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없이 골목 가득 채웠던 고기냄새…가게 이전·일대 재개발에 추억으로만…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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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11   |  발행일 2020-09-11 제34면   |  수정 2020-09-11
■ 대구 소갈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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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동 네거리 동북쪽 모서리 동산약국과 타월골목 틈으로 구불구불하게 열린 갈비골목 초입에 섰다. 비를 맞아 번질거리는 정오 무렵의 '진갈비'. 숯불갈비 간판은 그대로인데 가게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 많던 갈비집들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 곳 '성주식당'만 외로운 촛불처럼 서 있었다. 지난 2월쯤 진갈비는 지난 60년간 이어온 고단한 여정을 멈춰섰다. 진갈비는 폐업됐다. 그시절 밤낮없이 피어올랐던 그 향취 가득한 고기냄새는 이제 맡아볼 수가 없다. 동산 길건너 섬유회관 바로 옆 국일생갈비만이 '갈비는 결코 죽지 않는 네버엔딩스토리'임을 외치고 있었다. 이 골목은 대구은행 동산동지점, 동산병원, 그리고 동산약국, 타월골목, 그리고 서문시장, 북성로, 서성로 상권과 맞물려 돌아갔다. 특히 서문시장 포목점과 동산동 실가게는 50년대 한국경제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였고 60년대까지 특수가 이어졌다. 그 수요에 부응한 게 바로 불고기 전문 '계산땅집'과 '동산동 갈비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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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소갈비의 산증인인 진홍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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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의 경제가 서울을 압도하던 시절, 현금유통량이 최고조에 달할 때 등장한 진갈비가 이후 16개의 갈빗집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돼 한국 최강 갈비골목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하지만 지난 2월 60년 역사의 진갈비가 폐업을 하면서 이 골목도 명맥을 다해버렸다. 현재 성주식당 하나만 남아 있지만 조만간 재개발에 들어가 모두 뜯기게 되고 몇 년뒤 새단장된 모습으로 복귀할 거란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서 태어난 진홍렬은 감이 빨랐다. 그의 아내 박분순과 여기에 깃대를 꽂는다.

진갈비는 수원갈비와 선순환된다. 진씨는 56년부터 수원갈비 1대 주인 이귀성씨가 불을 붙인 수원갈비 특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가 진갈비를 낼 때만 해도 대구에선 소갈비를 구워먹는다는 게 무척 생소했다. 돼지수육, 따로국밥 등이 만만했다.

60년 오픈하자 5년 뒤 태동갈비가 생기고 뒤이어 원갈비, 삼성갈비, 태동갈비먹쇠, 동산, 성주 등 16개 업소가 밀집하게 된다. 그땐 주인들이 도축할 소를 공동 구매해 서구 원대3가 내환병원 옆에 있었던 도축장(거기에 있던 신흥산업은 63년 성당못 옆에서 삼익뉴타운 근처로, 다시 북구 유통단지로 옮긴다)에서 고기를 가져왔다. 진씨는 진로 측과 손을 잡고 진로의 '진(眞)'자를 넣어 진갈비로 상호를 정한다. 많이 팔릴 땐 하루 황소 7마리 반을 팔기도 했다.

진갈비 진홍렬씨가 가게 낼 시기
대구에선 생소했던 소갈비 구이
주변서 16여곳 우후죽순 문열어
도축장서 공동구매로 고기 수급

한우 갈비는 제1~5번 갈비를 '본갈비'라 한다. 갈비 근육이 살코기, 지방 등 세 겹으로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 마블링이 좋아 생갈비구이에 이용해도 무난하나 등급이 낮은 것은 통갈비로 썰어 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제6~8번 갈비는 '꽃갈비'. 양념하지 않고 칼집을 넣은 생갈비구이에 좋다. 제9~13번 갈비는 '참갈비'. 본갈비에 비해 섬유질과 근막이 많고 거친 편이다. 꽃등심과 양지의 중간 정도 맛이 난다. 갈비뼈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갈비탕에 좋다. 서울에서는 흔히 꽃갈비만을 구이용으로 사용하는데 영남지역은 1~13번을 통째로 사용한다.

초창기 진갈비는 1인분으로 팔지 않고 한 대(약 15㎝)씩 팔렸다. 한 대 가격은 20원이었고 생갈비보다는 양념갈비가 유행했다. 수원갈비는 큼직하게 잘랐지만, 그는 5㎝ 정도로 알맞게 잘라 팔았다. 간장과 마늘, 설탕, 배, 참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갈비양념을 만들어 쟀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재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한 끝에 6~10시간이 적당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아낸다.

진갈비는 지금처럼 전기톱이 없어 초창기엔 도끼로 갈비를 잘랐다. 불편함을 느낀 진씨가 70년대 초 서울의 마장동에 가서 전기톱을 대구에서 맨 처음 구입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아 가업에서 손을 뗐다. 그의 사위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오피스텔이 완성되고 나면 그 언저리에 신축된 진갈비를 선보일 겁니다. 그게 장인 어른의 뜻이기도 하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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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동 갈비골목에서 유일하게 남은 갈빗집인 성주식당 입구 전경.

근처 성주식당을 찾았다. 74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성 출신 김태연 여사, 2002년 딸 도현숙씨가 가업을 승계한다. 이 집은 여느 갈비집과 달리 뭉티기처럼 뭉턱뭉턱 막 썰어낸다. 언뜻 포항 죽도시장 막회의 포스가 감돈다. 고기와 살점, 근육질이 알맞게 균분시킨다. 도자기에 비유하자면 잘 다듬은 갈비를 일본도자기라 한다면 이 집 고기는 분청사기·막사발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어둑한 실내 정경, 예전 달셋방 같은 6개의 룸. 그 안에서 묵묵히 고기가 굽힌다. 갈비살에서 돋아나는 기름기가 꼭 어둔 밤 호수에 어리는 수광(水光) 같다. 그리고 느끼함을 가시게 해주는 양은냄비표 된장찌개.

이 식당도 머지않아 재개발지에 편입된다. 하지만 진갈비처럼 다시 재오픈할 계획이다.

갈빗살 뭉턱뭉턱 써는 성주식당
느끼한 맛 잡는 된장찌개도 별미

신암동 막강 로스구이 신성가든
등심구이·불판볶음밥 히트시켜
서울댁이 안동역전서 갈비식당
서울식 갈비에 마늘요리법 결합
이후 안동역 앞도 갈비골목 형성


71년 동구 신암동 육교 근처에 막강한 로스구이 집이 생겨난다. 신성가든이다. 신성은 의성 출신의 초대 사장 장문상·김옥난 부부한테서 외아들 장성운에게로 명맥이 이어진 대구의 첫 등심 로스구이 집이다. 신성은 양념갈비시대에 도전장을 냈다. 77년쯤 대구은행 신암동 지점 근처, 86년엔 수성구 시대를 겨냥해 수성구 대구은행 본점 동편으로 옮긴다.

신성의 히트작은 생 등심구이와 불판 볶음밥이다. 신성 전만해도 대구에선 곁반찬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불고기국물에 밥 먹는 게 고작이다. 밥에 된장을 곁들인 건 80년대 버전이다. 그런데 신성은 한발 빨랐다. 불판 볶음밥 요리법은 간단하다. 파와 잘게 썬 김치, 참기름이 가미됐을 뿐인데 식당 복인지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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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가든 등과 함께 갈비문화 대중화에 올인했던 북구 고성동 대창가든.

북구와 서구의 경계선인 태평네거리. 대구종합경기장에서 태평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리모델링 중인 태평전화국 바로 남쪽에 일제때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은 지금은 옹색하기 이를 데 없지만 광복 직후만 해도 1943년 문을 연 KBS방송총국(현재 태평전화국 자리)과 함께 서대구의 수문장 구실을 했다. 그 건물의 마지막 소유자는 대창가든. 충북 영동에서 손맛 짭짤하기로 유명한 여주인 정채연이 명성을 구축했다.

대구에서 새로운 흐름의 갈비문화가 등장한다. 98년 6월이다. 신축된 KBS대구방송총국 골목에 '안동갈비'가 오픈한 것. 밀양 출신의 김희곤과 대구 출신의 김정원. 부부는 남모르는 혹독한 시련을 품고 가게를 오픈했다. 그 고기의 원전은 60여년전 안동역전에서 출발한 '서울갈비.' 서울에서 내려온 서원님 할매는 서울 갈비요리에 경상도의 마늘요리를 합쳤다. 안동 토박이가 아니라 서울댁이 새로운 버전의 안동갈비를 탄생시킨 것. 서울갈비 뒤에 '거창갈비'가 가세했다. 졸지에 운흥동 안동역전도 '갈비골목'이 돼 15개 업소가 몰린다. 3번 이사한 서울갈비는 여전히 역전권에서 '구서울갈비'로 장사하고 있다. 딸 전숙자씨가 대를 이었다. 이 흐름이 대구로 흘러와 현재 수성구 '혜동갈비'로 성업 중이고 이후 중동교 근처 봉덕맛길도 안동갈비거리로 활성화 된다. 이 흐름을 물고 달서구 월광수변공원 먹거리촌 내 '참한우숯불갈비'가 돌풍을 일으킨다.

이밖에 울산 언양과 봉계한우마을, 경주 안강과 산내, 경산 와촌, 영천, 예천, 영주, 울릉도 약소와 칡소 등도 경상도 갈비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아직도 소는 돼지와 함께 '달구벌표 구이찬가'를 떼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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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땅집의 불고기, 대신동 갈비골목, 동인동 찜갈비의 흐름을 잘 포용하면서 현재 가장 성공적으로 갈빗집을 운영하고 있는 섬유회관 옆 국일생갈비. 서이택 사장은 매일 전라도권에서 엄선된 암소 갈비를 손님이 직접 볼 수 있는 입구 오픈 작업대에서 갈비를 라이브공연처럼 장만해주는 걸 퍽 자랑스럽게 여긴다.

현재 대구에서 가장 짱짱한 포스를 유지하고 있는 갈빗집 중 한 곳인 섬유회관 옆 '국일생갈비'.

현재 대구가톨릭대 평생교육원 외식CEO과정 총동창회장인 서이택(55) 사장은 동향(고령) 선배인 이경수 사장이 75~85년 운영한 이 가게를 23년전에 인수해 2대 사장이 된다. 초창기에는 육부장 직원으로 일을 했지만 성실성 덕분에 직원에서 사장으로 승업할 수 있었다.

비결은 뭘까?

"한우를 생명처럼 대하자는 게 제 신념이기도 합니다. 고기도 잘 장만해야 되고 그걸 적당한 온도에서 잘 구워내야 하죠. 주인과 테이블 서버가 손발이 안맞으면 절정의 고기맛을 볼 수가 없죠.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이 장사는 그렇게 오래 롱런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국일생갈비 인수한 서이택 사장
전라·충청서 엄선된 한우 공수
가게입구서 발골 그대로 보여줘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엄선된 거세 암소한우 갈비 10짝을 가져온다. 대구 갈비집 고기 중 거세암소 비율은 채 3% 정도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사바키(골발도로 고기를 저며내는 일) 과정이 승부처다. 여기서 고기 식감이 많이 비틀리게 된다. 3명의 칼 전문가가 가게 입구 왼쪽 작업대에서 라이브공연을 벌이듯 '병풍뜨기'를 한다. 내공이 바닥난 업소는 저급한 늑간살· 살치살 등을 슬쩍 갈비에 붙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고기 장만 과정을 손님들이 다 볼 수 있게 한다. 직원은 더 긴장하고 손님은 확인하고 먹을 수 있어 일석이조다.

"마블링이 잘 발달된 갈비 6~8번은 '꽃갈비살'인데 너무 기름져 마니아는 본갈비(1~6번), 참갈비(9~13번)를 선호하죠. 저희들도 식감을 위해 갈비 3~4번만 특갈비로 냅니다. 된장을 끓일 때도 뼈와 해체과정에 나온 갈비살 등을 넣습니다."

글·사진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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