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 한반도 읍락국가의 형성

  • 임훈
  • |
  • 입력 2015-05-13   |  발행일 2015-05-13 제13면   |  수정 2021-06-16 16:43
달벌(대구)·사로(경주)·조문(의성)·이서(청도)·감문(김천)…삼한시대 경북에 읍락국가 번성
20150513
감문국(甘文國)의 영역인 김천시 개령면 일대의 전경. 감문국은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성립한 읍락국가로 누구에 의해 언제 건국되었는지 직접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삼한 78국은 각각 국읍과 읍락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국읍(國邑)을 중심으로 몇 개의 읍락(邑落)이 모여 하나의 나라가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김천시 제공>

 

 

<스토리 브리핑>
 

감문국(甘文國)은 삼한시대 김천지역에 존재했던 읍락국가(邑落國家)다. 삼국사기는 231년(조분이사금 2년) 신라 이찬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감문국이 멸망당했다고 전한다. 감문국은 삼한시대 진한 연맹체 중 한 곳으로 독자적 세력을 지녔으며,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 병합된 감문국은 진흥왕대에 이르러 ‘군(郡)’에서 ‘주(州)’로 승격됐다. 감문국의 영역이 신라 지방 통치조직 중 가장 격이 높은 ‘주(州)’로 승격된 것은 감문국의 영역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편에서는 감문국에 대한 본격적 고찰에 앞서 한반도 읍락국가의 형성과정부터 살핀다. 고대 읍락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알아야 감문국이 존재했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면밀히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감문국에 대한 독자의 이해 폭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 감문국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사(歷史)’는 누군가가 놓아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근·현대나 조선시대와 같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경우 사료(史料)는 매우 풍부하다. 덕분에 징검돌 사이의 거리는 짧고, 상대적으로 편히 건널 수 있다.

반면 고려와 통일신라를 거쳐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징검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진다. 감문국과 같은 읍락국가가 존재한 삼한시대의 경우 징검돌 사이의 간격은 더욱 더 멀다. 기록은 태부족인 데다, 당시 시대상의 상당 부분을 발굴유물의 존재나 형태에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읍락국가에 대한 고찰은 감문국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과거를 바라보는 기준점을 단단하게 세운다면, 향토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일부 지자체에서 ‘지역 현창(顯彰) 사업’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 했다는 논란이 종종 있어 왔기에, ‘역사적 팩트’에 대한 기본적 고찰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읍락국가의 건국에서부터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이해하려면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감문국과 같은 한반도 읍락국가는 대부분 삼한시대를 배경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마한·진한·변한을 아울러 지칭하는 ‘삼한’이라는 용어는 흔히 임진강 이남 지역에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300년 무렵까지의 시간적인 폭을 갖는 하나의 독립된 시대를 일컫는다”며 삼한시대를 정의했다.

이 기간은 계급의 분화에 따라 정치체제를 갖춘 초기국가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며, 고구려·백제·신라가 주가 되는 삼국시대로 진입하기 전의 단계다. 물론 삼한을 삼국시대 이전 역사로 총칭하는 데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기원전 2∼3세기경 속속 등장
정치·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읍락 간 뭉쳐 읍락국가 형성

대외전쟁·교역땐 통합됐지만
구속력 약해 독자세력 유지해

변한·마한·진한 등 ‘삼한’은
읍락국가간 더 큰 범위 연맹체





20150513
#2. 삼한(三韓)의 성립과 읍락국가의 형성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다. 특정 장소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이후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배계급이 등장했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등장은 읍락국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지리적 위치 탓에 상대적으로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쉬운 한반도 북부지역의 경우 읍락국가의 성립이 빨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감문국이 위치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늦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2~3세기경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읍락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락 내부에서는 일정한 혈연관계가 형성되면서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급사회는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속화됐다. 사람들은 외풍에 견디고 생존하기 위해 결속해야만 했다. 독립된 읍락과 읍락이 정치·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하나의 국가가 된 것이다.

대구에 존재했던 읍락국가인 달벌국의 예를 들면 이해는 더 빠르다. 달벌국의 정치적 중심세력은 현재 대구 달성공원 일원에 정착해 살았다. 수도 역할을 하는 읍락을 ‘국읍(國邑)’이라고 하는데, 달벌국의 경우 국읍인 달성공원 주변을 중심으로 대구의 월배, 다사 등에 있던 세력을 규합해 읍락국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읍락국가는 대외적 전쟁이나 교역때 하나의 국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였다.

대구 달벌국 외에도 경주의 사로국, 의성 조문국, 청도 이서국을 비롯해 김천 감문국까지 여러 읍락국가가 생겨났다. 감문국 또한 대구의 달벌국처럼 여러 읍락이 합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읍락국가들을 더 큰 범위에서 연결한 것이 ‘변한·마한’과 더불어 삼한의 연맹체 중 한 곳인 ‘진한(辰韓)’이다. 진한의 맹주로 경주의 사로국이 있기는 했지만 절대적 통치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감문국을 포함한 진한의 연맹체들은 현대의 국가와 같이 중앙통치적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연맹체 내 국가 간 구속력이 강하지 않았기에 각자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참고문헌=‘(진·변한사 연구)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 자문단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학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