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새로운 시대를 향한 미투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작품을 ‘미투(#MeToo)’의 예술적 버전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1997년 브루클린미술관에서 열린 영국 작가들의 전시 ‘센세이션’에 출품된 그녀의 작품 ‘나와 잤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화재로 인해 지금은 소실되어 사진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제목으로 인해 고조된 폭로성이나 야릇한 이미지, 나아가 에로틱한 상상을 부추긴다. 작품 제목도 제목이지만,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그녀 삶의 불행한 경험도 한몫 했을 것이다.
터키계 영국인인 트레이시 에민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후 가출을 했다. 그 후 두 차례의 낙태, 한 번의 유산, 폭음, 흡연, 극심한 우울 증세, 이로 인한 자살시도 등 극단적인 폭력적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일상과 그로 인한 고통을 작품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폭로해 왔다. 1999년 트레이시 에민을 세계적인 권위의 ‘터너상’ 수상후보로 지명하게 했던 설치작품 ‘나의 침대’가 대표적인 예다.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그녀가 실제 사용하는 침대와 써버린 콘돔, 피임약, 생리혈로 얼룩진 속옷, 구겨진 돈, 담배, 마셔버린 빈 술병들로 이뤄졌다.
트레이시 에민의 ‘나와 잤던 사람들’은 ‘나의 침대’와는 서술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통스러운 성적 경험 혹은 고조된 수치심을 고백하고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고발일 것이라는 상투적인 우리들의 기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파랑색 이동식 텐트를 골격으로 하는 작품은 그 내부에 그녀가 태어나던 해부터 작품을 제작했던 해까지 함께 잠을 잤던 102명의 이름들로 구성되었다. 여성적 자수 아플리케 형식으로 텐트 안쪽 벽에 붙어있는 이름들은 성적인 폭력과 결부되거나 이와 아무런 상관없는 이들까지 아우른다. 이름들은 생일, 주거지, 그녀와의 관계 등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단서는 아무것도 제시되지 않는다. 이는 트레이시 에민의 사적인 경험과 기억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현대미술의 지형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나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고발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으로 대변되는 연약한 일상에 가한 사회적 분위기와 관습적 폭력성을 폭로하였으며, 더불어 그에 자발적 참여자였던 우리들 모두의 시대적 모순을 동시에 고발하였다.
그녀는 지난달 23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최근의 ‘미투’ 운동에 관해 “최근 여성들에 대한 남성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미투’는 최근 우리 사회가 변화되었으며 이미 ‘끝나고 있는 시대’와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말한다. 김주원
2018.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