언 중에는 재미있고 특이한 말들이 참 많은데, 지역 사람들에겐 친근하고 타지인들에겐 흥미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신춘문예에 도전할 거란 목표도 살며시 내비쳤다. 신춘문예는 일간 신문사가 문학 작품을 공개 모집해 신인 작가를 등단시키는 제도다. 김씨는 시집을 낸 후 시에 대한 흥미가 커져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욕심이 생겨 신춘문예에도 도전해보려 해요. 아직 시를 전문적으로 쓰진 못 하지만, 문학을 더 공부하고 사색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며 수줍게 웃었다. 글=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사진=B-story 제공김계희씨의 휴대전화 메모장. 메모장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모여 시집 '마카다'가 나왔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시집 '마카다' 펴낸 김계희씨(1) '함바집 40년' 할머니, 시인 됐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팍팍한 세상이다. '나만 잘살면 돼' 혹은 '나만 아니면 돼'가 통하는 시대.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간다.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은 양립이 불가능한 걸까.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데, 주인에게 순수한 사랑을 주는 강아지의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 기사를 쓰는 나 또한 무의식중 이기주의에 동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기자 생활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주로 성격이 밝고 쾌활한 이들이 그렇다.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던 중 보게 된 무지개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찬 건강한 사람. 최근 그런 사람을 만났다. 공사현장 식당(일본어 '함바')에서 일하는 할머니, 김계희씨다.올해 칠순을 맞이한 김씨는 최근 새로운 도전을 했다. 평생 함바집을 운영하며 살다 시집을 냈다. 그는 시(詩)는 물론이고 글쓰기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몇십 년을 함바집 일에 전념한 사람이 칠순의 나이에, 본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도전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김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일하는 함바집을 찾았다.공사 현장에 들어서는데 그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반겨주는데, 인사에서부터 밝음이 자연스레 묻어 나왔다. 인위적인 밝음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밥은 먹고 왔냐며, 먹고 오지 않았으면 두 그릇도 먹고 가도 된다는 친절도 건넸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가 생각날 정도로 가족만큼 따뜻한 친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밝고 따뜻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실제 그는 지인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한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바로 알 것 같았다.김씨는 타인에 대한 애정이 많다고 한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는 칠남매 중 둘째다. 1950~1970년대 시골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형제들과 돈독한 우애를 쌓았는데, 그 우애를 쌓을 수 있었던 건 첫째인 언니의 덕이 크다고 한다. 언니는 부모님의 빈 자리를 대신할 만큼 동생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한다. 김씨는 이를 통해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웠고, 늘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갖고 있다. 이번에 낸 시집에도 그런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집의 이름은 '마카다'다. '마카다'는 '모두'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인데, 그의 시에선 혼자 잘 사는 것보다 '모두'가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로 통한다.때론 전문적으로 쓰인 글보다 진정성 있는 글이 마음을 울린다. 김씨의 시들이 그렇다. 등단한 이들이 쓴 시처럼 세련되진 않지만 그래서 새롭다. 표현 하나하나에 신선함과 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소재도 그의 인생과 추억, 일상이 대다수로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공감할 만한 부분이 많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김씨를 만나고, 그의 시를 읽고 나니 내 마음도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언니에게 배웠던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이젠 내가 사랑을 베풀 차례인 듯하다.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김씨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들도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길 바라본다. 글=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사진=B-story 제공40년간 함바집을 운영하다 시집 '마카다'를 출간한 김계희씨.
[사람의 서재]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공쿠르상 2회 수상 작가, 파란만장한 '자기 앞의 생' 살다가다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은 '공쿠르 상'이다. 이 상은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 상인데,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 있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져 있는 로맹 가리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그는 작가뿐만 아니라 외교관, 영화 감독도 지냈다.로맹 가리는 191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로렌 비행 중대 대위로 참전했다. 참전 중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1945년 비평가상을 받아 명성을 떨쳤다. 1956년에는 첫 작품을 낸 지 11년 만에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받았다.외교관, 영화 감독으로도 일했다. 전쟁 중 공적을 인정받아 종전 직후 불가리아와 스위스에서 프랑스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56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총영사가 되어 할리우드를 가까이하게 된다. 1958년 '하늘의 뿌리'를 영화화한 작품 '천국의 뿌리' 각색에 참여하면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그가 공쿠르 상을 2회 수상하게 되는 건 60세가 되던 해인 1974년 '에밀 아자르'란 가명으로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이 이름으로 '그로칼랭'을 출간해 신인 작가로 큰 관심을 받고, 다음 해인 1975년 같은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작은 사진〉을 발표해 공쿠르상을 다시 한번 수상했다. 당시 그의 명성은 엄청났다고 한다.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은 그의 권총 자살로 인해 밝혀진다. 1979년 그의 전 아내인 진 세버그가 약물 투여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도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1년 후인 1980년 12월2일 66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내용의 유서가 밝혀져 전 세계 문학계에 파문이 일었다. 조현희기자〈마음산책 제공〉
[위클리 키워드] 미국 Z세대 5명 중 1명 "나는 성소수자"
자신을 성소수자(LGBTQ+)로 인식하는 미국인의 비율이 10년 전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 특히 Z세대는 5명 중 1명이 성소수자라고 응답했다.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지난해 18세 이상 미국인 1만2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지난 13일(현지시각)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이성애자, 레즈비언(L), 게이(G), 양성애자(B), 트랜스젠더(T) 중 자신을 어느 범주로 인식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6%가 하나 이상의 LGBTQ+그룹에 속한다고 답했다.자신의 정체성을 LGBTQ+로 응답한 비율은 2012년 첫 조사 때 3.5%, 2013년 3.6%였다. 10년 만에 성소수자로 응답한 비율이 2배 많아진 것이다. 2020년의 5.6%에 비해서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세대별로는 젊은 층에서 그 비율이 두드러졌다. 특히 18∼26세인 Z세대는 5명 중 1명꼴(22.3%)로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밝혔다. 밀레니얼(27∼42세) 세대는 9.8%, X세대(43∼58세)는 4.5%, 베이비붐 세대(59∼77세)는 2.3%였다.성별로 보면 여성은 자신을 성소수자로 인식한 비율이 8.5%로, 남성(4.7%)보다 2배가량 높았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동 추 거문고 이야기] <6> 선비와 거문고(하) 세상 사람 어진 이 몰라보니…오갈 데 없는 신세로다
한국의 거문고와 중국의 금(琴)은 한국과 중국 선비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악기다. '선비의 악기' '군자의 악기'로, 도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수행 반려 악기로 대접받게 된 연유를 더듬어 가보면 공자는 물론 순임금에까지 이르게 된다. 선비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중국 요순시대의 순임금과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관련된 거문고(琴) 이야기를 살펴본다.◆순임금의 남풍가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의 발탁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선정을 펼쳤고,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聖君)이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요임금의 인자함이 하늘과 같았고 지혜는 신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요임금과 더불어 순임금은 중국 역사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한 성군의 대명사가 되었다.요임금이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남다른 효제(孝悌) 정신이었다. 요임금은 그에게 두 딸을 아내로 주어 인성을 관찰하도록 했다. 순의 혼인 후에도 그 아버지와 의붓동생은 순을 죽이려는 음모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은 부모와 동생을 원망하는 대신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기를 원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그런 순의 정성에 아버지와 동생이 결국 감동했다. 이후 요임금은 그를 등용해 능력을 다시 확인한 후 쉰 살에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순의 효제 정신은 '효(孝)' 문자도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순임금의 효는 단순히 효라고 하지 않고 큰 효라는 의미의 '대효(大孝)'로 불리었다. 효는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실천 덕목이다. 맹자는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이라 여겼고, '요·순의 도리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라고 강조했다.순임금은 또한 오현금을 잘 탔으며, 평소에도 즐겼다. 그는 거문고 곡 '남풍가'를 지어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남풍가 내용은 이렇다. '훈훈한 남풍이 불어오니, 우리 백성들의 시름을 풀어줄 만하네/ 남풍이 때맞춰 불 때 우리 백성들의 재물도 넘쳐나겠구나'순임금의 이 일화는 그림으로도 종종 그려졌다. 그가 황제의 처소인 남훈전에서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로 백성의 고단함을 달랜 내용을 그린 '남훈전탄금(南薰殿彈琴)'이 우리나라에 전한다. 순임금은 작곡도 잘했는데, 그가 지은 곡인 '소소(簫韶)'를 공자가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순임금은 우(禹)임금에게 제위를 넘겨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이 말은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 부르는데, 유가(儒家)에서 금과옥조로 삼는 문구다. '윤집궐중'은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중화전(中和殿)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귀이기도 하다. 청나라 건륭제 글씨다. 화담 서경덕은 거문고에 새긴 글 '금명(琴銘)'에서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鼓之和)/ 요순시대로 돌아가며(回唐虞兮)/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滌之邪)/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天與徒兮)'라고 말했다. ◆공자의 의란조공자가 행단(杏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고슬(杏檀鼓瑟) 고사에 거문고(琴)를 타는 공자가 등장한다. 이 고사는 '장자'에 나오는 '공자가 치유(緇惟)의 숲속에 나아가 행단에 앉아 쉴 때 제자들은 독서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에 근거해 북송 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강당 옛터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복원했고, 이후 행단고슬 고사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고사는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했다.거문고와 관련된 공자의 일화로, 행단고슬 고사와 함께 의란조 이야기가 유명하다. 공자는 생애 초반 30여 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72명의 제후들을 만나 왕도정치의 이념을 설파했다. 하지만 패도정치의 무력이 지배하던 전국시대에 어느 제후도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자는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참담한 심정으로 고향인 노나라로 향하던 공자는 어느 인적 없는 빈 골짜기에서 홀로 피어 있는 난초를 만나게 된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계곡에 홀로 핀 유란(幽蘭)의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공자는 깊이 탄식했다. 잡초 속에 묻혀 홀로 무성하게 핀 난초의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공자는 외롭게 피어있는 난초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의란조'라는 시를 짓고 거문고 곡으로 만들어 노래하며 연주했다.의란조는 다음과 같다. '골바람 살랑대며 부니 날 흐리다가 비까지 내리고(習習谷風光陰以雨)/ 가던 길 다시 가려 하니 저 먼 들까지 배웅하네(之子于歸遠送于野)/ 어찌하여 푸른 하늘은 날 버리는가(何彼蒼天不得其所)/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도니 오갈 데 없는 신세로다(逍遙九州無有定處)/ 세상 사람들 어둡고 마음이 막혀 어진 이를 몰라보고(世人闇蔽不知賢者)/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이 몸만 늙어가는구나(年紀逝邁一身將老)'공자는 난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깊은 산속 지초 난초는(芝蘭生於深林)/ 보는 사람 없다하여 향을 내지 않음이 없고(不以無人而不芳)/ 도를 닦고 덕을 쌓는 군자는(君子修道立德)/ 가난하다고 지조를 버리지 않는다(不爲困窮而敗節)'공자는 29세 때 사양(師襄)에게 가서 거문고를 배웠는데, 거문고를 배우면서 열흘이 넘도록 한 곡만 연습했다. 사양이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운율을 익힐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운율을 알고 나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를 알 때까지 연습하고, 또 음악을 만든 사람됨을 알 때까지 연습했다.거문고를 수시로 연주한 공자는 제자들에게도 거문고를 가르치고, 그 소리를 통해 그 마음상태를 평하며 깨달음을 얻도록 했다. 34세 때는 주나라 대부(大夫)로 왕실의 역법(曆法)을 주관하던 장홍을 찾아가 음악을 배웠는데, 장홍은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을 보고 공자에 대해 "예를 행하고 성인의 도를 전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라며 칭찬했다.공자가 단순히 음악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禮)와 악(樂)을 좋아한다고 한 공자는 음악을 통해 예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봉규<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겸재 정선의 작품 '행단고슬'. 공자가 행단에서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고사를 소재로 한 그림인데, 여기서는 공자의 제자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순임금의 효행과 오현금 이야기를 담은 민화 '효(孝) 문자도'.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대구·경북 이색 도서관 여행 (2) 색색의 문화공간, 봄날의 도서관에서 '힐링'
◆적산가옥 '삼덕마루 작은 도서관'삼덕초 뒤편 일본식 가옥 다다미방 5개 갖춰현존하는 관사로서 가치 인정받은 문화재할머니 집에 온 편안한 느낌으로 책을 읽고 싶다면 대구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삼덕마루 작은 도서관'에 가보길 추천한다. 적산가옥이 공공도서관으로 처음 변신한 곳이다.삼덕마루 작은 도서관은 삼덕초등 뒤편 주택가에 일본식 가옥의 형태로 자리한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대구덕산공립심상소학교 교장 관사로 건축된 목조건축물로 삼덕초등의 옛 관사다. 근대 시기 대구지역에 건립된 교육 관련 시설 가운데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관사 건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광복 이후 일제 잔재 논란으로 방치됐다가 2013년 근대 교육시설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581호로 지정됐다. 이후 대구 중구가 대구시교육청으로부터 건물을 넘겨받고 주민들을 설득해 문화재 보수공사를 진행해 2017년 7월 마을커뮤니티센터 및 작은 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현재 지역민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건물에 들어서면 좁은 마루에 다다미방이 5개 딸려 있다. 일반 도서를 모아둔 책모둠방, 어린이 도서가 있는 꿈나무방,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어울림방, 유아 도서가 구비된 꼬꼬마방,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는 교구놀이방이다. 꿈나무방과 꼬꼬마방은 다락방도 갖췄다.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울림방에는 유적·명소 등 대구의 공간을 다루는 책들을 진열한 '대구와 거니는 책' 코너가 있다. 역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대구의 공간을 지역민들과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성인, 아동, 유아 도서 등 총 도서 수는 지난해 6월 기준 5천55권이다.◆국내 첫 미술전문도서관 '아트도서관'가창면에 자리한 국내 첫 '미술전문도서관'미술서적 희귀본부터 예술인 아카이빙까지대구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면 이곳을 빼놓을 수 없다.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한 국내 최초 미술전문 사립 도서관 '아트도서관'이다. 2014년 만촌동에 개관한 아트도서관은 2020년 대화재로 휴관했다 2021년 8월 가창면 녹동서원 인근에 재개관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없는 미술 서적을 다량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갤러리도 겸하고 있어 볼거리가 많다.아트도서관은 지역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AAMB'란 키워드로 A(Art Library·미술 도서관), A(Archive·아카이브), M(Museum·미술관), B(Book Cafe·북카페)의 역할을 한다. 먼저 일반 도서관에선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오래된 미술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전 작가부터 지역 작가까지 여러 예술인의 자료를 아카이빙 한다. 허두환 아트도서관 관장은 "일반 도서관에선 지역 작가와 미술에 대한 자료를 아카이빙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 점이 아쉬워 직접 서적을 찾아다니고 수집했다"고 밝혔다.지하 1층은 서고, 1층은 북카페, 2층은 도서관 겸 갤러리로 운영된다. 북카페에서는 식음료를 먹으며 미술서적을 볼 수 있다. 피자·디저트·음료 등을 판매한다. 2층에 갤러리가 있지만 1층에도 곳곳에 미술작품이 놓여 있어 눈이 심심하지 않다. 만촌동 도서관 화재현장을 재현한 소장품도 있다. 2층은 도서관 및 주노아트갤러리다. 갤러리에서는 여러 미술 작품을 전시하며 지난 10일까지는 경북조각회 초대전을 선보였다. 대구문화 창간호 등 근현대 희귀 미술자료 초판본, 가톨릭 성물 등도 진열돼 있다.하지만 지자체의 지원 부족으로 고심이 깊다. 도서관 운영 지속을 위해 민간 후원자를 찾고 있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허 관장은 "의정부미술도서관처럼 대구도 미술전문도서관을 지역 관광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시에서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며 "미래 세대에게 다양한 미술 콘텐츠를 넘겨주기 위해 내 삶보다 도서관 운영을 더 중시하며 살았다. 이런 도서관의 가치를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폐역사의 변신 '반야월역사 작은 도서관'옛 기차역 모습 간직하며 레트로 감성 '물씬''철도유물전시관'선 과거 역사 운임표 등 전시폐역사 건물이 도서관이 된 곳도 있다. 대구 동구 '반야월역사 작은 도서관'이다. 옛 기차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레트로 감성'을 느낄 수 있다.1932년 세워진 반야월 폐역사는 경부선과 중앙선을 연결하는 대구선 역사의 하나로 대구지역에 석탄을 공급하는 기능을 했다. 2004년 대구선 철도가 폐지되면서 폐역이 됐다. 이후 반야월역사가 근대등록문화재 270호로 지정되고 문화재라는 특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2011년 철도 테마가 있는 작은 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도서관에는 어린이 열람실, 일반 열람실, 철도유물전시관이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은 철도유물전시관이다. 과거 반야월역에서 사용하던 여객운임표·건널목 및 교량 안내판, 당시 찍은 건물 사진 등을 전시해둬 역사의 옛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도서관은 교육·체험 프로그램 등도 상시 진행하는데, 도서관 입구 맞은편 벽면에는 지역 어린이들이 지난해 문해력 수업에서 만든 독서신문이 붙어 있다. 건물 밖에는 반야월공원이 조성돼 있어 산책 겸 도서관에 방문하기도 좋고, 책을 빌려 야외에서 읽기도 좋다.◆꽃구경과 함께 독서 '신라 천년서고'과거 수장고 새단장해 경주 관련 서적 보관우측 벽면 통창으론 옛 신라 봄풍경 '만끽'오늘부터 오는 31일까지 경주 대릉원에서는 '대릉원 돌담길 벚꽃축제'가 열린다. 꽃구경과 함께 이색적인 곳을 둘러볼 예정이라면 인근에 위치한 '신라 천년서고'도 좋다. 국립경주박물관 일대에 자리한 신라 천년서고는 과거 수장고로 이용했던 건물을 새롭게 꾸민 박물관 도서관이다.지난 2022년 12월 개관한 신라 천년서고는 박물관, 신라와 경주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 내부는 박물관과 도서관의 특징을 조화롭게 갖춰 실내 유적지 같은 느낌을 준다. 서가 사이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소파, 목재 벤치의자 등 다양한 형태의 앉을 자리가 있어 좌석의 선택 폭이 넓다. 우측 벽면에는 통유리창이 있어 옛 신라의 봄 풍경을 만끽하며 책을 읽을 수 있다.국립경주박물관 일대에 자리하고 있어 밖에서는 자연 및 유적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신라역사관, 신라미술관, 어린이박물관 등 근처 여러 전시관에 도보로 가기도 좋다.◆지역 향토자료 가득 '경주시립도서관'벚꽃명소 황성공원 입구 자리한 전통한옥형개관 70년 넘은 '신라 역사문화 특화도서관'인파가 많은 곳을 꺼린다면 '경주시립도서관'으로 눈을 돌려보자. 경주시립도서관은 황성공원 입구에 있는데, 황성공원도 경주의 벚꽃 명소 중 한 곳이다. 대릉원쪽보다는 한산해 공원 벤치에 앉아 벚꽃과 책을 함께 즐기기 좋다. 경주가 신라의 역사를 품은 도시인만큼 건물도 전통 한옥의 형태를 띤다. 개관한 지 70년이 넘은 도서관은 '경주시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라 역사문화 관련 특화도서관이다. 일반 도서뿐만 아니라 고서, 지역 관련 도서 및 논문집 등 향토자료도 약 7천개 보유하고 있다. 이는 2층 종합자료실 구석에 위치한 '향토자료실'에 진열돼 있는데, 사서에게 요청하면 열람할 수 있다. 경주와 신라의 역사, 문화 등을 담은 여러 서적을 만나볼 수 있다. 신분증을 맡기면 대출도 가능하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적산가옥을 재활용한 대구 삼덕동 '삼덕마루 작은 도서관' 내부. 5개의 다다미방이 있다.대구 가창면 '아트도서관' 2층 내부.'반야월역사 작은 도서관' 외경.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천년서고 내부.경주 황성공원 입구에 위치한 경주시립도서관 외경.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대구·경북 이색 도서관 여행 (1) 봄꽃내음 따라 걷다 책향기 이끌려 들어서니…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다가온 봄 풍경에 탄성을 뱉는 이들이 보입니다. 찬란한 햇살과 분홍빛 풍경…. 벚꽃 만개 시즌입니다. 제대로 봄을 즐길 시기가 왔습니다. 독자들께서도 이번 주말을 맞아 가족 또는 연인·친구와 함께 봄나들이를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우리 지역의 봄나들이 명소로는 대구는 동촌유원지·이월드·수성못, 경북은 경주 대릉원, 김천 연화지, 영주 원당천 등이 언급됩니다. 봄을 만끽하며 산책하기 좋은 곳들이 대다수입니다. 저도 분홍빛의 벚꽃과 노란빛의 개나리가 어우러진 풍경을 아주 사랑해 매년 3월 말이면 동촌유원지에 꼭 방문합니다.하지만 벚꽃 명소는 항상 사람으로 붐벼 피곤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순 있었지만, 인파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람에 치이며 걷고 사진을 찍다 체력이 바닥나 기진맥진하며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느림의 미학이 필요함을 상기시켜줍니다.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조용한 순간을 즐기고,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명소를 찾아 봄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소소하게 계절을 맞이하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저처럼 봄을 즐기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잠시 소란에서 벗어나 도서관으로 향해보는 건 어떨까요.사람으로 붐비는 길을 걷다가 조용한 도서관으로 들어서면 그 순간 바깥의 소란과는 대조되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안정감이 밀려올지도 모릅니다. 도서관 안은 조용한 책장 소리와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무엇보다도 도서관 나들이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거나 문학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책 한 권을 골라 앉아서 읽는다면, 인파로 가득찬 벚꽃 아래에서의 시간보다 더욱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흔히 찾아볼 수 없는 이색적인 도서관에 간다면 '힐링'은 배가 됩니다. 대구경북에도 독특한 도서관이 꽤 있습니다. 적산가옥을 재활용한 곳, 희귀한 미술서적과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옛 기차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 과거 수장고로 이용됐던 곳, 지역에 대한 심도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곳 등입니다.이런 도서관들은 벚꽃 명소만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의 시간은 특별할 것입니다. 단순히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곳을 넘어서 문화와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가 이곳들입니다. 다양한 문화행사와 프로그램도 열려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과 기억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이번 위클리포유에서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대구경북 이색 도서관 5곳을 소개합니다. 평화롭지만 즐거운 봄날을 만끽하고, 몸과 마음 모두에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벚꽃 아래에서의 환상적인 순간만큼 좋은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병원 떠났던 대구 수련병원 전공의 700여 명, 복귀 시점 마지날에도 '요지부동'
[의대 증원 집행정지 각하·기각] 탄력받는 정부의 의료 개혁…남은 숙제는 전공의 복귀와 의사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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